[안후연 선수, 동양인 최초로 ‘사이클링 히트’(Cycling Hits : 경기에 1루타, 2루타, 3루타, 홈런을 친 것으로 매우 드문 기록. 미국에서는 사이클링 히트(Hit for the Cycle)라고 한다)를 기록한 소감이 어떻습니까?]'최고의 무대 메이저리그에서 동양인 최초로 세운 기록에 흥분한 듯 질문하는 기자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에 반해 카메라 앞에 서 있는 기록의 주인공은 차분한 모습이었다.'텔레비전은 40인치였지만 액정인지라 옆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지현은 결국 훑어보던 서류철을 내려놓고 책상에서 일어나 방 가운데로 갔다. 그제야 화면 속의 남자가 선명하게 보였다.'하얀색의 NY자가 당당하게 박혀 있는 짙은 감색 모자를 벗자 남자의 짧은 흑갈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공기 중에 스며든 저녁의 향취는 막 경기를 승리로 이끈 남자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와 함께 호흡했다. 덕분에 지현은 남자의 존재감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남자는 강력했다. 190센티미터를 넘는 거대한 키와 드넓은 어깨, 늘씬한 등줄기를 타고 역삼각형으로 이어지는 좁은 허리와 날렵한 둔부, 두껍고 단단한 허벅지까지, 카메라가 남자의 전신을 훑은 것은 찰나에 지나지 않았지만 지현은 물론 누구라도 남자가 얼마나 단단한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울룩불룩한 근육과는 달리 마냥 강한 것만은 아니었다.'일렁이는 바람과 함께 흔들리는 흑갈색 머리카락 밑으로 펼쳐진 이마는 부드러웠으며 이어지는 콧날은 매끄러웠다. 턱 선은 굵고 진했지만 입술은 남성의 것이라 보기 힘들 정도로 도톰했다. 그리고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깊숙한 남자의 두 눈동자는 보름달이 뿌리는 은은한 금가루가 감도는 진한 흑갈색이었다. 경기를 승리로 이끌 때마다 월식(月蝕) 중인 달처럼 까맣게 변하는 눈은 야구 선수답지 않은 하얀 피부 속에 보석처럼 자리 잡아, 보는 이들로 하여금 남자의 강함을 인식시키는 동시에 남자의 부드러움 또한 영원히 각인시켰다.'안후연. 모델 같은 외모의 소유자이자 세계 최고의 무대, 메이저리그의 손꼽히는 강타자. 타율, 홈런, 타점, 장타율, 출루율 등 모든 면에서 1, 2위를 다투는 안후연은 뉴욕 양키스 팀의 4번 타자로 신인왕, 홈런왕과 리그 MVP, 각 포지션 별로 최고의 타격 솜씨를 가진 선수에게 주는 실버슬러거, 역시 포지션별로 최고의 수비수에게 주는 골드글러브 등 화려한 수상 경력을 자랑했다.'수상 경력만큼이나 기록도 대단했다. 지난 아홉 시즌 동안 5회 연속 골드글러브 수상, 3회 연속 실버글러브 수상, 두 번의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Inside The Park Home Run : 안타를 친 타자가 빠른 발로 1, 2, 3루 그리고 홈까지 들어와 홈런처럼 득점하는 것. 우리나라에서는 그라운드 홈런이라고 한다), 올스타 게임 MVP, 홈런 레이스 우승 등등.'명실상부한 최고의 타자인 안후연 선수가 달성하지 못했던 몇 안 되는 기록 중 하나가 바로 사이클링 히트였다. 그런 그가, 메이저리그 진출 10년 만에 드디어 해낸 것이다.'[물론 기쁩니다.]'낮고 허스키한 목소리의 안후연은 차분한 어조로 소감을 밝혔다.'[이런 대기록을 작성하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기쁘군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기쁜 건 팀이 승리했다는 사실입니다. 5연승을 이어 나가는 데 큰 공헌을 세운 동료들에게 감사를 표합니다.]'[정말 겸손하시군요. 오늘 뉴욕 양키스 팀이 이길 수 있었던 건 안후연 선수의 사이클링 히트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안후연이 얼마나 겸손한 선수인지 잘 알고 있는 기자는 새삼 감탄을 표했다. 감탄하는 건 기자만이 아닐 것이다. 아침 경기든 새벽 경기든 꼬박꼬박 생중계를 챙겨 보는 한국의 많은 팬들도 마찬가지일 터.'그 팬들처럼 지현 또한 아침 일찍 일어나 일에 방해가 된다는 걸 알면서도 중간중간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감탄하진 않았다. 조금, 아주 조금 기쁘긴 했지만.'[누구와 이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까?]'묘한 뉘앙스를 담고 있는 영어 질문. 그 질문을 한 기자는 풍만한 몸매의 금발 미인이었다. 가슴이 지나치게 많이 파인 옷을 입고 있어 안후연 정도의 키라면 눈을 살짝 내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슴의 계곡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지현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야 말았다. 아무리 취재 경쟁 때문에 주변 다른 기자들에게 눌리고 있다 해도 안후연과 여기자는 지나치게 밀착되어 있었다. 지현은 기자가 유혹하듯 눈웃음을 짓고 있다는 사실 또한 알아차렸다.'내가 상관할 바 아니야.'미간을 찌푸리며 지현은 리모컨으로 볼륨을 높였다. 주변의 소음과 더불어 안후연을 유혹하는 듯한 여기자의 숨소리가 들리자 꺼 버리고 싶었지만, 심장의 일부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보고 싶다고 외치고 있었다.'[물론 동료들과 이 기쁨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 가족과 팬들께도 감사를 전합니다.]'나무랄 데 없는 뉴욕식 영어로 안후연은 모범적인 답을 말했다. 동시에 그는 도톰한 입술을 살짝 움직여 미소를 지었다. 경기가 승리로 끝났을 때에만 보여주는 섹시한 표정을 바로 코앞에서 목격한 여기자는 몸을 비비 꼬기 시작했다.'갑자기, 금방이라도 옷을 벗어 던질 듯한 여기자의 등 뒤로 누군가가 튀어나오더니 거친 손짓으로 안후연에게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지현은 저 무례한 남자가 기자라는 호칭을 붙이기도 민망할 만큼 저질적인 인간임을 알아보았다. 누구에게나 예의 바르게 대하는 안후연에게도 저 기자는 가끔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최악의 질문을 던지곤 했었다.'예감이 좋지 않았다. 지현은 안후연이 적당히 질문을 피하길 바랐지만 생중계 되고 있는 터라 빠져나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기회를 잡았다는 사실이 못내 기분 좋은 듯 기자는 특유의 징그러운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안후연 선수! 오늘이 안후연 선수 부인 생일이던데 그래서 더 힘을 낸 건가요?]'안후연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변화를 발견하지 못했겠지만, 불행히도 지현은 알아차렸다. ‘부인 생일’이라는 말에 그의 입술 끝이 차갑게 굳었다는 사실을.'하지만 곧, 안후연은 더욱 깊게 웃으며 답했다.'[물론입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했습니다.]'[그렇군요…….]'기자는 다시금 징그럽게 웃으며 말끝을 흐렸다. 그의 속셈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안후연이 다른 기자들에게 사이클링 히트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 지현은 더 이상 불가능할 정도로 미간을 찌푸렸다. 곧 다시 한 번 축하한다는 기자들의 아우성을 마지막으로 ‘오늘의 선수’ 인터뷰는 끝을 맺었다.'잠시 멍하니 텔레비전 화면을 쳐다보며 지현은 손톱 끝으로 톡톡 리모컨 모서리를 두드리다 익숙한 케이블 광고가 몇 개 스쳐 지나간 뒤에야 수화기를 들었다. 몇 번 걸어 보지 않았지만 그녀의 손가락은 익숙하게 단축키를 기억해냈다.'[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삐 소리가 난 뒤 메시지를 남겨 주시면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그 남자의 목소리 대신 영어로 된 딱딱한 기계음이 지현을 맞이했다. 그녀는 잠시 고민했지만 삐 소리가 나자마자 입을 열었다.'“나…… 예요. 내 사무실 직통 전화로 전화해 주세요.”'30분 뒤, 전화가 왔다.'[전화했었습니까?]'역시 텔레비전보다 수화기를 통해 듣는 목소리가 더 그윽했다. 그 사실에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며 지현은 말했다.'“네.”'[무슨 일입니까?]'“그 사이클링 히트…….”'[축하 전화입니까?]'질문이었으나 평소처럼 높낮이가 없는 차분한 어조였다. 아니, 다소 고조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축하를 하기 위해 일부러 전화를 걸어 줬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그럴 리가 없었다. 대기록의 여운이겠지.'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실망감을 무시하며 지현은 예의 바르게 말했다.'“사이클링 히트, 축하해요.”'[감사합니다.]'바로 용건을 말해야 하나.'마땅히 따로 할 말이 없었기에 지현이 바로 본론을 꺼내야 할지 망설일 때 남자가 툭 물어왔다.'[건강합니까?]'“네?”'[건강하냐고 물었습니다.]'“네. 그쪽도 건강한가요?”'[물론 그렇습니다.]'지현은 방금 텔레비전에서 건강한 모습을 확인했으면서도 그런 질문을 한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확실히 이 남자를 대하는 자신의 모습은 평소의 침착한 태도와는 거리가 멀었다.'속으로 긴 한숨을 내쉰 그녀가 바로 본론을 말하려할 때 남자가 다시 물어왔다.'[다른 할 말이 있습니까?'“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