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실버라이닝 : 구름의 흰 가장자리, 밝은 희망
1998년 여름,
그곳은 그런 곳이었다. 태어난 순간 첫 호흡과 함께 밀려들었던 원초적인 외로움, 삶 전체를 지배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외로움이란 감정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곳, 그곳은 그 아이가 있는 곳이었다.
아이를 처음 본 것은 여름의 무더위에 밤잠을 설치고, 걸음이 느려지고 타는 듯한 갈증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숨 막히게 더운 계절이었다.
달콤한 잠에서 깨기 싫어 꼼지락거리며 늦장을 부리던 겨울의 새벽과 달랐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 일쑤인, 해가 뜨기도 전부터 눅눅하고 습한 계절의 새벽이었다.
더위에 뒤척이며 내내 잠 못 드는 것보다 차라리 그 시간에 글자 한 자라도 더 보는 게 나았다. 얼마 전 늘린 아르바이트 인해 부족했던 과목을 보충하기 위해 소년은 책상 앞에 앉아 책을 펴들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행인의 발자국 소리, 그 소리에 놀란 고양이가 담벼락을 뛰어넘는 소리, 고양이의 기척에 놀란 개가 짖어대며 까무룩 잠에 빠진 사람들을 뒤척이게 만들었다.
달동네의 밤은 유난히도 버겁다. 비단 밤뿐만이 아니었다. 옹기종기 모여 있어 바람한 점 불지 않고 겨울엔 빛조차 쉬이 들지 않는 그런 곳, 새벽임에도 책을 펴든 소년의 몸이 습한 공기로 젖어들며 땀방울로 바뀌었다. 요 근래에 늘 그러했듯 소년은 오늘도 뜬눈으로 새벽을 맞았다.
“오셨어요? 소장님?”
“어, 준혁 군 일찍 나왔네? 오늘도 잠 설친 모양이네. 얼굴이 꺼칠해 보여, 설마 또 밤새우고 온 거야?”
“그렇죠 뭐,”
막 자전거에 실은 우유 박스를 낡아 늘어진 끈으로 단단히 고정시키던 준혁이 소장을 향해 무심하게 대답했다.
해진 민소매 셔츠에 반바지, 슬리퍼 차림에 먹은 게 없어도 늘 이쑤시개를 손에서 놓지 못하는 건 소장의 오랜 습관이었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피곤해서 어쩌나, 아침엔 우유 배달에 낮엔 공부에 저녁에 또 아르바이트 시작했다고 하지 않았어? 몇 시간이라도 잠을 자야 몸도 견디지 안 그래?”
“소장님도 저 거뜬해요. 겨우 며칠 밤잠 설치는 게 다인데요 뭐, 저녁 아르바이트도 수월한 편이고요.”
“그래 젊다 이거지?”
“네!”
“씩씩해서 보기는 좋다!”
책상에 걸터앉은 소장이 허허대며 오늘 들어온 우유 량을 체크했다. 허허실실 겉모습과 달리 일에 있어 꼼꼼한 사람이었다. 소장이 막 영수증을 집어 들었을 때 책상 위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여보쇼, 우유 배급소요.”
시큰둥하게 전화를 받아 든 소장의 미간이 눈에 띄게 좁아들었다. 듣자 하니 누군가 또 아침 배달에 못 나온다는 전화인 모양이었다. 새벽 우유 배달을 시작하려는 사람은 꽤 많았다. 학비가 모자라는 학생부터 실직당한 가장 살림하는 주부까지. 그러나 돈에 궁한 사람도 하루 이틀 하다가 쉽게 지치는 게 새벽 우유 배달 일이기도 했다.
막 출근을 하는 배달원들이 통화 중인 소장을 향해 눈인사를 했다. 그리고 자기 몫의 우유를 묵묵히 박스에 담았다.
“이거 어쩌지? 어제 첫 배달 돌렸던 김 군 말이야. 도저히 못하겠다고 전화가 왔어.”
전화를 끊고 돌아선 소장이 앓는 소리를 하며 직원들 눈치를 살폈다. 한 사람이 빠지면 그 구역을 대신해 배달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듣고도 못 들은 척 우유를 담는 직원들의 표정에 싫은 티가 역력했다. 가뜩이나 더운 날씨에 당연한 반응들이었다.
“자, 저 먼저 출발합니다. 다들 수고하십쇼.”
“예, 수고들 하십쇼.”
불러 세우기라도 할까 직원들이 서둘러 자리를 떴다. 제 시간에 우유 배달을 마치려면 떠넘겨지는 우유가 아니더라도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차 군, 이거 어쩌지?”
이미 오래전에 배달 준비를 마쳤음에도 출발을 하지 않고 있는 준혁이었다. 겸연쩍은 표정의 소장이 준혁에게 다가왔다.
“내 차군 시급에다가 김 군 몫까지 아니, 거기다 조금 더 쳐서 줄 테니까 오늘 하루만 사정 좀 봐줄 테야?”
사실 오늘만이 아니었다. 새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학생들이 종종 말도 없이 무단결근을 할 때마다 소장의 부탁들 거절하지 않고 배달을 도맡아 하던 준혁이었다.
“시급 두 배에 조금 더 챙겨 주신다고 하신 거 잊으시면 안 돼요.”
“에잇, 준혁 군도 참 내가 언제 약속 어기는 거 봤어? 내가 말이야 신용이라면 전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준혁의 사정을 잘 아는 터라 미안함을 무마하려는 소장의 레퍼토리가 길게 늘어졌지만 준혁의 한 귀로 흘리며 자전거에 올라탔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수고!”
준혁의 뒷모습이 소장의 시야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곳에 그 아이가 있었다. 우유 배달소를 나와 오른쪽 모퉁이를 돌아 내달리기를 한참 준혁의 동네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넓고 높은 오르막길을 서너 번 오르다 내리면 키 작은 꽃나무들이 즐비한 작고 아담한 집이 나온다.
사실 자전거를 타고 오르기엔 준혁이 살고 있는 달동네나 부유한 사람들이 모여 산다는 이곳이나 힘들긴 매한가지였다. 높은 담벼락에 으리으리한 철제 대문 내부조차 쉽게 구경할 수 없는 철옹성 같은 집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는 하얀 집. 마치 상상 속에서나 존재할 법한 작고 아담한 집에 그 아이가 살고 있었다.
유난히 흰 피부에 밝은 갈색 눈동자 그와 같은 머리색이 너무도 어울려 묘하게 이질감이 묻어 나는 아이. 아이의 외모는 흡사 외국 영화에서나 본 낯선 이방인을 연상케 했다.
소녀가 아끼는 희고 작은 강아지 그리고 아이의 아버지인 듯 보이는 선한 인상의 중년 남자. 그곳은 마치 무대 위 잘 지어진 세트장처럼 햇살도 바람도 예고 없이 내리는 소나기도 연출의 한 장면인 양 신비롭고 흥미로운 곳이었다.
우유 배달을 하다 이따금 중년 남자와 마주칠 때면 남자는 우유 주머니에 있는 우유 중 하나를 도로 꺼내 준혁의 손에 다시 들려 보내곤 했다.
‘배 속이 든든해야 일이든 공부든 제대로 되는 법이야, 먹고 해, 학생.’
어쩐지 그 말이 듣기 좋았다. 요즘이야 뜸하지만 우유 배달을 하다 보면 종종 있는 일이었다. 때로는 안쓰러운 시선을 담아 때로는 아들에게 하듯 살갑게 배달된 우유 중 하나를 다시금 손에 들려 보내는 사람들, 감사하지만 괜찮다는 말과 함께 도로 우유를 건네고 돌아설 때와는 달리 준혁은 매번 남자가 주는 우유를 말없이 받아 들고 다음 집으로 향했다.
꾸벅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는 준혁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봐 주는 남자의 시선 또한 준혁은 싫지 않았다.
그리고 낮은 담장 너머로 여자아이와 옥신각신하는 남자의 낮고 부드러운 음성도 듣기 좋았다. 물론 아이의 말에 집중한 터라 라디오에 나오는 배경 음악처럼 남자의 말은 흘려듣기 일쑤였지만 말이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남자의 말이 날카롭게 준혁의 귀를 파고들었다.
“정유영, 너 또 강아지한테 우유 줬구나. 아빠가 주지 말랬지. 너 혼나 볼래?”
“쳇 강아지 아니고 용이야 아빠. 강아지 이름이 용이라고 몇 번이나 말해? 그리고 아빠도 그 아이한테 우유 주잖아.”
“뭐?”
당황한 듯 남자의 말문이 막혔다.
“그 아이, 우유 배달하는 아이 말이야. 아빠 몫의 우유 그 아이한테 주는 거 모를 줄 알아? 그 아인 되는데 왜 용이는 안 돼? 내가 우유 마실 때마다 요러고 두 손 모으고 쳐다보는 거 엄청 가엽단 말이야.”
“너, 진짜 혼나야겠어.”
남자가 아이의 머리를 아프지 않게 콕 쥐어박았다.
“용이는 우유를 마시면 소화를 시킬 수가 없어서 토하거나 설사를 할 수도 있어. 심하면 병원에 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그래도 좋아?”
아는지 모르는지 용이라는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토라진 아이의 주위를 맴돌았다. 제 얘기하는 줄도 모르고 신이 난 모양이었다.
“그리고 영아. 아빠 딸 정유영.”
남자가 아이의 앞에 한쪽 무릎을 세우며 자세를 낮춰 앉았다.
“아빠가 그 아이에게 우유를 주는 건 가여워서가 아니야. 네가 용이에게 우유를 주는 것과는 다른 거라고. 아빠 말 무슨 뜻인지 알아?”
아이는 아무런 표정도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남자가 아이의 양팔을 아프지 않게 잡았다.
“기특해서, 기특해서 주는 거야.”
“기특해서?”
“응. 예전 아빠 어릴 때 생각이 나서 기특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고 그래서 힘내라는 응원의 뜻으로 주는 거야.”
몰래 대화를 듣고 있던 준혁은 콕, 목구멍이 막히고 심장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술에 취해 산동네의 언덕길을 비틀거리며 올라와 사그라지지 않는 분노를 풀던 아버지에게서 느끼던 감정이 아니었다. 물론 그때도 목구멍이 막히고 심장이 뜨거워지긴 했다. 감동 따위 없는 그저 분노라는 다른 감정으로 인한 신체적 심리적 변화였을 뿐.
‘지긋지긋한 이놈의 집구석, 살갑게 맞아 줄 마누라가 있길 하나. 자식이 있길 하나.’
살갑게 맞아 줄 마누라가 없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살갑진 않아도 준혁은 그의 하나뿐인 혈육이고 아들이었다. 준혁의 엄마는 준혁을 낳다 죽었다. 아버지의 말처럼 지긋지긋한 집구석이 되어 버린 것도 준혁이 태어남과 동시에 외로움이란 감정을 품게 된 것도 자신의 탄생 그리고 그로 인한 엄마의 죽음 때문인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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