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어느 순간에 탁!

          

[작품 소개]

 

사랑에 서툰 그가 무디게 사랑을 깨달았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세상 후련한 표정으로 시원하게 웃던 민하가 어느 순간 멈칫했다.

, 이거…….”

이게 바로 서우가 말했던 어느 순간에 탁, 인가 보다. 오늘 서우를 보지 못한다는 생각에, 그녀가 집에 없다는 생각에 순식간에 무기력해졌나 보다. 그것 때문에 답답하고,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저 때문에 짜증이 났나 보다.

그제야 오늘 하루에 대해 의문이 풀린 민하는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허탈하게 웃었다. 그리고 인정했다. 아무래도 사랑인가 보다. 사랑스럽다나, 좋아한다 따위가 아니라 이민하는 백서우를 사랑한다.

명쾌하게 내려지는 결론에 민하는 가슴이 벅차도록 뿌듯했다. 그렇다면 이제 달려가야겠다. 저를 향해 오고 있는 서우를 향해서!

 

그녀는 어느새 무뚝뚝하고 무딘 남자를 사랑해 버리고 말았다.

 

민하가 손을 올려 부드럽게 서우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는 서우의 눈을 다시 들여다보며 말했다.

이렇게 서우 씨 눈동자 안에 온전히 나만 들어 있는 지금이 너무 좋습니다.”

저는 좀…… 부끄러워요.”

뭐가 부끄럽습니까?”

얼굴이, 얼굴이 너무 빨개서…….”

그것조차 예쁩니다.”

이 남자, 서우의 심장을 폭주하게 만들어 터트릴 작정인가 보다. 정말 부끄러워 다시 고개를 숙이려는 서우의 입술을 그가 다시 머금었다.

그리고 아까와는 다르게 혀를 내밀어 서우의 입술을 가로질렀다. 엉겁결에 벌어진 서우의 입 속으로 침입한 민하의 혀가 천천히 움직이며 잔뜩 움츠린 그녀의 혀를 찾아내어 살짝 비볐다.

생경하지만 그만큼 짜릿한 느낌에 서우의 어깨가 곤두서자 민하가 그녀 쪽으로 바싹 다가섰다. 민하는 단단한 몸을 붙이고 고개를 틀어 서우의 숨을 앗아 마시며 다급하게 그녀의 몸을 안았다.

야금야금 서우의 입 안을 정복하고, 서우의 혼을 빼앗는 민하는 소름 끼치도록 매혹적이어서 서우는 그 순간 깨닫고 말았다. 제가 이 남자를 사랑하고 말았음을.

그를 좋아한다고만 생각했다. 아직 사랑을 말할 수 있는 정도의 감정은 아니라고,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민하의 키스를 온전히 받아들이며 알아버렸다. 제가 어느새 이 무뚝뚝하고, 서툰 남자를 사랑하고 있음을.

 

 

 

 

[작가 소개]

 

823일생.

 

감정기복이 심한 전형적인 B.

 

가슴이 따뜻해지는

 

사랑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싶은 사람.

 

어느 순간에 탁!

 

이희정

 

목차

 

01

02

03

04

05

06

07

08

09

에필로그

#01.

 

아침 7시도 안 됐는데 벌써부터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서우는 누에고치처럼 이불 안으로 파고들었다.

서우야! 백서우!”

나는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 안 들린다…… 자신에게 최면을 걸며 제 이름을 부르는 엄마, 박광순 여사의 목소리를 외면해 보지만 그럴수록 서우의 고막에는 제 이름 석 자에 스타카토라도 박힌 것처럼 한 글자, 한 글자가 콕콕 들어와 박혔다.

미간을 있는 대로 찡그린 서우는 서너 번쯤 제 이름을 더 듣고서야 미적미적 몸을 일으켰다. 제 잠귀가 조금만 어두웠어도, 평소에는 있는지도 모르고 사는 제 양심이란 놈이 조금만 덜 찔렸어도, 모른 척 이불 안에서 뒹굴었을 텐데 그 조금이 모자라 결국 박 여사 향해 목소리를 돋웠다.

, 나가요!”

주섬주섬 머리를 올려 묶고 두툼한 점퍼를 찾아 걸친 서우가 집 밖으로 나가자 막 열무 네 단을 한꺼번에 들어 올리던 박 여사가 인기척을 느끼고 기다렸다는 듯 잔소리를 쏟아 부었다.

으이그, 오늘 열무김치 담근다고 일찍 일어나서 물건 온 거 같이 좀 들이자고 그렇게 말을 했는데 이제야 일어나?”

잘못했어요.”

만날 말로만 잘못했다지, 그냥! 엄마도 이제 환갑이 코앞이야, 이것아.”

“5년이 무슨 코앞이야?”

먼 것 같지? 아니야, 5년 잠깐이야. 어어, 하다 보면 금세 5년 가고 10년 가는 거야.”

알았어요, 알았어.”

더 말해 봐야 결국 엄마의 말발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서우가 머리까지 조아리는 흉내를 내자 박 여사가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이제 컸다고 엄마가 뭐라 하는 소리는 듣기 싫다 이거지?”

아아니! 내가 언제?”

지금 그러잖아.”

오해십니다, 박 여사님. 저는 어디까지나 조금이라도 빨리 대문 앞에 쌓여 있는 김칫거리들을 작업장 안으로 들여놓고자 했을 뿐입니다.”

어이구, 말이나 못하면?”

요즘 같은 세상에 말도 못하면 바보 취급 받지요, 어머니.”

실쭉 웃으며 대꾸하고 대문 밖으로 나간 서우는 소복하게 작은 동산을 이루고 있는 열무 더미에 깜짝 놀랐다. 제가 본 것을 믿을 수 없어 얼른 고개를 돌리고는 박 여사를 향해 어설프게 웃으며 물었다.

엄마, 이거 잘못 온 거지?”

잘못은 무슨, 엄마가 아까 꼼꼼하게 다 확인했어.”

홈페이지 주문은 이렇게까지 많지 않았던 거 같은데…….”

막내이모네 아파트에서 대여섯 집이 더 주문을 했어.”

진짜? 언제?”

어제저녁에.”

아아…….”

오늘 아주 일복이 터졌나 보다. 김치 장사를 해서 먹고사는 집이니 요즘 같은 불경기에 주문이 많으면 행복한 비명이 터지는 것이 정상이겠으나, 안타깝게도 서우의 집은 인력이 박 여사와 저 단둘뿐이었다.

하니 당연히 저 많은 열무를 다듬고 김치로 만드는 일은 오롯이 두 모녀의 몫이 될 터였다. 오늘 저를 기다리고 있을 그 육체노동이 만만치 않을 것을 예감한 서우는 절로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만 같았다.

박 여사의 김치 사업은 입덧으로 고생하는 막내이모가 안쓰러워 김치를 담아 보내준 것이 시작이었다. 그 아이가 올해로 어엿한 고등학생이 되었으니 만 17년이 넘은 셈이었다.

박 여사가 워낙 손맛이 좋기도 하지만 어떻게 운대가 맞았는지 그 김치로 막내이모가 입덧의 고통에서 해방되어 수월하게 아이를 낳았다. 아이를 낳고 난 막내이모는 육아를 방패삼아 박 여사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정기적으로 김치를 사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막내이모의 집에 놀러 왔다가 먹어 본 친구와 지인들도 그 맛에 반해 덩달아 김치를 주문했다. 박 여사는 용돈벌이 삼아, 심심파적 삼아 흔쾌히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작은 가내 수공업이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박 여사는 딱히 종류에 구애를 두기보다 계절에 맞는 재료들로 다양하게 김치를 담보냈다. 봄에는 열무김치와 얼갈이김치, 여름에는 총각김치와 오이소박이, 가을에는 파김치에 깍두기, 그리고 겨울에는 김장김치와 동치미, 그리고 짬짬이 각종 장아찌 종류까지 담는 박 여사의 김치는 알음알음으로 소개가 더해지며 천천히 입소문이 났다.

그 덕에 일이 늘기 시작한 박 여사는 사업자 등록도 하게 됐고, 떡하니 홈페이지까지 제작해 본격적으로 김치 사업에 뛰어들었다. 단단히 작심을 한 박 여사는 이윽고 마당에 김치 작업장부터 만들었다.

그리고 그 무렵 박 여사는 동네에서 손맛 좋다는 아줌마들 서넛을 심사숙고한 뒤 고용했었다. 평소에는 그냥 형님, 동생 하던 사이였지만 임금을 주고받는 어엿한 고용주와 고용인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 처음의 형님, 동생 하던 사이는 결국 파국으로 끝이 났다. 취업이 처음인 아줌마들은 위생모와 마스크, 작업복 등을 꼭 착용해야 하는 규칙에 취약했다. 또 그저 옆집의 김장을 도우러 갔을 때처럼 자신의 입맛에 맞춰 박 여사가 간을 맞춰 놓은 김치 양념에 멋대로 손을 대는 일도 있었다.

몇 번이나 당부를 해도 금세 또 그런 일이 생기자 결국 박 여사는 힘이 들더라도 당신이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하는 쪽으로 결론을 냈다. 평소의 친분 때문에 꽤 오랜 시간 망설였지만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뒤에서 돈독이 올랐다느니, 사람이 찌르면 피 한 방울 안 나오게 매정하다느니 하는 소리들을 수군거린다는 걸 알았지만 박 여사는 개의치 않았다. 그때, 그러니까 서우가 대학교에 입학한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박 여사는 이를 악물고 억척스러워져야 했다. 그런 박 여사의 고생과 희생이 있었기에 큰 어려움 없이 학업을 마칠 수 있었던 걸 서우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본디 직장이 따로 있었던 서우가 박 여사와 함께 김치 사업을 하게 된 건 고작 석 달도 되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운이 좋게도 꽤 괜찮은 회사에 들어갔었다. 남들이 다 알아주는 일류 대학에 다닌 것도 아니고, 학점이 빼어나게 좋았던 것도 아닌데 말 그대로 운이 좋았었다.

처음 회사에 입사했을 때 의욕에 넘쳤던 서우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을 익혔다. 부서에 폐가 되고 싶지 않아 기를 쓰며 배우고 일에 매달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우의 호의와 노력은 당연한 것이 되었다. 당연한 듯 점점 업무량이 늘어났다. 야근을 밥 먹듯이 하게 되고, 휴일도 제대로 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도 서우는 미련하게 그저 열심히만 했다.

그러다가 작년 가을, 어렵게 짬을 내어 집에 다니러 왔다가 호된 몸살을 된통 앓았다. 엄마가 해주는 따뜻한 밥 때문에 긴장이 풀린 건지, 몸이 더 이상은 무리라는 신호를 보내온 건지 모르겠지만 서우는 거의 닷새를 정신 못 차리고 앓았다.

그때 박 여사는 꼬박 곁에 붙어 앉아 쪽잠으로 겨우 눈만 붙여 가며 서우를 간호했다. 남편도 없고, 다른 자식도 없이 서우 하나 바라보며 살던 박 여사에게 그 닷새의 시간은 지옥과도 같았으리라.

남편이 어느 날 훌쩍 사고로 그녀를 떠나 버렸듯이 서우 역시 그러하면 어떡하나 싶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박 여사도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었다. 의사의 말도 있었고, 더디긴 하지만 차도가 있으니 서우가 몹쓸 병에 걸린 것은 아니란 걸 말이다.

하지만 자식 앞에서 이성을 앞세울 수 있는 부모는 그리 많지 않다. 평범한 대한민국의 부모일 뿐인 박 여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불시에 가족을 잃어 본 경험까지 있으니 더 말해 무엇 할까.

해서 박 여사는 서우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당장에 회사를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오라고 말했다. 와서 당분간은 허해진 몸을 좀 보하고, 천천히 다른 일을 알아보라고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그때 서우는 생각을 해보겠다는 말로 답을 대신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그러나 회사로 복귀했을 때 동료들은 마음이 아닌 건성으로 그녀의 건강을 걱정하는 말 몇 마디를 던지고서 곧장 밀린 업무로 서우의 등을 떠밀었다.

물론 서우도 안다. 그것은 이익을 추구해야 하는 기업의 속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것을. 하지만 하루 이틀도 아니고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거의 매일을 얼굴 부대끼며 일한 사람들에게 정이라는 소소한 감정을 기대한 것이 그렇게 무리였을까?

키우던 화초가 죽어도 마음이 아프고, 생면부지의 누군가가 사고를 당해도 안타까워하는 것이 사람의 인지상정이라는데 그보다 못한 대접을 받는가 싶어 씁쓸했다. 그 때문일까? 서우는 회사에 대한, 또 일에 대한 열정을 전처럼 불태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회사로 복귀한 날로부터 연 4일쯤 야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서우는 불현듯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더 이상 기업의 부속으로 감정 없이 살고 싶지 않다고…….

누군가는 네 분에 넘치는 직장을 다니면서 무슨 쓸데없는 생각이냐고 하겠지만 서우는 결심을 굳혔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적어도 사람 사이에 정이 흐르는 일을 하고 싶었다.

다음 날 서우는 박 여사에게 자신의 뜻을 알리고 분연히 회사에 사표를 던졌다. 비록 인수인계 때문에 두어 달 정도 회사에 더 나가야 했지만 어쨌든 마음만은 후련하고 홀가분했다.

서우는 그 시간 동안 제가 그만둔 후에도 업무에 차질이 없도록 맡은 업무를 마무리하고, 후임자에게 확실하게 인수인계를 했다. 살고 있는 집을 부동산에 내놓, 짬짬이 짐 정리도 마쳤다.

살고 있는 집이 나가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던 것과 달리 수월하게 다음 세입자가 정해졌다. 안도의 숨을 내쉰 서우는 작은 트럭에 제 짐을 싣고 박 여사가 기다리고 있는 이곳, 경기도 광주로 내려왔다.

처음 한 달은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는 지극히 원초적인 욕구에 부응하며 지냈다. 박 여사가 몸이 축난 서우에게 부지런히 음식을 해먹인 덕에 금세 뽀얀 낯빛을 되찾으며 스물일곱 , 또래의 생기발랄한 아가씨처럼 변해 갔다.

마음이 안정되면서 서우는 자신의 앞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조금씩 박 여사의 일을 돕기 시작했는데 의외로 일이 재미가 있었다. 물론 육체적으로는 서우가 지금까지 해왔던 그 어떤 일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힘이 들었다. 아무리 야근을 하고, 업무가 많다고 해도 직접 몸을 움직이고 힘을 쓰는 것에 비할까.

한데 몸이 힘든 것에 반해 마음은 한없이 편안했다. 또 김치를 받은 사람들에게 어쩌다 한 번씩 잘 받았다, 맛있게 먹겠다, 우리 애가 여기 김치 아니면 안 먹는다, 덕분에 없던 입맛이 돌았다 등등의 말을 들으면 더없이 뿌듯하고 행복했다. 제가 생각하고 그리던 정이 바로 이것인 듯해 서우는 박 여사와 의논 끝에 함께 김치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 보람찬 일 덕분에 오늘도 만만치 않은 하루가 될 것을 잘 알기에 서우는 입술을 야무지게 앙다물고 욕심껏 열무를 번쩍 들어 올렸다. 서우가 발걸음을 딛는 마당 안으로 이제 막 새봄으로 첫 발을 들인 싱그러운 아침 햇살이 청아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미리보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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