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경찰서 3층 취재실. 삼면이 막힌 독서실 책상으로 열 평 남짓한 공간이 꽉 차 있었다. 해가 중천에 떠오른 한낮에도 햇빛조차 들지 않는 후미진 구석, 그곳에 효원의 자리가 있다. 노트북 한 대 겨우 놓을 수 있는 자그마한 책상 앞에 등받이도 없는 의자에 앉아 기사 작성에 한창인 효원의 모습에서 불과 1년 여 전, 국영방송 BBS 간판 앵커였던 영광의 순간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귓불 아래에서 흔들거리는 지저분하게 자란 머리카락에, 콧잔등을 타고 자꾸만 흘러내리는 갈색 뿔테 안경을 쓰고, 화장은커녕 제때 다듬지 않아 한층 더 짙어진 눈썹과 붉은색이 희미해진 부르튼 입술을 하고 있는 효원의 모습은 이젠 제법 익숙해져 취재실의 다른 기자들은 놀라지도 않는다. '2년 동안 대형방송사의 앵커로 살아오며 사람들의 시선에 갇혀 자유롭게 옷 한 장 걸쳐보지 못하고 입 한 번 속 시원하게 떼지 못했던 효원은 면 티셔츠 한 장에 색 바랜 청바지를 입고 동료기자들 틈에 끼어 정치, 사회, 문화, 외교 전 분야에 걸쳐 가벼운 수다를 떨며 물 만난 고기마냥 취재실을 헤집고 다녔다. 등에 짊어졌던 무거움을 털어내고 사회부 경찰서 출입기자로 돌아온 효원은 일이 주는 즐거움에 더위도 모르고, 낮과 밤도 모르고 일에 빠져 지내고 있었다. '7개월 전, 효원은 진만이 내미는 손을 잡고 보도국에 특채로 입사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진만은 효원에게 입사를 제안했을 뿐, 효원을 보도국에 입성시킨 건 윤경하 보도국장이었다. 진만이 아무리 그룹의 부사장이라고 해도 뉴스의 심장부인 보도국 인사권까지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보도국의 인사결정권은 오직 보도국장 뿐. 마흔 다섯의 나이에 AJ미디어 뉴스채널 ABN의 보도국장 자리에 오른 윤경하는 국내 최대 민영방송사 UBS 보도국에서 20여 년 동안 이름 꽤나 날렸던 여성기자로 효원의 롤 모델이기도 했다. 'AJ미디어에 입사를 하겠다고 새벽부터 부사장실을 찾았던 효원은 진만에게서 경하를 소개 받았다. 하얗게 올라온 새치를 그대로 방치해둬 전체적으로 회색 느낌이 나는 짧은 커트 머리에 유독 붉게 강조한 입술에 문 담배 한 개비가 인상적이었다. 강렬했던 첫인상만큼이나 그녀의 언행도 강렬했다. 마치 작정이라도 한 듯 자존심을 짓누르는 단어 선택과 화살과 같은 뾰족한 어투에서 효원은 앞으로 펼쳐질 이곳에서의 나날들이 평탄하지만은 않겠구나 하는 짐작을 충분히 할 수가 있었다.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고, 입사한 그 다음 주부터 효원의 고난은 시작되었다. 장장 6개월 동안 2분짜리 외신뉴스 꼭지를 맡아 하루 종일 전 세계 뉴스를 모니터해야 했고 직접 편집도 해야 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목소리는 아나운서에게 양보해야 했다. 물론 그 결정은 고약한 윤 국장의 머리에서 나왔다. 효원은 애써 담담한 척 굴었다. '진만의 아래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엄마에게 계속해서 숨길 수 없었던 효원은 바로 사실을 털어 놓았다. 꼭 그렇게 해야 하느냐고 되묻는 엄마에게 호기롭게 대답했었다. 여봐란 듯이 정상의 자리에 서겠노라고. 그렇게 큰소리 빵빵 쳐 놓고 힘들다고, 견디기엔 윤 국장이 주는 모욕을 참을 수가 없다고 나자빠질 수가 없었다. 약해 빠진 모습, 엄마에게 또 한 번 보여주고 싶지 않았고 진만에게도, 경하에게도,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우뚝 선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에 이를 악 물었다. '일주일이 가고, 보름이 가고, 점점 시간이 흐르자 하루의 대부분을 세계 각국의 뉴스 모니터에 할애하고 편집을 하다 보니 다른 생각은 할 겨를이 없었다. 그것이 은근히 좋았다. 바쁜 나날이 일상이 되어버려 몸이 힘드니 밤에 잠도 잘 오고, 잠을 푹 자니 우울함도 줄고, 모든 것이 좋아졌다. 처음엔 은근슬쩍 피하고, 없는 사람 취급하던 동료들도 조금씩 거리를 좁혔고, 그래도 핏줄이라고 딸에게 재기의 발판을 놓아주는 거라 수군거리던 사람들도 점차 잠잠해졌다.'그러던 중, 한 달 전 효원은 꿈에도 그리던 사회부로 배치를 받았다. 효원에게 사회부란 친정과도 같은 곳이었기에 남다른 애착을 가져왔었고 ABN 보도국에 입사하는 순간부터 사회부 발령을 간절히 바랐었다. 더구나 앵커가 되기 전, 5년 간 사회부 취재 기자로 다져진 몸이었기에 거뜬하게 잘 해낼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윤 국장은 이번에도 효원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명색이 5년차 사회부 기자 출신 앵커였는데 완전히 신입취급을 하며 효원을 경찰서에 짱박아 둔 것이다. 그것도 5대 강력범죄율이 가장 높다는 강남경찰서에 말이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효원은 가볍게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다. 진짜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 이라는 생각과 함께, 8년 전 그때의 그 설렘이 다시 되살아났기 때문에.'“황 기자, 오늘 강력 2반 공조 수사 나간 곳이 방화사건 현장 맞아? 이번이 벌써 네 번째면, 연쇄방화 맞지? 응? 수법도 비슷하다며?”'효원은 옆자리에서 부지런히 타이핑 중인 Y대 신방과 3년 후배, W신문 사회부 황 기자의 옆구리를 모나미 펜으로 쿡 찌르며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대답하기 난감한 듯 머리를 긁적이던 황 기자가 입맛을 다셨다.'“선배님, 아직 감이 완전히 돌아오신 건 아닌가 봐요?”'“뭐?”'순간 취재실에 전염병처럼 쿡쿡대는 웃음소리가 돌았다. 효원의 눈썹이 절로 일그러졌다. 새파랗게 어린놈들이, 감히 대 선배를 놀려? ……하긴. 서효원은 이제 ABN 입사 7개월 차니까. 그러고 보니 순간 제일 막내가 되어버렸다. '“서 선배, 강력계 사건에 침 흘리지 마시고 무기 밀매 검거 기사나 마저 쓰세요. 저녁 7시 뉴스 세 번째 꼭지라면서요. 그리고 사건 앞에 연쇄라는 단어가 붙는 순간, 대중들의 상상력이 걷잡을 수 없이 치솟는다는 거 몰라서 하시는 말씀은 아니시죠? 연쇄, 그거 앞에 붙이면 굉장히 위험해요.”'효원은 밀매단이 체포되어 경찰서에서 수사가 시작되고, 중간 수사발표가 나온 새벽 3시부터 밤을 꼬박 새가며 작성했던 조직적인 무기 밀매 검거 기사문서 창을 닫으며 새 창을 열었다. '“그건 거의 다 썼어. 방화사건 촉이 좋아. 아무래도 강력 2반 반장을 만나봐야겠어.”'“에헤이! 서 선배, 미친개한테 물리고 싶어서 작정 하셨구만.”'“미친개?”'“서 선배는 하 반장 잘 모르죠? 음, 혹자는 또라이라고도 부르고요. 이름은 하난데 별명은 서너 개라는 동요 속의 주인공입니다.”'효원은 닳아서 귀퉁이가 헤진 손바닥만 한 수첩위에 ‘하 반장 = 미친개+또라이+∝’라고 메모를 남겼다.'“그 반장이랑 인터뷰 해본 적 있어?”'“인터뷰요? 서 선배가 명품 투피스 빼 입고 뉴스 진행하시는 동안, 강남경찰서에서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고요. 에휴, 소문이 너무 느리시다. 그런 정보력으로 어떻게 사회부기자 다시 하시려고 그래요?”'자꾸만 딴 소리를 지껄이는 황 기자가 못마땅한 효원이 다시 한 번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그래서 했어? 못 했어?”'“아무도요.”'“못 했다고?”'“네.”'“단 한 사람도?”'“네에!”'당당한 황 기자의 대답에 효원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형사반장 하나 취재도 못 따내는 저런 애송이 어리바리들이 한심스러웠다. 또라이라는 하 반장은 도대체 얼마나 잘난 사람이기에 국내 주요언론 사회부 기자들이 죄다 모인 이곳에서 단 한 사람도 취재를 성공하지 못했을까? 지가 무슨 국정원 비밀요원이야?'“말도 안 돼. 왜 못 해?”'“강력 2반 근처에는 접근도 못 하게 하니까요.”'“아니, 그런다고 취재를 못 해? 이거 완전히 빠져가지고! 기자 맞냐?”'효원의 흥분지수가 올라가며 목소리가 한 톤 높아지고 얼굴이 불타는 고구마가 되자 황 기자가 목소리를 낮추라는 듯 손바닥을 바짝 펴 휘휘 저었다.'“환상적인 보도자료를 직접 써서 돌리는데 굳이 취재 더 할 필요가 있나요. 일목요연하게 핵심만 탁탁 짚고, 근질거렸던 부분 정확하게 짚어서 박박 긁어주는데.”'“그러니까, 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거구나?”'“뭐, 굳이 말하자면요. 하 반장이 비록 미친개이긴 하지만 유능하거든요. 하 반장 체제에 접어든 지난 5년간, 강력 2반은 3년 전을 기준으로 전은 냉혈인간 체제, 후는 미친개 체제로 나뉘었다고들 하죠. 냉혈인간 체제였을 땐 취재도 수월하고 현장에서 안내도 잘 해주는 대신 딱딱하고 차갑게 굴었었다는데, 미친개 체제로 전환된 이후에는 취재진 접근을 완전히 막아버리고 완벽한 보도 자료를 돌리는 대신 사람이 많이 편해졌다고 하더라고요.”'“미친개 체제라……. 차라리 수사 취재에 협조적인 게 나은 거 아닌가?” '“좋은 게 좋은 거죠. 이 경찰서에 강력 2반 사건만 있는 것도 아니고, 취재할 부서가 한두 군데도 아닌데 마다할 이유가 있나요? 그리고 이젠 무조건 발로 뛰는 것이 능사인 시대가 아닙니다, 선배님.”'효원은 안경을 벗어 입김을 한 번 후우 불고 티셔츠를 끌어 올려 안경 렌즈를 쓱쓱 닦았다. '“그런데 3년 전 그 기준이 생긴 이유는 뭔데?”'“흠흠. 듣는 귀가 많아서 저는 더 이상 말씀 드릴 수가 없습니다.”'효원은 어느새 저와 황 기자와의 대화에 귀를 쫑긋 거리고 있는 기자들을 발견하고 대화를 갈무리 한 후 노트북에 시선을 박았다. 마저 풀지 못한 궁금증에 갑갑증이 일었다. 냉혈인간이 미친개가 되어버린 결정적인 사건, 그것이 무엇일까? 황 기자에게 얼마의 알코올을 주입해야 궁금증을 풀 수 있을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효원은 책상 아래 가방에서 하얀 수건을 꺼내 목에 둘렀다. 가만히 앉아서 손가락만 놀렸을 뿐인데도 한낮의 무더위가 건물 안까지 파고들었는지 이마와 콧등에 송글 송글 땀이 삐져나와 세수라도 해야 기사가 풀릴 것 같았다.''얇은 반팔 티셔츠에 빛바랜 빈티지 청바지를 입고 목에 하얀 수건을 두른 채 화장실로 향하는 여자의 뒷모습에, 무엇에라도 홀린 듯 건희는 멍청하게 서서 눈을 떼지 못 하고 있었다. 3층에 위치한 수사과장실로 향하던 건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두 눈을 손등으로 비비적거렸다. '뭐지? 꿈에서 본 것 같은 흐릿한 듯하면서도 선명한 기억 한 자락. 저 여자의 뒷모습이 낯설지가 않았다. 어디서 봤던 걸까? '저런 행색을 하고 강남경찰서 3층을 어슬렁거리고 다니는 걸 보니 취재실의 기자일 확률이 높다. 궁금했다. 당장이라도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어졌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마음이 조급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잊고 지냈던 한 여자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리라. '건희는 조심스레 그녀가 들어간 화장실로 향했다. 아마도 세수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쏴아악 물줄기가 쏟아지는 소리와 어푸푸 소리가 들려왔다. 차마 안에까지 들어서지 못한 채 한쪽 발만 화장실 안으로 들인 건희가 힐끔거리며 화장실 안쪽의 동태를 살폈다. 그 때, 화장실을 빠져나오는 걸음소리가 들렸다. 건희는 재빠르게 벽에 등을 붙이고 섰다. '하얀 수건으로 토닥토닥 얼굴의 물기를 닦으며 나오는 여자, 그녀였다. '효원이 신고 있던 베이지색 스니커즈의 고무바닥과 대리석 바닥이 스칠 때마다 끽끽 거리는 소리를 만들어냈다. 목에 두른 수건을 두 손으로 꼭 잡은 채 취재실로 향하는 효원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건희가 왼쪽 가슴 위를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 그 차이가 비록 미약하긴 하지만 분명 평소와는 다른 반응이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달려도, 긴장감에 심장이 꽉 죄어도, 핏물을 뒤집어 쓴 피해자를 보아도 이런 식으로 심장이 두근거리진 않았다. 자그마한 깃털 하나가 혈관을 타고 심장 안에 침입해 바람이 부는 대로 떠돌며 간질이고 있는 기분, 그 간질거림에 건희는 숨조차 제대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7개월 만에 드디어 그녀가 눈앞에 나타났다. 어깨 길이의 까만 생머리는 귀 아래까지 잘려 나갔고, 온몸을 감싸고 있던 얼음 갑옷도 한 꺼풀 벗어냈다. 한결 여유로워진 표정과 생기 도는 낯빛에 건희는 안심이 되었다. 딱 죽을 것 같았던 그 날 밤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건희는 눈앞에 스쳐 지나는 그 찰나에도 효원에게서 풍겨지는 밝은 기운을 읽어냈다.'발길을 돌려 수사과장실로 가야하는데, 취재실로 들어 가버려 더 이상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도 그 곳에서 시선이 거둬지질 않았다. 건희는 걸음을 옮기면서도 시선을 떼지 못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