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금도.''“자장자장, 꽃 같은 우리…….”'“엄마, 꽃 말고 다른 걸로 해주세요.”'기관지가 약한 그녀를 닮아서인지 아들은 해마다 거르지 않고 목감기를 했다. 올해도 9월의 끝 무렵부터 아들은 어김없이 감기를 달고 골골했다. 그녀는 작년만 해도 안달복달하며 아픈 아들을 들쳐 업고 병원부터 들락거렸었다.'하지만 강하게 키우라는 둥, 아이를 너무 감싸고돈다는 둥, 병원을 제 집 드나들듯 해 뭐 좋을 것 있냐는 동네어른들의 말에 귀가 솔깃해진 그녀는 미련하게도 그 말들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도 이제 곧 열 살이니 민간요법으로 감기쯤은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으리라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배에 꿀을 넣어 끓여 먹이고, 생강즙을 달여서 먹이고 감기에 좋다는 것들은 다 해 주었지만 그녀가 바라는 차도는 없고 오히려 아이의 폐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열이 40도를 넘었다. 기겁을 한 그녀는 그길로 병원으로 뛰었다. 폐렴이었다. '무지하고 안일한 그녀의 잘못으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의 병을 키워놓았다고 생각하니 억장이 무너지고 피가 마르는 것 같았었다. 그렇게 근 한 달을 아픈 탓에 저도 지쳤던 모양이었다. 얼마 후면 열 살이 되는 아들이 더 어렸을 때도 부리지 않았던 어리광을 부쩍 부렸다. 저녁을 먹고 잠깐 텔레비전을 보던 아이가 약을 먹고 난 후에 잠투정을 했고 그녀는 바짝 마른 아이를 품에 안고 재워주고 있던 참이었다.'“어? 우리 아들은 꽃이 싫어?”'“나는 남자예요.”'이제 대답이 되었냐는 듯, 그녀의 품에서 삐죽 고개를 내미는 아들의 표정이 제법 비장하기까지 했다. 해주는 웃음이 나려는 것을 억지로 참고 사뭇, 진지한 얼굴로 아들을 내려다보았다. '“남자는 꽃이 싫어야 하는 거야?”'“그게 아니라, 여자가 꽃이라고 했단 말이에요.”'“누가 그런 말을 했는데?”'“선생님이요.”'졸음이 잔뜩 든 눈으로도 그녀가 묻는 말에 또록하게 대답을 해주는 아이가 너무나 예뻐서 해주는 가슴 한가득 태양을 담은 것만 같았다.'“선생님께서 왜 그렇게 말씀 하셨을까?”'“여자 친구들은 꽃이나 마찬가지니까 괴롭히지 말라고 했어요. 아함.”'대답 끝에 입을 크게 벌리고 하품을 한 아이가 가슴에 얼굴을 비벼댔다. 해주는 아이의 등을 토닥여주며 조용히 물었다.'“그럼 남자는 뭐라고 하셨는데?”'“나무요.”'‘나 같은 사람 말고 나무 같은 사람을 만나요. 단단한 땅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뇌가 고막에 박혀 뽑히지 않는, 단 한순간도 잊어본 적이 없었던 기억들을 끄집어냈다. 아들을 내려다보는 해주의 눈동자가 깊고 무겁게 일렁였다. 뚜렷한 아들의 이목구비가 벌써 피를 속일 수 없음을 증명하기 시작하고 있었다.'“엄마?”'“음?”'“내일 병원 안 가면 안 돼요?”'어리광스런 목소리로 물은 아이는 그녀의 대답은 듣지도 못한 채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해주는 잠이 든 아이의 등을 토닥여주며 먼 예전의 기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대입준비에 막바지였던 고등학교 3학년, 일본을 지날 것이라 예보되었던 태풍이 갑자기 진로를 바꾸어 대한민국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 태풍으로 농사와 작은 어장을 업으로 살아가던 부모님은 모든 것을 잃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위치한 집도 태풍에 의해 한순간에 무너졌다. 집은 물론 생활터전을 모두 잃은 가족들은 아버지를 따라 마을회관으로 이사 아닌 이사를 갔다.'재앙은 한꺼번에 몰아친다고 했던가, 태풍이 모든 것을 휩쓸고 간 것으로 부족해 설상가상으로 입시를 며칠 앞두고 아버지마저 망가진 어장을 수습하던 중 발이 미끄러지는 사고로 바다에 빠져 익사하셨다. '아버지는 평생을 일밖에 모르시는 분이셨다. 일하는 만큼 거둔다하시며, 대가는 항상 정직하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아버지가 틀리셨다. 대가는 없었다. 가장을 잃은 집안은 고통과 좌절만이 남았다.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을 잃은 것만으로 모자라, 태풍의 잔재를 채 치우기도 전에 믿고 의지하던 남편마저 불의의 사고로 허무하게 보내야만했던 엄마는 넋이 나가버렸다. '고모와 함께 동생을 데리고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며 그녀는 울지도 못했다. '그 상황에 대학을 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로 상경한 그녀는 딸만 셋인 고모 집에서의 더부살이를 시작했다.'서울에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시설 좋다는 한국대학병원의 총무과에서 근무하시던 고모부의 도움으로 같은 병원의 원무과에서 근무를 시작한 그녀는 매달 월급의 대부분을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느라 손발이 갈라지고 부르튼 엄마를 위해 고향으로 보냈다. '그렇게 그녀가 서울생활을 시작한 지도 어언간 3년이 흐른 겨울이었다. 직원들을 위해 병원에서 마련한 연말송년파티에 그녀는 처음으로 참석했다. '모든 것이 그저 낯설고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혼자 고생하시는 엄마를 생각하면 한 푼도 허투루 쓸 수가 없었던 그녀는 서울구경 한 번을 변변히 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딸만 셋인 집안의 가장인 고모부의 깐깐하고 엄하기 그지없는 비위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던 탓에 집과 병원을 오가며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 같은 생활을 하였었다.'그 때문에 그녀는 서울을 갓 올라왔을 때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달라진 것이라곤 단발머리였던 머리칼이 3년 동안 자라는 대로 내버려둔 탓에 어느새 허리께에 닿아있었을 뿐, 변변한 화장품은 물론 새 옷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런 그녀가 같이 방을 쓰는 사촌의 옷까지 빌리며 나름대로 갖춰 입는다고 애를 썼건만, 막상 파티장소에 들어서자마자 기가 죽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사람들의 옷차림, 음식과 서로 자연스럽게 주고받는 화려한 화술, 그 모든 것들이 그저 휘황찬란하다고밖에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 속에서 그녀는 완벽한 이방인이었다.'난생 처음으로 술을 마셨다. 누가 권했었는지, 아니면 그녀 스스로 입에 댄 것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술이라면 무조건 쓰고 독한 맛이라고 짐작했던 그녀는 의외로 혀끝에 느껴지는 달짝지근한 와인 맛에 빠져, 구석진 곳에 외톨이로 서서 홀짝홀짝, 내리 몇 잔을 마시고 취해버렸다. '섞이지 못하는 이질감, 그리고 자격지심과 긴장을 안주로 빈속에 연거푸 들이켠 와인이 위장을 비틀어댔다. 연회장으로 변신한 식당을 나와 텅 빈 복도를 걸으며 화장실을 찾아 들어간 그녀는 소리도 요란하게 속에 든 것을 다 비워내고 입을 헹군 후, 거울을 보며 깨달았다. 다시 송년회가 벌어지고 있는 식당으로 되돌아갈 수 없음을.'화장실을 나와 출입구를 찾아 걸었던 것 같다. 하지만 마치 미로 속에 빠진 것처럼 그녀가 원하는 방향으로의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비틀비틀 걷고 또 걸어도 그녀가 그토록 찾아 헤매는 출입구가 나타나지 않았다. 취한 머리와 쓰린 속을 부여잡은 그녀는 복도를 따라 끝없이 이어진 똑같이 생긴 문들 중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문을 열고 무작정 들어섰다. '모 아니면 도. 술의 힘으로 평소 그녀의 것 같지 않게 커진 간이 그렇게 결정했다. 빈 병실이거나 아니거나 둘 중 하나라고. 빈 침대가 없다면 그대로 되돌아 나오면 그만이라고. '그녀는 이미 이성이 남아있지 않았다. 손톱만한 판단력만 남아있었더라도 아무 문이나 열고 들어서는 대담함을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판단력 또한 이성이란 놈과 동무삼아 이미 줄행랑을 놓고 없었다. '창을 투과한 별빛을 따라 무턱대로 침대로 다가간 그녀는 벌러덩 쓰러지듯 누웠다. 그리고 그제야 그녀는 빈 병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별빛이라고 생각한 빛은 병실에 설치된 작은 미등의 불빛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