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누가 나갔다 와야겠는데……. 누구 손?”'거대한 몸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애교 섞인 목소리였지만 누구하나 거들떠보는 사람은 없었다. 칸막이로 나눠진 사무실에는 누구의 책상이 위일지라도 산더미 같은 서류나 도안이나 혹은 모형이나 그 밖의 잡스런 것들로 쌓여 있어서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뭔가 일감은 많구나 싶어 보일만 했다. '굳이 바깥을 내다보지 않더라도 이 날씨에 나가고 싶은 사람은 없을 만했다. 눈보라가 치거나 하는 건 아니었지만 며칠 전 쌓인 눈이 전혀 녹을 만한 날씨가 아니었고 다들 주차를 하고 사무실까지 오는 그 짧은 거리에서도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다고 느낄 만했는데 이런 날에 현장에 가야 한다니 차라리 죽은 시늉을 하는 게 나을 듯했다.'“에이……. 손! 대신 보너스로 현장에 갔다가 바로 퇴근할 수 있는 쿠폰 지급!”'잠시 마우스질이건 도안에 수정질이건 하던 손이 멎었다. 골똘히들 생각하는 거겠지. 갔다 오는 게 나을 것인가 아니면 그냥 쌓인 일을 쾌적하고 따따한 사무실에서 하는 것이 나은가. 그러나 대부분 오늘 일찍 퇴근한다고 해서 자신 앞에 쌓인 것들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죽은 척 맡은 일이나 열심히 하다가 느지막이 퇴근하는 게 더 나을 듯했다.'한참 그리던 도안이 완성되어 가는, 뚱뚱한 남자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여자의 손이 올라갔다. 그리고는 바로 붙는 소리.'“쿠폰 발행해 놓고 유효기간 지났다는 건 아니겠죠?”'“아, 용감한 우리 오드의 간판 디자이너 이지선 씨 당첨! 당근, 쿠폰의 유효기간은 오늘 단 하루입니다. 가시죠!”'“30분 후에요.”'짧은 목소리가 들리자 주위에서는 내가 가는 게 나았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스멀스멀 기어 다니는 몇몇 사람의 고뇌가 보이는 듯했다. 지선은 어차피 디자인은 끝났고 마감재는 협력업체에 일일이 전화를 해야 하는 일이어서 이미 날이 저물어 가는 터라 오늘 하기에는 그른 것이기에 눈치 보면서 사무실에 앉아 있느니 추위를 무릅쓰고 길을 나서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가야 하는 현장일도 자신하고 관련도 있었고 또 근처에 아주 유명한 부대찌개 집이 있는 것도 큰 이유였다. 오늘 같은 날 부대찌개에 소주 한 잔……. 물론 그건 집에 사가지고 가서 혼자 자작이다. 누군가와 어울려서 먹는 건 질색이니까. 날이라도 덜 춥다면 캔 맥주에 사다 재어 놓은 오징어포면 그만이지만 오늘 같은 날은 뭔가 따뜻한 걸 목구멍에 넘기고 싶었고 그렇다고 해서 만들어 먹을 만한 능력도 노력도 부족한 건 사실이니까. 대신 아침부터 상태가 안 좋던 차가 걸릴 뿐이었다.'“클라이언트가 하도 성화를 해대서 말이지…….”'친히 그 육중한 몸을 이끌고 자신의 자리까지 와서 설명질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사항은 위중하고 가기는 싫다는 증거일 것이었다. 선심 쓰고 해준다는 이 자리를 즐길 테면 즐겨야겠지.'' ' 이제 만 삼 년차가 되어 가는 건축사무소 오드의 신참이라고 하기엔 참신함이 떨어지고 고 참이라고 하기엔 보잘것없는 직원인 이지선은 1년은 아르바이트 삼아 이 년은 정식 직원 삼아 이곳에 일하고 있었다. 여자 직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단순한 건축학과의 출신으로 디자인이나 우아하게 한다는 것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때론 막노동꾼이 되어야 했고 때론 협잡꾼이 되기도 했고 밀린 대금을 받을 때는 스스로 사채업자로 전환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다사다난 다이내믹한 일이라는 게 이쪽 계통의 일이었다. 잡초처럼 철조망처럼 잘 견디는 게 스스로 대견할 정도로. 그러나 그러지 않으면 또 어쩔까, 그녀가 살아온 세월 자체도 이만큼 다이내믹한 일인 걸. 아주 예전에 집을 나가 얼굴도 모르는 엄마라는 사람과 지금은 퇴행성 알츠하이머병으로 중증 치매 병원에서 생활해 주시는 게 다행인 남들이 보면 할아버지라는 말이 어울릴 아버지, 솔직히 아버지가 중증으로 요양병원에 가주면서 오히려 지선은 자유를 얻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버지를 모시면서 새언니와 늘 고단한 삶에 찌들어 있는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오빠하고도 이제는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 때문에 자신이 거의 아버지의 치료비를 대는 것으로 일체의 관계를 정리했다고나 할까. 그러니 사는 건 늘 전쟁 같은 순간인 것이었다. 오히려 이런 날씨에 거래처를 나가는 것은 무료한 겨울날 개울 넘어 이웃에 산보나 가는 것과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회사에서 유지비를 대주는 조건으로 산 자가용까지 끌고 다닐 수 있는 거 보면 지선은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할 만했다. 지독하게 일해서 버는 돈은 나이 또래 여자들이 사무실에서 전화 받고 커피 타고 버는 돈보다는 한참이나 많았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를 다른 평범한 그 정도 소득의 여자들의 생활을 만들어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에 불만은 없었다. 그런 것들하고는 체질적으로 맞질 않으니까. ''지선은 막 끝낸 프로그램을 저장하고 컴퓨터를 껐다. 그리고는 아까 오 팀장이 열심히 설명해준 서류뭉치를 들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등받이에 걸쳐놓은 인조 퍼가 가득 달린 커다란 사파리 점퍼를 빼들었다. 그놈의 인조 퍼 때문에 늘 운전할 때 목구멍이 간질거리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감내해야만 했다. 물론 큰맘 먹고 겨울에 지른 걸 여름까지 갚느라 애쓴 천연 라쿤이 붙은 코트도 있다지만 운전하는데 코트나 재킷은 영 불편스러웠다. 오늘같이 바람이 칼로 에이는 것 같이 부는 날에는 무조건 따뜻한 것이 최고니까.'“지선 씨 조심해. 들어오는 진입로 다 얼었더라.”'박 대리가 지선이 짐을 싸들고 나가는 것을 보더니 짐짓 걱정스러운 소리로 말했다.'“아까 봤어요. 퇴근할게요. 다들 수고하세요.”'그의 호의가 무슨 뜻인지는 잘 알고 있었지만 가타부타 가뭄의 콩 날 것만 같은 감정조차 솟아나지 않는 상대에게 그다지 쓸모없는 미련 따위를 안겨 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모두 다에게 인사하는 걸로 자신의 감정을 내뱉기는 하지만 저 둔한 남자는 알아듣지 못하고 있는 건지 혹은 알아듣지 못하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 어깨에 들춰 멘 커다랗고 낡은 숄더백이 자꾸만 흘러내리는 통에 밖으로 나가는 길에 걸음을 멈춘 지선은 마치 버릇처럼 눈처럼 하얀, 그리고 얼음으로 얼어서 굳어져 버린 것 같은 문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이 회사에 들어온 지 3년이 되도록 한 번도 열리지 않은, 물론 안쪽을 못 본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 열고 들어간 적은 있으니까. 그러나 그녀가 의미하는 것은 그 방의 주인에 의해서 열린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언뜻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올 블랙 컬러의 단 한 점의 군더더기도 없이 완벽한 인테리어의 방, 직원들의 난장판 같은 사무실과는 사뭇 다른 클라이언트를 위한 접견실과 비슷한 분위기이지만 왠지 차갑고 날카로움이 더한 검은색의 방과 그 방의 눈부시게 하얀 문, 그 방의 주인이 이 기상천외한 ‘오드’라는 건축사무실의 오너이자 대표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3년 동안 얼굴 한번 들이 비추지 않는데도 그 사람의 이름을 걸고 돌아가는 건지 의심스럽기만 했다. 그러나 3년쯤 이런 상태라면 더 이상의 궁금증 따위는 필요 없는 것이었다. 단지 가방이 흘러내렸을 뿐이었다. 지선은 사파리 점퍼를 여미고 마치 전쟁터를 나가는 군인같이 스카프를 목에 잘 감은 뒤에 폴라폴리스 장갑을 꺼내 들었다. 쓸데없이 뻣뻣하고 비싸고 차갑기만 가죽장갑보다 값은 십 분지 일만큼 밖에 하지 않고 부드러워서 운전하기 편하지만 볼품은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