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번째 계절''prologue. '중환자실의 풍경은 보는 사람의 신경을 갉아먹는 그 무엇이 있다. 죽음을 예비한 침상, 부러 침울해지지 않으려는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절망만큼 다급한 가족들. 건조한 기계음이 마치 쇠 긁는 소리처럼 신경을 자극한다.'어쩌면 가장 가깝게 진정한 두려움에 직면할 수 있는 장소. 그것은 어린 시절 공포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등골 서늘한 감각이나 유원지의 기계 위에서 마치 낙엽처럼 제멋대로 뒤집어지는 육체의 연약함에서 오는 두려움과는 달랐다.'무력함. '단 한 번도 신을 믿지 않았던 사람도 신의 존재를 가장 가까이 느낄 수밖에 없다는 죽음 앞에 선 인간의 무력함, 뼛속을 에이는 듯 느껴지는 한기 그리고, 생기를 잠식하는 자책.'형준은 마치 생명이 모두 새어나간 후에도 뻣뻣하게 자리를 지켜 선 마른 고목나무처럼 서서 침상 위를 보고 있었다. 낮게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 숨 막히게 규칙적인 기계음, 저 멀리서는 울부짖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때 수개의 줄로 연결되어 있는 녹색 화면이 거칠게 울었다.'삐삐삐삐삑!'“보호자분, 잠시만요!”'뛰어온 의사와 간호사가 그의 몸을 밀어내고 LCD창을 살핀 후 혜민의 몸에 연결된 링거 줄에 주사바늘을 꽂았다. '“보호자분, 나가셔야 해요.”'간호사의 말이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다. 청각이 먹먹해지는 대신 다른 감각이 날카롭게 일어났다. 시선을 느꼈다. 중환자실 한 켠에 마련된 ICU는 유리창으로 둘러싸여 있어 밖에서도 볼 수 있는 구조, 거친 비퍼음에 시선이 모여진다. 또 누군가 죽는구나, 하는 악의 없는 한탄이 느껴진다. '“보호자분!”'간호사의 다그침에 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한 걸음 물러서 댓 명의 의사와 간호사가 달라붙어 있는 침상을 멍하니 바라보니 춥기라도 한 것처럼 어깨가 떨렸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였다. 손끝에 뜨거운 무언가가 닿은 것은.'내려다본 곳에 동그란 얼굴이 보였다. 뺨이 통통하고 귀여운 얼굴이었지만 지저분하게 군데군데 얼룩져 있었다.'그는 무언가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마치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 것처럼 목에서는 쉰 울림만이 새어나올 뿐. 애당초 할 말 따위는 없었을는지도 모른다.'“어머, 아이는 여기에 오면 안 돼요.”'놀란 표정으로 간호사가 눈을 크게 떴다. '면회시간 외에는 출입이 불가한 중환자실, 그것도 ICU다. 환자의 상태가 위중하니 보호자 한 명의 동석을 허가받았을 뿐, 아이라니. 이곳만큼 아이가 어울리지 않는 곳도 있을까.'“괜찮습니다.”'어딘가 목 쉰 듯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그러나 아이의 손을 잡은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아이는 잠자코 그에게 손을 맡긴 채 서 있었다. 아이의 키에서는 유리창 너머가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는 까치발을 하지도 문을 기웃거리지도 않았다. 그 안에서 제 어미의 생명이 꺼지려고 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어떠한 동요도 내보이지 않고 그의 곁에 서 있었다. 커다란 손 안의 작은 손은 꼼지락거리지도 않았다. '그는 곧 자신이 아이의 손을 잡고 있다는 것도 잊어버렸다.'삐삐삐삐이이이이.'기계의 비명의 속도가 비탈길처럼 가팔라졌다. 그의 심장이 그 비탈길을 구르듯 어지러웠다.'“심실세동!”'“아트로핀, 에피 100mg 투여, 제세동기 차징, 200J!”'바쁘게 돌아가는 손들, 의사들의 지시, 혜민의 얼굴은 그녀의 원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붉게 부어 있었다. '“샷!”'덜컹거리는 그녀의 몸은 마치 생명력 없는 무기질 같아 그녀 같지 않다. 그녀 같지 않다. 머릿속에서 커다란 날개를 가진 곤충이 날개 치는 것처럼 잡음이 번져갔다. 의사들의 목소리도, 차징이 되는 제세동기의 소리도, 덜컹이는 침상의 소리도 멀어져간다.'의사들이 뭔가 입을 벙긋거리고 그녀의 몸이 다시 들썩인다.'다시.'또다시.'그때, 소리가 돌아왔다.'삐이.'절망, 그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선명한 절망을 나타내는 소리. '요동치던 녹색 선이 검은 바다처럼 펼쳐졌다. '유리창 너머의 의사가 숨을 몰아쉬며 안경을 치켜 올렸다. 간호사들의 시선이 그의 얼굴을 훑었다. '“강혜민 환자 사망시각 새벽 03시 07분.”'의사 중 하나가 건조하게 사망선언을 했다. '“보호자 분?”'문을 붙잡은 간호사 하나가 멍하니 선 그를 불렀다.'“다른 가족 분에게 연락을……보호자 분?”'둔탁한 아픔과 함께 어둠이 그를 덮치기 전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눈물이 그렁그렁 묻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바라보고 있는 지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