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롤로그''''여름방학을 보내고 다시 돌아온 학교는 여전한 모습으로 성경을 지루하게 만들었다. 딱히 대단하게 흥미진진한 일탈을 꾀할 만큼 간덩이가 부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팔팔한 이팔청춘을 책상에 앉아 보내고 싶지 않았다. '대학을 목표로 하는 아이들은 점심시간도 아깝다며 책을 펴들고 앉아있었다. 인문계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성경 역시 대학입학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올해가 되면서 방향전환을 해버렸다. 딱히 하고 싶은 공부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아버지의 일이 훨씬 매력적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졸업과 동시에 본격적인 기술전수를 받기로 결심했다. '입시와 동떨어진 성경은 점식식사를 마치고 여유자작하게 절친한 짝 청미가 야심작이라며 만들어온 아이스커피를 홀짝거리며 입으로 이산화탄소를 내뿜고 있었다. 창가에 있는 그녀의 책상은 따뜻함이 넘쳐 잠을 못 잘 정도로 열이 많았다. 연실 하품이 터져 나와 입을 벌리고 의자 뒤로 목을 꺾어 몸을 늘어뜨렸다.'성경의 앞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청미와 혜정은 늘 같은 모습으로 재미없음을 외치는 친구를 쳐다보았다. 얄밉지 않을 만큼만 혜택을 받은 친구였다. 아기자기하게 예쁜 쪽은 아니지만 큰 키와 시원스럽게 조합이 된 이목구비가 보는 방향에 따라 매력적일 수 있는 외모였다. 부모가 사업을 하여 적당하게 풍족했고 성적은 잔머리가 강한지 평소 열심히 하지 않는 듯 하면서도 시험은 꽤 좋은 점수를 받았다. 입을 열지 않으면 쿨 한 표정 때문에 다가가기 힘들어 보이지만 일단 입을 열면 아줌마처럼 수다도 좋아하고 너스레도 떨 줄 아는 성경이었다. 한참동안 한 학년 위 선배인 황유협을 짝사랑하느라 공사가 다망하더니 또 다시 얼마 전부터 저렇게 무료하다고 노래를 불렀다.'“아! 심심해. 이 좋은 날씨에 교실에 쳐 박혀 칙칙한 교복이나 보고 있어야 하냐?”'“그럼 나가서 산책이나 할까? 아니면 너 좋아하는 초콜릿 사러가자.”'성경을 절절하게 애모하는 친구 청미가 눈치를 쓱 살피며 비위를 맞추었다. 청미는 조건으로 보면 가장 복 받은 공주님이면서 성경이 입만 열면 쭈뼛쭈뼛 기어 들어갔다. 의자머리에 닿은 목이 딱딱하여 성경은 몸을 일으켰다. 점점 미지근해지며 물방울을 흘리고 있는 아이스커피 잔을 들어 단숨에 원샷을 하였다. 청미에게 다 먹은 컵을 내미는 성경을 바라보다 혜정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강성경. 들었어?”'성경의 나른한 눈빛이 혜정에게 향했다. 대뜸 주어 목적어 다 빼먹고 비쭉 말하는 혜정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뭘 들어?”'“황유협선배. 10월 초에 학교 그만 두고 유학간대.”'“유학? 고등학교도 졸업 안 했는데?”'그제야 흐릿했던 성경의 시선이 혜정에게 곧게 와 박혔다. 성경은 눈썹을 모으고 진지하게 친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황유협선배 외할머니가 캐나다에 계시는데 상당히 부자래더라. 유난히 선배를 예뻐하셔서 지금 많이 편찮으시니까 임종 때까지 곁에서 함께 살고 싶다고 하셨나봐. 학교문제야 돈 많은 재력가에게 대수로운 일도 아니잖아. 아무튼 학교측에는 벌써 다 얘기가 되어서 이번 달만 나올 거라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