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모데나의 한가로운 전원을 한참 지나 하얀색 대문이 열리자 펼쳐지는 250헥타르의 와인농장의 모습은 마치 수채화 풍경을 보는 듯한 착각을 할 정도였다. 포도나무와 올리브나무 잎사귀들은 봄 햇살을 받아 반짝였으며 다갈색 말들은 머리를 숙여 풀을 뜯어먹었다.'살구색 페인트 벽면에 담쟁이 넝쿨이 쳐진 중세 고성 앞으로 고급 승용차들은 속속 멈춰 섰다. 두 번째로 도착한 승용차 안에서 검은 상복을 입고 있는 앳된 동양인 소녀가 내렸다. 소녀의 발갛게 달아오른 뺨 위로 어지러운 물 얼룩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승용차에서 일제히 내린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측은함과 궁금증으로 가득 찬 눈길을 그녀를 한 번씩 쳐다보며 지나쳤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일주일 전, 소렌토의 한 거리에서 벌어진 총격전으로 마피아 조직원 세 명이 숨지고 그곳을 지나던 일반인 두 명이 죽음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어느 한 신문기자가 일반인이 피에로 가르코였으며 또 한 명의 사망자는 피에로 가르코와 재혼한 동양인 여자라는 사실을 언론에 밝혔다. 언론은 피에로 가르코의 의붓딸인 이 동양인 소녀, 아시아에게 과할정도로 지대한 관심을 쏟고 있었다. '가르코 가문은 이탈리아의 최대 미디어재벌이자 스포츠재벌의 집안으로 현재, 총리를 맡고 있는 파울로 가르코가 그 가문의 수장이었다. 언제나 사람들의 이목을 받는 만큼 언론의 주목 또한 지대했다. 더더구나 그 기자는 피에로 가르코가 미국에서 만난 동양인 여자와 재혼을 한 피에로 가르코가 이태리로 돌아와 소렌토에서 작은 기념품 가게로 생계를 이어나갔다는 사실까지 뉴스거리로 만들었다.'아시아는 가르코 가문의 사람들이 석조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 선뜻 사람들의 뒤를 따르지 못했다. 머뭇거리고 있는 그녀의 귓가에 낯설면서도 낯익은 경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네 친아버지가 호텔에서 기다리고 계신다.]'친아버지라는 말에 흠칫 놀란 아시아는 옆에 서 있는 검은 양복을 입고 서 있는 로사노를 바라보았다. 두 달만의 만남이었다. 무자비한 독설을 퍼붓고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져버린 후, 그녀는 두 번 다시 그와 만나는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아니, 만나는 일이 없길 간절히 원했었다. 하지만 갑작스런 사고로 인해 돌아가신 새아버지와 어머니의 장례식장에 나타난 로사노의 모습에 그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장례식이 진행되는 내내 전혀 안면도 모르는 사람처럼 눈도 마주치지 않았던 그였다. 그런 그가 친아버지를 데리고 왔다는 사실에 아시아는 로사노의 속내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왜…….]'로사노는 날카롭고 매서운 눈씨로 아시아를 바라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사정없이 잘라버렸다.'[오늘 당장, 네 친아버지와 함께 이곳을 떠나.]'일순간, 아시아는 둔기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아찔했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무작정 한국으로 가라는 로사노의 말에 그녀는 그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보호자도 아닌 사람의 명령을 따라야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내가 결정해요.]'[넌 보호자가 필요해.]'[당신이 상관할 바 아니에요. 그건 제가 결정할 문제예요.]'[아직 네가 미성년자라는 사실을 자꾸 잊어버리는 모양이지? 두 달 전에도 그렇고…….]'아시아는 사정없이 그녀의 폐부를 찌르는 로사노를 표독스럽게 노려보았다.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주신 어머니와 오년이 넘도록 빈 아버지의 자리를 부족함 없이 다정스레 보살펴준 새아버지의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큰 충격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혹독하게 대하는 로사노가 인면수심의 악마처럼 느껴졌다.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나에게 한국으로 돌아가라 말라 하는 거죠?]'[돈 한 푼 없이 이곳에 머물기라도 하겠단 말인가? 아니면, 나에게 구걸이라도 하겠다는 심사인가?]'[뭐, 뭐라고요?]'[네 새아버지가 가르코 가문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발뺌하진 않겠지?]'[몰랐어요.]'[몰랐다? 설마, 네 뻔뻔스런 거짓말을 나보고 믿으라고?]'[당신이 믿든 말든 상관없어요.]'[그래, 상관없는 일이지. 그런데 네 친아버지와 함께 안 떠나겠다는 이유가 뭐야? 설마, 피에로 가르코가 남겼을지도 모를 유산이라도 바라는 건가?]'아시아는 어이없고 기가 막혀 순간 말문이 막혀 버렸다. 전혀 아니라는 말을 입을 열었으나 아무런 목소리도 그녀의 입에서는 흘러나오지 않았다.'[유산을 바란다면 그만 포기하고 조용히 이곳에서 사라져. 피에로 가르코는 미국으로 가면서 집안의 어떠한 유산도 포기했다는 사실을 몰랐나 보군.]'모욕도 이런 치욕스런 모욕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평소, 검소한 모습만을 보여주시며 집안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기에 새아버지가 이탈리아에서 유명한 집안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사고가 나고 나서야 뉴스를 통해서 새아버지가 총리의 아들이며 미디어와 스포츠재벌 집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었다. 그렇다고 해서 로사노의 말처럼 새아버지의 유산을 기대하는 마음조차 먹지 않았었다. 아니, 오히려 유산을 준다고 해도 그녀는 정중히 사양할 생각이었다. 자신은 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친딸처럼 다정하게 챙겨주고 마음써준 것만으로 충분했다.'아시아는 울지 않기 위해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세게 앙다물었다. 싸한 아픔이 눈물의 통로를 가로막았다. '[이곳에서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네 친아버지를 따라가.]'로사노는 씻을 수 없는 분노와 모욕으로 떨고 있는 아시아를 여전히 매서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아니면…… 날 협박이라도 해서 돈을 챙길 목적인가?]'[협박하면 얼마 줄려고요? 미안하지만 당신의 더러운 돈, 받을 생각 전혀 없어요. 당신과 나 사이에 있었던 일은 내 머릿속에서 깡그리 지워버릴 테니까 걱정 말아요.]'아시아의 목소리에는 분노의 불길이 잔뜩 묻어나왔다. '[지금 한 말, 문서로 작성하지 않아도 되겠지?]'[당신은 인간도 아냐! 죽어서도 절대로 당신을 용서하지 않겠어!]'아시아의 절규가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가슴에 박히기라도 한 듯 로사노는 가슴이 저려왔다. 하지만 그의 속내와 달리 로사노의 입에서는 냉랭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누가 누구에게 용서를 빌어야 하는지 모르겠군. 그리고 나는 너 따위에게 용서 받고 싶은 마음, 전혀 없어.]'아시아의 눈에서 꿋꿋이 참았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치욕과 모욕을 받으면서까지 이곳에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하늘에 계신 새아버지나 어머니도 너그러이 이해해 주실 것이다. 그녀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몸을 홱 돌아서서 활짝 열려져 있는 하얀 대문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로사노의 얼굴을 두 번 다시 보지 않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이곳에서 사라져 줄 것이다. 그가 바라는 대로 말이다!'로사노는 슬픔으로 흐려진 눈빛으로 멀리 뛰어가는 아시아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졌다. '[꼭, 그렇게까지 말을 심하게 하실 필요가 있었을까요?]'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정도로 조용히 그의 곁으로 다가온 비토리오를 힐끗 쳐다볼 뿐 그의 질문에 답해 줄 생각이 없는 듯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아직 나이도 어린데 굳이 그렇게까지…….]'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힘없이 로사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그래야 이곳을 떠날 테니까.]'비토리오는 로사노의 마음이 결코 편치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연신 로사노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다.'[제가 따라가 보겠습니다.]'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로사노의 반응에 그가 허락을 했다고 판단한 비토리오는 서둘러 아시아의 뒤를 쫓아갔다. '로사노는 새아버지와 어머니의 시신이 안치된 목관을 붙잡고 슬픔에 견디지 못하고 통곡하는 아시아의 모습이 아직까지도 그의 눈에 아른거렸다. 아직까지도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무언가 싸하게 저렸다. 그는 아시아의 모습을 애써 떨쳐내기 위해 거칠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지금 그가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자 최악의 방법이었다. 어두운 진실을 알기에는 아직 나이가 너무 어렸다. 아니, 나중에 시간이 지나더라도 더러운 진실 따윈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그녀가 추악한 세상을 모르고 살아가길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로사노는 비토리오의 모습도 더 이상 보이지 않자 천천히 발길을 돌려 집안으로 향해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