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짝 웃고 있는 남녀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세현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해갔다. 사진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이 주어지더니, 손 안에서 심하게 구겨져 버렸다. 분노의 폭발을 막기 위해 힘들게 버티는가 싶더니 책상위에 놓여 있던 물건들이 이리저리 휘날리기 시작했다. 그런 세현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는 덩치 역시 얼굴에 핏기가 없기는 매한가지였다.'“사장님.”'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붉게 달아오른 얼굴빛은 좀처럼 제 색깔을 찾지 못했다. 숨소리마저 가빠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알아봐.”'“아무래도 아가씨 말씀을 들어보시는 게…….”'“소문은 혀의 온기와 침에 의해 녹는 솜사탕처럼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가능한 소문은 믿지 않아. 하지만 내 눈앞에서 보인 것은 난 확실하게 믿는 편이거든.”'감정조차 실려 있지 않은 세현의 말에 덩치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오후에 아가씨가 별장에 내려오기로 했는데, 어떻게 할까요?”'세현이 생각에 잠겨 있던 시간은 잠시였다. 주변의 모든 것이 얼어버릴 정도로 시린 미소를 지으며 그는 덩치에게 말했다.'“별장은 나 외에는 아무도 들이지 마.”'그의 명령은 그 외에는 아무도 들일 수 없단 뜻이었다. 잠시 뭔가를 말하려고 했던 덩치는 밖으로 나갔다. 한번 내려진 결정에 번복은 없었다. 별장으로 향하는 내내 무거운 마음을 억누르려 애썼지만 결코 쉽지 않았다. 아침까지 하늘과 땅이 푸른색으로 물들었던 것과 달리, 오후가 되면서부터 점점 먹구름을 더해갔다. 갑자기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인터폰의 액정을 통해 환하게 웃고 있는 천사 같은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흥분에 들떠 팔딱거리는 모습이 어린아이처럼 보일정도였다. 계속해서 눌렀지만, 안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의아한 듯 바라보았다. 우산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듯 한눈에 보아도 몹시 젖어 있었다. 인기척을 숨기던 덩치는 왠지 비겁한 생각이 들어 인터폰을 집었다.'- 어? 있었어요. 빨리 문 좀 열어줘요. 비가 갑자기 쏟아지는 바람에 흠뻑 젖었거든요.'“죄송합니다.”'그녀가 자신의 말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잠시 후 질문을 해왔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사장님이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내가 아무나에 속하나요?'“네.”'먼 거리였지만 덩치는 그녀가 심하게 동요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지금 왜 이런 대접을 받고 있는지 설명을 해줘야 했다. 호흡을 가다듬은 덩치는 망설임을 멈추고 말을 했다.'“사장님을 배신하셨더군요.”'- 그, 그게 무슨 말이죠?'“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아실 겁니다. 돌아가십시오. 오늘 두 분의 파티는 없습니다.”'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보며 속시원하게 설명하고 싶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몫이 아니었다. '- 난 한번도 그를 배신한 적이 없어요.'희미한 목소리였지만 분명하게 들렸다. 그녀를 잠깐 지켜보던 덩치는 망설임 없이 인터폰을 내려놓았다. 그러나 그가 조금도 더 생각이 깊었다면, 아니, 그녀가 떠나는 것을 보기라도 했다면, 사고가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미처 피할 틈도 없이 빠아앙, 하는 기다란 경적음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몸이 뒤로 넘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분명히 뭔가 몸에 와 닿았는데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10초, 아니 그보다 더 짧았을지도 몰랐다. 몸을 틀자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통증에 자신도 모르게 커다랗게 비명을 질렀다고 생각했지만 그 소리는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숨결이 천천히 잦아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유빈은 자신의 생명이 경각에 다다랐음을 느낄 수 있었다. 죽는 게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이토록 쉬운 일인지 몰랐다. 호흡을 가다듬으려 애쓰며 본능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지만 아무 감각이 없었다. 그냥 눈동자가 자연적으로 움직이며 손 안에 잡힌 하얀 드레스가 망막 안으로 들어왔다. 눈처럼 하얀 웨딩드레스에 젖어오는 붉은 색깔, 너무도 붉어 처음에는 그게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손가락을 움직이기 위해 몸을 뒤척였지만 몸이 통나무에 묶인 거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이미 핏빛으로 물 들은 순백색의 드레스는 흔적조차 없었다. 붉디붉은 물감이 인간의 몸에서 나온 피로 아주 곱게 물이 든 상태였다. '“네가 이렇게 된 건 모두 강세현 때문이니 원망을 하고 싶거든 하늘에서 그를 원망하라고.”'남자는 그녀가 자신의 말을 듣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며 빈정거림을 담아 창문을 열고 말했다. 조금씩 눈꺼풀이 감기더니 몸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의식을 잃을 것을 확인한 순간, 12톤 트럭에서 검정 비옷을 입은 남자가 내려섰다. 쓰러진 여자의 몸을 발로 툭 차더니 의식이 없는 것을 확인하곤 차에 다시 올랐다. 주변을 둘러본다거나 그런 일체의 행동도 없었다. 단지 입가가 싸늘하게 치켜 올라간 것 외에는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천천히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남자는 차를 후진시켰다. 얼마나 그렇게 달려 나왔을까? 그제야 남자는 입고 있던 비옷의 모자를 벗었다. 지나가는 차의 헤드라이트가 얼굴을 비치자 무표정한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턱 밑을 가로질러 목 부분까지 깊게 패인 상처는 평범한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입가에 머물러 있는 미소조차 사람의 오금을 떨리게 할 정도로 소름끼쳤다. 지친 듯 고속도로의 갓길에 차를 세우더니 차 안 깊숙이 숨겨놓은 담배를 꺼내들었다. 달칵 불빛이 얼굴을 잠시 비추는가 싶더니 비가 오는 것도 개의치 않고 창문을 열더니, 깊숙이 들이마신 담배연기를 앞 유리창으로 길게 내뿜었다. 조금 전 사고를 일으킨 사람의 표정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시계가 저녁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사고가 일어난 지 정확히 두 시간이 지나 있었다. 천천히 창문을 닫고 남자는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다. 단축 버튼을 길게 누르고 귀에 수화기를 가져가자 채 두 번이 울리지 않았는데 상대방이 급하게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되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