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 시간으로 정확히 광염의 달 24번째 날. 이 날, 마계에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마황 팬클럽 <유사모>가 탄생했다. 837대 마황 유르미아 헤세이드를 대상으로 한 이 유사모는 일명 ‘유르미아 님을 사모하는 마족들의 모임’의 줄임말로, 마황전대의 32명 여마족들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다. '마황 유르미아를 경애하는 마족이라면 누구든지 가입할 수 있으며, 가입과 동시에 마황의 일거수일투족을 실시간으로 전해들을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유사모의 발진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불과 하루 만에 수천 명의 마족들이 몰려들어 가입을 희망할 정도였으니, 전례 없는 여마황이 마계에 어떤 파란을 일으키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정도이리라. '어쨌거나 유사모가 창설된 지 사흘째, 마황전대의 여마족들은 날이 갈수록 늘어가는 회원 명부를 보며 희희낙락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당사자인 유르미아는 어딘지 모르게 우울한 표정이었다. 아니, 실상은 무언가를 생각하며 멍해져 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리라.'바로 몇 시간 전 디아가르트가 결재를 부탁하며 가져온 서류가 수백 장이 넘건만, 정작 유르미아는 그 중 단 한 건도 처리하지 못한 채 앉아만 있었다. 인장을 움켜쥔 그녀의 손은 의미 없이 허공 위를 휘젓고 있었다. 텅 비어버린 흑요석빛 눈에 비쳐진 것. 그것은 짙은 홍염의 눈동자를 일그러뜨리던 한 여자의 얼굴이었다.''－제가 그랬지요. 제가 감히 그러한 일들을 했답니다.''로위나와 아르카스의 반려의 서약식이 끝난 다음 날, 유르미아는 남몰래 마족들을 보내어 그 여자, 크리샤를 잡아오게 했다. 이미 크리샤가 마황전대 여자들을 이용하여 각종 정보들을 유출시킨 증거는 확보해둔 터. 라드라 헤네카 때에는 다커쑤 에프를 빼내어 장로들에게 전달한 것하며, 로위나와 아르카스의 일을 투마들에게 퍼뜨린 것하며……. 이번에는 발뺌하려 해도 빠져나갈 구멍은 없을 거라 자신했다. '유르미아는 끌려온 크리샤를 내려다보며 입매를 굳혔었다. 두 번 다시는 이런 짓을 하는 자가 없도록 단단히 처벌하리라. 그러나 그것도 잠시, 예상을 뒤엎고 저가 그랬다며 서슴없이 말하는 크리샤 앞에서 그녀는 할 말을 잃어야만 했었다.''－자신이 한 일을 인정하겠다는 건가? '－인정하고 안 하고 할 것도 없답니다. 존귀하신 마황이시여, 제가 그리하였습니다. ''자신이 한 일을 부정하지 않는 여인의 얼굴은 지독히도 당당했다. ''－처벌해주십시오. 감히 마황 폐하의 뜻을 어기고 함부로 나댄 죄, 기꺼이 받겠습니다.'－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짓을 하는 거지? '－전 굳이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만.'－네가 미워하는 건 대체 누구지? 왜, 디아가르트를 그토록 미워하는 거야?''황녀였던 유르미아가 마족들로부터 인정받고 있지 못했을 때, 그녀에게 디아가르트가 알려지지 않은 황족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었던 것은 다름 아닌 크리샤였다. 게다가 아르카스는 디아가르트의 최직속 수하였고, 그가 처벌받는다면 디아가르트 또한 곤란해질 것은 당연한 터. 라드라 헤네카나 다른 일들에 대해서는 디아가르트와의 연결점을 찾을 수 없었지만 서열 2위인 그가 유르미아의 최직속 수하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 모든 것들이 설명될 수 있다. 저 크리샤는 다름 아닌 디아가르트를 노리고 이 모든 일들을 벌였다는 것……! '잠시 크리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타오르는 듯한 홍염의 눈동자가 더더욱 짙어지면서 살의 같은 것이 번득였던 것은 착각이었을까. ''－마황 폐하께서는 정말이지 너무나도 쉽게 그분의 이름을 부르시는군요. 그분의 반려였던 제 언니도 감히 부르지 못했던 이름인데…… 마황 폐하께는 너무나도 쉬운 일이로군요.''반려……? 순간적으로 유르미아의 음성이 떨렸다.''－그게 대체 무슨 소리지?'－라이샤 리카르도. 그녀는 제 언니이자, 서열 2위의 대공작이신 그분의 전(前) 반려였답니다. 지금은 죽어버렸기에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지만 말입니다.''반려, 디아가르트의 반려라고? 유르미아는 머릿속이 아찔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지금…… 그 말은 도저히 말이 안 된다는 거, 알고 있어 크리샤? 네 언니가 그의 반려였던 것과 네가 디아가르트를 미워하는 게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야? 따지고 보면 네 언니가 사랑했던 자이고, 사적으로는 친족이 되지 않던가? 그런데, 대체…….'－상관이 있답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말씀드릴까요, 마황 폐하? 전대 마황 폐하와 서열 3위의 대공작님께서 철저히 입막음했던 그 일을, 말씀드릴까요? ''마황의 말을 잘라내며 흘러나온 음성은 지독한 한기로 가득 차 있었다. 유르미아는 순간적으로 몸을 떨었다. 미친 듯이 두근거리는 심장의 움직임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제 언니는…… 그분의 반려였던 라이샤는 다름 아닌 그분의 손에 죽었답니다. 그녀가 그토록 사랑한 반려의 손에 의해! 전…… 똑똑히 보았답니다. 그분의 칼이 언니의 몸을 꿰뚫던 그 순간을, 아주 생생히 보았답니다.'－……!'－그때 언니의 몸에는 그분의 아이가 있었답니다. 제 언니 뱃속에, 죽은 언니 뱃속에! ''며칠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기만 한 그때의 기억. 유르미아는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 지독한 증오, 차디찬 한기. 그녀가 차마 중벌을 내리지 못하고 근소한 처벌만 내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 차디찬 증오에 질식해버릴 것만 같아서, 심장이 얼어붙어 버릴 것만 같아서……. ''－크큭, 정말이지 그분과 똑같으시군요. 그분도 차마 제게 벌을 내리시진 못하셨죠. 하, 제 언니는 그리도 쉽게 죽이셨던 그분이, 왜 그분을 그토록 방해하며 괴롭히려 든 저는 내버려두신 건지……! 그리고, 왜 마황 폐하께서는 지금 절 이토록 관대히 봐주고 계신 건지 정말 궁금하군요. 두 분 다, 너무 똑같군요! ''한기 어린 웃음소리가 귓가를 스치는 듯한 느낌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왜 그러세요, 마황 폐하? 무슨 일이라도 있으세요?]'[아, 아니야. 괜찮아, 로위나.]'유르미아는 걱정스레 그녀를 쳐다보는 로위나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그녀의 표정은 다시 굳어졌다. 결국 보다 못한 제르티온이 그녀에게 물었다.'[고민이 있으신 거지요, 유르미아 님? 대체 무엇입니까?]'[고민 같은 건 없어.]'[고민하시는 얼굴인데요, 유르미아 님. 속 시원하게 말해보세요. 저희가 감히 마황 폐하께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이래봬도 살아온 날은 좀 많잖습니까.]'유르미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디아가르트에게…… 반려가 있었다면서? 이름이 라이샤라고 하던데.]'[……!]'한순간, 제르티온과 로위나의 어깨가 움찔했다. '[우연히 들었는데, 라이샤의 죽음에 안 좋은 일이 있었다면서. 그게 사실이야?]'[그, 그랬지요. 그 일은 전대 마황 폐하의 명령으로 그 누구도 감히 입에 올리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