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아, 하아, 거짓말이야. 아무 말도 없이…… 하아…… 그럴 리가 없어.”' 자꾸 눈물이 솟구쳐 올라 시야가 부옇게 부풀어 올랐다. 미소는 손등으로 눈가를 대충 훔쳐내곤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하아, 하아…….”' 완만하다 해도 오르막길을 뛰어 올라간다는 것은 역시 힘에 부쳤다. 다리는 이미 풀려버렸고 바닷바람은 폐를 갈가리 찢어놓을 것처럼 차고 매서웠다. 미소는 찬 공기에 얼얼해지다 못해 뒤틀리듯 아파오는 명치끝을 움켜쥐면서도 발을 떼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아래서 올려다보면 금방 닿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언덕 위까지는 생각보다 멀었다. 이렇게 조바심이 나는 날엔 더욱 그랬다. 을씨년스럽게 비어있는 논 위를 휘몰아쳐 불던 바람이 미소의 가슴을 밀어냈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와 달리 몸은 자꾸만 뒤로 쳐지니 낭패감과 함께 짜증이 일었다. 미소는 잠시 호흡을 고르며 눈물이 그렁한 눈을 들어 그림처럼 서 있는 별장을 원망스레 바라보았다. ' 그렇게 뛰고 걷길 이십 여분, 미소는 고급스런 검은색의 대문이 보이자 속력을 서서히 줄였다. 그 아이가 사는 집 대문 앞에는 낯선 남녀가 서 있었고, 팔짱을 낀 여자는 소곤거리듯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 “에휴, 사람이 죽어나간 집인데 팔리려나 몰라?”' “그러게. 소문엔 큰 수술 받고 요양차 내려왔다던데…… 완치된 게 아니었나봐. 쯧쯧!”' “누가 아니래요? 여기 마나님이 삼선 국회의원이었던 은주석 의원 무남독녀 외동딸이었잖아. 대대로 만석꾼 집안이었고, 턱짓 하나로 이 부안 일대를 휘어잡던 인물이었는데 대 끊기고 집안 망하고 사람 죽어나가고……. 인생사 참 허무하다 허무해.” ' 여자의 말에 남자는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을 뻗어 대문이 잘 잠겼는지 확인했고 그 사이 여자가 먼저 뒤돌아섰다. 여자는 자신들 뒤에 새파래진 얼굴로 서 있는 미소를 발견하곤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 “어머나, 넌 누구니?”' 대화를 듣고 있던 불청객이 여자아이란 사실에 안도했는지 경계하던 표정이 금세 풀어졌다.' “저, 전 미소라고 하는데요. 여기 제 친구가…….”' “친구?”' 여자가 짙은 보라색 화장을 한 눈을 치뜨며 묻자 미소는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 “여기가 제 친구가 살던 집이에요.”' “아! 그래? 여기 살던 사람들 이사 갔는데?”' “아, 알아요. 그런데 혹시 어디로 갔는지 아세요?”' “글쎄다. 서울이란 것만 알지. 자세한 건 나도 잘 모르겠는데?”' 여자는 이제 미소에게 흥미를 잃었는지 남자의 팔을 잡아당기며 언덕을 내려가려했고, 미소는 다시 한 번 여자를 붙잡았다.' “그, 그런데요. 사람이 죽었다니 무슨 소리에요?”' “뭐?”' 화들짝 놀라던 여자는 이내 정색을 했다. ' “누가 그래? 헛소문이야.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마. 집 안 팔리니까.” ' 눈을 부라리는 여자의 서슬에 미소는 어깨를 움츠리더니 다시 용기를 내어 물었다.' “아까 그러셨잖아요. 사람이 죽어나갔다고……. 정말 아니에요? 정말 아니죠?”' “아니라니깐!”' 팔을 붙들고 늘어지는 미소가 귀찮은지 여자는 꽥 소리를 지르더니 남자를 재촉해 언덕을 내려가 버렸다. 미소는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지자 벨을 눌러보고 대문도 몇 번이고 흔들어 보았다. 철컹거리는 소리만이 들릴 뿐 닫힌 대문은 굳건했다. 미소의 눈에 방울방울 눈물이 맺히더니 이내 후두둑 떨어졌다. ' ‘아! 정말 가버렸구나.’' 서러움에 깡마른 소녀의 어깨가 들썩였다. 단 한 번도 그 아이와 떨어져 지내는 것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이대로 같은 중학교, 고등학교를 가고 어른이 되어서도 영원히 함께할 줄 알았다. 13살 소녀의 가슴이 핑크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는데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다. 미소는 다리의 힘이 일시에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땅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흐느낌은 어느새 울음으로 변해 버렸고, 그저 아이처럼 소리 내어 우는 게 어린 미소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 ' 미소는 감았던 눈을 떴다. 그 아이를 떠올릴 때면 마지막은 늘 이랬다. 이젠 괜찮다 못해 아무렇지 않을 때도 됐는데……. 마치 어제의 일처럼 그때의 감정이 생생하게 되살아나 가슴이 먹먹해지고 만다. 미소는 심호흡을 하듯 한숨을 내뱉더니 턱을 괴던 손을 책상 위로 떨어뜨렸다. ' 이따금 그 아이가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 아이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을지가 더 궁금했다. 그녀가 그 아이를 잊지 않고 늘 기억해 내는 것처럼 그 아이도 자신을 한 번씩 떠올려 줬으면 하는 마음 말이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만약 기억했다면 편지나 전화 그 어떤 통신수단으로도 연락을 했을 테니 말이다.' ‘그 녀석, 지금은 배불뚝이 아저씨 같을 거야. 이미 머리가 벗겨지고 있을지도 모르지.’' 미소는 일부러 심술궂은 표정을 지으며 악담을 하다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렸을 적 모습 그대로 어른이 되어 주었길 바라는 마음이 더 간절했다. 그렇다면 혹시 길에서 마주쳤을 때 ‘어? 너 혹시?’라고 알은 척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실낱같은 희망을 품어볼 수도 있고……. ' “정말 길에서 마주치면 알아볼 수 있을까?”' 미소는 연필을 입에 물었다. 미간을 찡그리며 그 아이의 얼굴을 더듬는데 온 신경을 쏟았지만 예뻤다는 기억만 있을 뿐 명확한 실체가 그려지지 않았다. 불투명 유리창 너머에 있는 존재처럼 희미한 실루엣만이 있는……. ' 미소는 그대로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책상 위에 납작 엎드렸다. 하긴 십오 년이나 지났으니 얼굴을 기억해 내는 게 오히려 용한 일일지도 몰랐다. ' 생각에 골몰할 때면 연필을 이 사이에 끼워 물고 그 끝을 잘근잘근 씹어대는 습관 탓에 입안은 어느새 나무냄새가 배어버렸다. 또 연필을 입에 물고 있었단 사실을 깨달은 미소는 꽁지가 다 망가진 연필을 던져놓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 전시회 주제를 첫사랑으로 잡아서인지 미소는 며칠째 그 아이 생각을 하는 중이다. 드로잉은 시작도 못했고 준비해 둔 흙은 언제 반죽을 시작할지 기약이 없었다. 미소는 작업실 선풍기를 끈 뒤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 하나를 꺼내들고 마당으로 나왔다. ' 습기를 잔뜩 머금은 후텁지근한 열기가 얼굴로 훅 끼쳐오니 숨이 막힐 것만 같다. 담장을 타고 피어오른 주홍빛의 능소화가 한여름 태양 아래서도 고아하게 맞서고 있었다. 구름을 뚫고 나온 햇살에 미소는 잠시 눈썹을 찡그리다 그늘 진 화단 옆 그네에 앉았다. 천천히 몸을 움직이자 오래된 나무 그네는 삐거덕 소리를 내며 무디게 움직였고, 미소는 그 느긋한 흔들림에 몸을 맡기며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