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무진 씨, 정말 대단하다.”'카페 영업이 끝난 후, 나래는 카운터에 엎드려 통통 주먹으로 테이블을 두드리고 있었다. 경쾌한 리듬으로 계산기를 튕기던 무진의 손가락이 멈췄다.'“감탄은 좀 있다 해줄래? 계산 헷갈린다. 있다 놀아줄게.”'“웃음으로 넘기려 하지 마! 어쩜 그렇게 나를 꿔다 놓은 보릿자루 취급할 수 있어?”'무진이 짐짓 심각한 얼굴로 “넌 자루라고 하기엔 너무 말랐다.”는 말이나 지껄인다. 나래는 분을 못 참아 테이블을 두드리는 손에 조금 더 힘을 가했다. 퉁퉁.'“내가 무슨 KFC 할아버지야? 나 오늘 한 일이 뭔 줄 알아? 서 있기, 앉아 있기, 밥 먹기, 원무진하고 놀아주기!”'“야아, 서나래. 네가 오늘 나보다 더 바빴구나.”'여전히 진지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손바닥을 마주친 뒤 그는 무심한 얼굴로 계산기를 향해 시선을 떨어트렸다. 이익, 저 아저씨!'어차피 바리스타 업무는 별로 도울 수 없으니까 청소라도 하려고 했더니 바닥이 미끄러워서 안 된단다. 사용한 컵을 세척하려고 했지만 무진이 낚아채며 너보단 내가 빠르단다. 그래서 멍하니 앉아 있다가 꼬박꼬박 졸고 있는데 그게 또 병든 고양이처럼 귀엽다고 이마에 뽀뽀를 한다. 병든 고양이는 귀여운 게 아니라 슬픈 거라고……. 하여튼, 아주 미치겠다. 오늘 서나래는 22년산 거대 짐짝이었다. '“괜찮아. 너도 봤겠지만 오늘은 꽤 한가한 날이었고, 너 이거저거 손대면 내가 불안해서 안 된다. 내일은 지호 녀석 멱살이라도 잡아 끌어놓을 테니까.”'무시무시한 말을 내뱉으면서도 눈은 영수증과 계산기 사이를 바쁘게 오간다. 나래는 그 무신경함에 그만 울컥해져서 쏘아붙였다.'“그럴 거면 날 왜 불렀는데?”'무진이 이상한 말이라도 들은 얼굴을 했다.'“당연히, 너랑 같이 있고 싶으니까지.”'……언제부터 그렇게 노골적인 인간이 된 거냐, 원무진! 이 매력 넘치는 남자 같으니라고. 나래는 열이 홧홧하게 오르는 얼굴을 감싸며 일부러 토라진 말투를 꾸며냈다.'“……나 바닐라 아이스크리임.”'무진의 집에서 3분 거리에 있는 편의점에 들어서자마자 나래는 아이스크림 코너로 종종걸음을 쳤다. 좀 전에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르던 수줍은 여자는 어디에 갔는지. 우헤헤헤, 라는 괴상한 웃음소리는 필시 환청일 테다. 그걸 사실이라 인정하는 순간 백년의 애정도 식어버릴 테니. 무진은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그녀가 아이스크림 진열장 앞에 서 있는 걸 확인하고 그는 스낵 코너로 방향을 잡았다. 나래가 사랑하는 새우 과자, 나래가 좋아하는 카푸치노 초콜릿, 나래가 즐겨 먹는 감자칩을 팍팍 주워 담고 보니, 그 옆에는 나래가 종종 가방에 넣고 다니는 복숭아향 캐러멜이 있다. 다섯 개를 집어 들어 얹는데 툭, 한 개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이기 전에 불쑥 손이 다가와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나래는 몸을 일으키면서 발목부터 과자를 끌어안은 품까지 찬찬히 시선을 끌어올렸다. 의아한 얼굴이다.'“오빠, 그거 다 먹게? 밥 좀 전에 먹었잖아.”'분명히 그들은 조금 전에 카페를 나오면서 저녁을 만들어 먹고 나왔다. 무진 역시 그녀와 똑같은 표정으로 내려다본다.'“난 과자 안 먹는다. 너 먹으라고.”'“내가 든 아이스크림 통 안 보여? 언제는 저녁밥 먹고 아이스크림까지 먹을 수 있으니 참 복 받은 소화력이라고 한껏 비꼰 사람이. 나 지금도 기억하는데. ‘혹시 밤새 소화 못 시켜서 살찌면 그나마 얼굴 보고 따라온 남자들이 도망가니까 조심하라.’면서 열량까지 읊어줬잖아.”'되도 않는 그의 흉내까지 내면서 삐죽거리는 입술을 무진이 엄지손가락으로 꾹 눌렀다.'“언제는 젊은이는 아저씨랑 달라서 신진대사가 잘 되신다면서요. 뭐, 오늘 다 못 먹으면 내일 와서 먹으면 되지.”'계산대로 향하면서 심상하게 하는 말에 나래가 흐응, 하고 콧소리를 울렸다.'“먹을 거로 유혹하는 거에 내가 넘어갈 줄 알고?”'투덜거리는 말에 문득 걸음을 멈춘 무진이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그럼, 과연 뭐로 서나래를 유혹할 수 있을지 생각해봐야겠군.”'투둑. 그녀의 손에서 아이스크림 통과 캐러멜이 곤두박질쳤다. 무진은 시익 악마의 미소를 흘리더니 그녀가 떨어뜨린 것을 집어 들었다. 계산대를 향하는 등을 노려보면서 그녀는 토마토처럼 익은 얼굴을 손을 들어 가렸다. 느닷없이 그녀의 코에 자신의 코를 박치기하면서 그런 얼굴로 웃지 않았으면 좋겠다. 심장이 배꼽 부근까지 추락했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려면 힘이 드니까.'무진의 집에 들어서면서 나래는 듣는 이도 없는데 “실례합니다아.” 하고 소리 내어 말했다. 소호에 들어설 때 꼭 “다녀왔습니다.”라고 말하듯이. 그리고 온통 흰색과 검정으로 이루어진 그의 집을 둘러보았다. 엄밀히 말하면 검정이라기보다는 월넛보다 조금 더 진한 초콜릿 색상이지만, 그녀는 처음 그의 집을 봤을 때 “이렇게 컴컴할 수가!”라는 감탄사를 들려주었다. 거실에는 소파에 앉아 다리를 올리기 좋을 정도로 낮은 대리석 문양의 둥근 테이블 두 개를 붙여놓았고 엷은 크림색 소파가 놓인 맞은편에는 TV가 걸려 있다.'“나 이거 보려다가 못 본 거 어떻게 알았어?”'나래가 TV 앞으로 가더니 DVD 케이스를 집어 들며 물었다. 그 순수하게 기대감에 찬 얼굴을 보면서 무진이 쓴웃음을 지었다.'“지난번에 말 했거든?”'“오빠 기억력 되게 좋구나. 오빠는 극장가는 거 별로 안 좋아하니까 그런 얘긴 잘 안 했던 것 같은데.”'그는 번잡스럽거나 사람이 많은 장소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주제에 카페를 운영한다며 상욱은 기절초풍을 했지만. 어쨌거나 그가 멀티플렉스 같은 장소를 싫어하면서도 그녀가 요청하면 거절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나래는 언제부턴가 그에게 ‘영화 보러 가고 싶다.’는 의미의 말은 하지 않게 되었다.'무진은 헤실헤실 웃으며 DVD 플레이어를 작동하는 옆얼굴을 지켜보았다. 그저 그런 멜로 영화. 그는 영화는 꽤 즐기지만 그중 멜로 영화는 질색이다. 이래도 안 울래, 라는 설정에 스토리, 배우는 눈물바다를 연기하며 관객에게도 같은 감성을 강요한다. 그를 위해 참아줘야만 하는 억지스러움까지, 그에게는 여자들이 배부르다를 남발하면서 디저트는 케이크를 먹겠다는 심리만큼이나 이해가 가지 않는다.'그래도 이걸 구입해 모셔둔 이유는 오로지 서나래 때문이다. 저 얄팍한 DVD는 이를테면, 서나래라는 꼬맹이를 그의 서식지로 끌어들일 구실이자 미끼인 셈이다. 본인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내 집에서 볼래?”라는 제안을 던지자마자 반색을 하며 덥석 물어 그의 고민을 무색케 했지만.'“시작한다, 시작한다.”는 괴의한 가락의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그녀는 무진이 담아준 아이스크림을 보지도 않고 받아들었다. 시선은 올곧게 TV 화면에 붙어 떨어질 줄을 모른다. 무진은 옆에 앉아 멍하니 2분쯤 화면 안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봤지만 집중도 안 되고 벌써 재미없다.'“서나래.”'“으응?”'옻칠한 나무 스푼이 사탕도 아닌데 우물거리다 그제야 생각난 양 아이스크림을 뜨면서 대꾸한다.'“재미있냐.”'“시작한 지 인제 5분이거든요?”'“아이스크림 더 줄까?”'“아직 2스푼밖에 안 먹었잖아.”'“더우면 에어컨 온도를 좀 낮출까?”'“원무진 씨.”'드디어 그녀의 관심이 그에게 돌아왔다. 그런데 표정이 좋지 않다.'“나 지금 영화 보잖아. 좀 있다 얘기하면 안 될까?”'그 얼굴이 정말 진심으로 짜증을 담은 눈빛이라 그는 혹시나, 하고 의심쩍은 어조를 했다.'“너 정말 영화 보러 온 거냐?”'그의 말이 되레 의외인지 눈이 둥그레지면서 깜빡인다.'“영화 보라고 해서 영화 보는데 뭔 소리야?”'역시나. 무진은 부루퉁한 얼굴로 손을 휘저었다.'“그래 봐라, 봐. 보고 붕어로 변신할 때까지 펑펑 울어라.”'“왜 그래? 애처럼.”'애는 너다, 이 꼬맹이야.'무진은 터지려는 한숨과 욕설을 움찔거리는 입술 안으로 꾹 밀어 넣었다. 저 서나래가 이성의 유혹을 감지할 만큼 영악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남자든 여자든 ‘오늘 우리 집 비었는데.’ 라는 의미의 말을 내뱉는 뜻이야 뻔하지 않은가. 사실 그로서도 딱히 ‘오늘 하자.’란 뉘앙스로 말을 꺼낸 건 아니었지만 기대감이 영 없었다고는 말 못한다. 무엇보다도 의미야 어떠했든 간에 그를 이성으로 의식조차 안 하는 기색에 자존심이 상했다. 이래서야 저 망할 DVD를 구비해놓지 않았으면 왜 거짓말했냐며 얻어맞을 뻔했다. 비극적이게도 나래는 보기보다 힘이 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