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후 이 비행기는 두바이 국제공항에 도착하겠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모두 자리에 앉으셔서 좌석벨트를 착용하여 주십시오.]'승무원의 기내 방송에 무거웠던 눈꺼풀이 번쩍 뜨였다. 요란한 엔진 소리 때문에 기내에서 잠을 잘 못 이루는 현정이었지만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다. 도착지가 가까워졌음을 스피커로부터 들려온 승무원의 안내 방송을 통해 알게 되는 경우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장거리 비행이 아니었는데도 온몸이 쑤시는 듯 노곤했다. '“감기몸살인가. 컨디션이 좋질 않네.”'생각해 보면 이번 여행을 시작한 지도 벌써 5개월째였다. 다행히도 그동안 크게 아픈 적이 없었는데 이제야 그동안의 누적된 피로가 나타나는 모양이었다. '“내리면 감기약이라도 좀 챙겨 먹어야 하겠는걸.”'비행기는 서서히 고도를 낮추며 하강하기 시작했다. 고도를 조금씩 낮출 때마다 기체가 들썩거렸다. 이코노미석의 좁은 자리와 시끄러운 엔진 소리를 제외하고는 비행기 타는 걸 무척 좋아하는 현정이었지만 기체가 흔들릴 때마다 머리가 어지럽고 구토 증상이 나타나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빨리 내리고 싶다는 마음밖에 들지 않았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도시를 화려하게 수놓고 있는 불빛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마치 밤하늘의 별들이 떨어져 콕콕 박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드디어 두바이에 도착했구나 하는 설렘이 밀려오며 괜한 흐뭇함에 현정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러나 또다시 밀려오는 두통과 구토 때문에 그녀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아…….”'현정은 원래 낮에 도착하기를 원했지만 두바이라는 곳이 워낙 뜨거운 곳이라 비행기조차 해가 진 저녁 이후부터 이른 새벽 사이에 이착륙을 하기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게다가 이스탄불 공항에서 예정보다 한 시간이 연착되는 바람에 진짜로 한밤중이 되어서야 도착한 것이다.'‘자말에게 호텔 예약을 부탁하길 정말 잘했어. 몸도 안 좋은데 늦은 시간에 잠잘 곳을 찾느라고 고생할 뻔했잖아.’''자말은 현정이 독일을 여행하던 중 만난 친구였다. 유쾌하고 친절한 남자로 자신을 아랍 에미리트 연합 두바이 출신이라 소개했다. 처음엔 비슷한 나이인 줄 알고 말을 걸었다가 현정이 자신보다 여섯 살이나 많은 것을 알고는 무척 놀라는 눈치였다. 중동 지역 사람들도 보통의 서양인들처럼 나이보다 외적으로 무척 성숙해 보이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의 눈에 동양인 특유의 동안의 모습을 지닌 그녀가 비슷한 연배로 보인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자말은 지금 영국에서 건축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봄방학 동안 잠시 여행을 다니는 중이라고 했다. 한때 대학 시절 현정도 영국에서 어학연수를 받은 경험이 있어 그 시절이 떠오르기도 했다. 공통점이 있어서인지 그들은 쉽게 친구가 되었고 독일에 머무르는 동안 함께 다녔다. 자말이 적극적으로 현정과 친구가 되려고 했고 같이 다니고 싶어 했다. 현정도 싹싹하고 귀여운 구석이 있는 자말이 남동생같이 편하게 느껴져서 기꺼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자말은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세계 곳곳을 다니며 유명한 건축물을 직접 보러 다니고 있으며 앞으로 전통과 현대미가 공존하는 훌륭한 건축물을 설계하고 싶다고 했다. 현정이 유럽과 중동의 여러 나라를 여행 중이라고 했을 때 자말은 여름방학이 되면 고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라며 그녀에게 두바이에 오게 되면 꼭 자신에게 연락하라고 전화번호와 이메일 주소까지 친절하게 적어 주었다. '“알았어. 꼭 연락할게. 두바이 시티 투어 시켜주기로 한 약속 절대 잊으면 안 돼.”'현정은 자말과의 약속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며 자신의 이메일 주소를 건네주었다. '“자, 내 이메일 주소야. 지금은 여행 중이라 어차피 편지나 전화로는 연락이 불가능할 거니까. 이메일은 자주 확인하고 다니니까 혹시 연락할 일 있으면 여기로 편지 써. 이건 내 이름이야. 한현정.”'“안녕, 자밀라. 건강해야 돼. 꼭 다시 만나길 빌게. 마앗 살라마.”'“그래, 자말. 너도 건강하고 너처럼 좋은 친구를 만나서 그동안 정말 즐거운 여행을 할 수 있었어. 고마워.”'자말은 현정을 항상 자밀라라고 불렀다. 아랍어로 아름답다는 뜻이라고 했다. 처음 한국이름을 가르쳐 줬을 때 발음하기가 힘들다고 해서 영어 닉네임을 가르쳐 줬지만 자밀라가 더 잘 어울린다며 헤어지는 날까지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이미 거대한 몸집의 비행기는 도착 게이트를 향해 느린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성격이 급한 승객들은 이미 각자의 짐을 챙기고 있었다. 드디어 비행기가 게이트에 완전히 도착하자 현정도 일어나 배낭을 꺼냈다. 장기간의 여행을 계획하고 출발했었던 터라 꼭 필요한 것만 챙겼기 때문에 큰 배낭 하나와 작은 배낭 하나가 그녀가 가진 짐의 전부였다. 사람들이 서둘러 입국 심사장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며 그녀도 외국인 입국심사 카운터로 향했다. 복잡한 입국 심사장을 빠져나오니 신기하게도 두통과 구토 증상이 조금 가시는 듯했다.'“후우. 이제야 좀 살 것 같네.”'그녀는 곧장 도착 게이트로 향했다. 배낭 여행객이니 세관 신고도 필요 없고 따로 찾을 짐도 없었다. 그제야 공항을 한 번 자세히 훑어볼 여유가 생겼다. 가장 현대적 건물 모양을 갖추고 있는 공항 내부 시설이나 많은 외국인들을 보니 두바이가 마치 문화의 섬처럼 느껴졌다. 글씨를 흘겨 놓은 것 같은 신기한 아랍어로 된 푯말을 제외하고는 여타 국제적인 도시의 모습과 별 다를 바가 없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다른 나라를 방문하면 그 나라의 공항을 눈여겨보는 습관이 생겼다. 아무래도 가장 먼저 접하는 공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두바이 국제공항도 다른 여타 공항처럼 돈을 많이 투자한 듯 보였다.'“석유로 돈 진짜 많이 벌었나 보네. 이 나라, 건축 자재 하나하나 다 수입해야 했을 텐데……. 아! 참, 모래는 수입 안 해도 되겠네. 사막에서 퍼 오면 되니까.”'조금은 엉뚱한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입가에 미소가 스친 것도 잠시. 공항 밖으로 나오자 이곳이 진정 중동의 도시임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공항 내부는 냉방 시설이 완벽하여 오히려 한기를 느낄 정도였지만 출입문을 열고 밖을 나오는 순간부터 온몸을 휘감는 뜨거운 열기에 숨이 턱하고 막혔다. 폭염 그 이상의 것이었다. 한여름 대낮, 아스팔트 위로 뜨거운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신기루 현상이 마치 12시가 넘은 이 한밤중에도 일어나는 듯 보였다. 진정 말 그대로 열사의 나라였다. '상상 이상의 뜨거운 열기와 더위에 잠시 머뭇거리던 현정은 빨리 시원한 곳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에 저쪽에 보이는 택시 승강장으로 급히 발길을 재촉했다. 그 주변에는 아랍의 전통 의상을 입은 남자들이 몇몇 보였다. 택시 승강장 쪽으로 다가가자 안내요원이 현정이 여자임을 확인하고는 많은 택시들 중 한 곳으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현정은 안내받은 택시에 곧장 올라탔다. 놀랍게도 택시 기사가 여자였다. 아랍의 전통 의상을 입고 있어 겨우 그녀의 얼굴만 볼 수 있었다. 현정이 알기로는 아랍 문화권 여자들은 사회활동이 극히 제한되어 있는 걸로 아는데 택시 기사가 여자라니 굉장히 신기하고 놀라웠다. 아랍문화권에서 가장 개방적인 도시가 두바이라더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이 늦은 시간에 혼자 택시를 타는 그녀를 배려해 일부러 여자 기사가 운전하는 택시로 안내해 준 안내요원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어디로 갈까요?”'기사가 행선지를 물었다. '“아라비아 비치 호텔로 가 주세요.”'“어디요?”'“아라비아 비치 호텔이요.”'현정은 자신의 발음을 택시 기사가 잘 알아듣지 못했나 생각하고는 한 번 더 말해 주었다.'“손님, 정말 그 호텔이 확실한가요?”'“네. 제 친구가 분명 그 호텔이라고 했어요.”'더 이상 현정에게 질문을 하지는 않았지만 택시 기사는 아랍어로 혼자 뭐라 중얼거렸다 현정은 계속 호텔에 대해 물어보는 것이 조금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너무 피곤하여 빨리 호텔로 가 쉬고 싶다는 생각에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시트 깊숙이 몸을 파묻으며 기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