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 라미스 력 793년.''마계와 천계의 경계인 레타스. 온통 피로 가득한 그곳은 지옥이나 다를 바 없었다. 대지를 흥건히 적신 핏자국들, 사방을 진동하는 비릿한 피비린내. 피바다가 된 대지 곳곳에는 숨이 멎은 육신들이 가득했다. 바로 몇 시간 전만 해도 멀쩡하게 살아 움직이던 천족과 마족들의 시체였다. '남자는 표정 없는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온전한 시체는 하나도 없었다. 대부분 마력과 천력에 의해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졌고, 그나마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것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가 한 걸음씩 발을 뗄 때마다 바닥에 고인 피가 질퍽거렸다. '[……역시.]'남자의 입술 사이로 짤막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무심하기 그지없는 자줏빛 시선이 향한 곳, 그곳에는 심장이 뜯겨져 나간 흑발의 마족이 마지막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심장이라도 온전했다면 어떻게든 살릴 수 있을 테지만, 불행히도 젊은 마족의 심장은 거의 망가진 상태였다. 이제 곧 이 마족은 폭주하는 마력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 버릴 터였다. '[케레스의 곁으로 돌아가십시오, 1황자 전하.]'촤아악. 긴 장검이 젊은 마족의 목을 가르는 것과 동시에 짙은 핏방울이 튀었다. '[큭, 크큭……!]'어느 순간, 시체들 틈새에서 흘러나온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남자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남자는 날개가 온통 찢겨진 채 가까스로 숨만 붙어있는 처참한 잔해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는 겁니까, 베르델.]'4대 원소 중 바람을 다스리는 천족 드뤼안의 수장 베르델은 소름끼치는 웃음을 토해냈다.'[이제, 너희는 끝이야……! 다음 대의 마황 계승식은 끝장났다……! 황족들이 전부 죽어버린 이상, 새로운 마황의 대(代)를 탄생시켜야만 할 거다……. 큭, 크크큭……!]'[당신들의 피해도 만만치는 않습니다만. 그 대가로 당신을 포함한 4대 원소의 수장 두 명과 케루딘 500여 명이 죽어버리지 않았습니까.]'지독히도 무표정한 남자의 음성을, 그 어떤 감정조차 서려 있지 않은 수려한 얼굴을 응시하던 베르델의 얼굴 위로 짜증 섞인 표정이 떠올랐다. '[네놈에게 감정이 없단 소문은 사실이었나. 마족의 안위가 걸린 문제다……! 루스펠과 케레스로부터 이어져온 직계 황족들은, 마황의 자식들은 전부 죽어버렸단 말이다……!]'[마황 폐하의 혈족들이 모두 죽은 것은 아닙니다만. 천공성의 정보망도 꽤 형편없군요.]'순간적으로 베르델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곧 죽을 자에게 계속 말하는 취미는 없습니다. 그만 죽으십시오.]'남자의 무미건조한 음성이 날아든 순간, 날카로운 충격이 베르델의 목을 갈랐다. 촤아악.'삽시간에 붉은 핏방울이 서늘한 뺨에, 검은 망토에 튀었지만 남자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무표정한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베르델을 단칼에 죽여 버린 흑발의 마족, 서열 1위의 마황 케르비온 헤세이드는 남자를 향해 침울하게 물었다.'[이스칼리후는?]'[1황자께서는 돌아가셨습니다.] '[결국, 운명이란 이렇게 돌아가는 건가. 망할 놈의 운명, 빌어먹을 신들……!]'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분노를 토해낸 마황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남자 또한 마황의 옆에 예를 갖춘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마황이 입을 연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였다.'[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묻겠다, 대공작. 정말로 네가 내 뒤를 잇지 않을 테냐?]'[죄송합니다, 마황 폐하.]'[흑발과 흑안의 표식이 없다 하지만 너 또한 내 자식들과 마찬가지로 리리스 폐하의 피를 이어받은 황족. 지금 이 마계에서 내 뒤를 이을 만한 자는 오직 너뿐이다.]'[저뿐이 아니란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망할 녀석.]'처음으로 마황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언뜻 보기에는 음울하기 그지없는 표정이었지만, 그는 분명 웃고 있었다.'[맞다. 얼마 전에 가까스로 확인했다. 그 아이, 살아있더군. 저 이계의 어디에 있는지는 아직 잘 모르지만 분명 예쁘게 자랐을 거다.]'[그럴 겁니다.]'남자의 예의바른 대답에 마황은 미간을 살짝 구겼다. 당장이라도 저 시건방진 말버릇을 고쳐놓고픈 심정이 굴뚝같았지만 지금은 다른 것이 더 시급했다. '[그 아이를 네게 부탁한다.]'[알겠습니다.]'[무조건, 끝까지 책임져라. 알겠냐?]'[황자 전하께서 무사히 마황 위(位) 계승을 마치실 때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곁에서 지킬 것입니다.]'[……바보냐, 대공작. 예쁘게 자랐을 거라고 힌트까지 줬는데도 황자 소리가 나오든?]'처음으로 남자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남자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고, 마황은 한숨 섞인 중얼거림을 토해냈다.'[어차피 네놈은 곧 잊어버릴 테지만…… 제발 좀 기억해라. 조금만이라도 바로 곁에 있는 타인의 감정을 생각해줘라. 모든 것이 돌아왔을 때, 잊고 있었던 것들이 전부 네놈에게로 되돌아왔을 때…… 넌 후회하게 될 거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네놈에게 했던 이 말을 떠올리며 심장이 갈기갈기 찢겨지는 아픔 속에서, 숨조차 쉬지 못할 고통 속에서 미치도록 후회하게 될 거다. 그러니까, 아주 조금만이라도 잊고 있었던 감정들을 떠올려라. 알겠냐?]'[알겠습니다.]'[정말로 알아듣지도 않은 주제에. 결국 나중에는 후회하게 될 거면서. 가엾은 녀석, 가엾은 내 딸…….]'마황의 마지막 말은 스쳐 가는 바람에 묻힌 채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남자, 서열 2위의 대공작 디아가르트 카마블러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그들의 모습은 그곳에서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버렸다. '''1년 후, 서울.''세하는 숨이 턱에 닿을 때까지 달리고 또 달렸다. 잔뜩 헝클어진 머리칼, 어깨에 반쯤 걸쳐진 코트는 그녀를 꽤나 정신없는 상태로 보이게 했다. 거리를 걷던 사람들은 황급히 세하를 피해 물러섰고, 의아한 시선들을 보냈다. '그녀가 당도한 곳은 자그마한 단독주택이었다. 가까스로 초인종을 누른 세하는 떨리는 음성으로 소리쳤다. '“아주머니, 계세요? 청주댁 아주머니! 저 세하예요!”'－누구라고요? '“세하예요! 한세하, 아주머니네 1층에 하숙하고 있었잖아요. 생각 안 나세요? 2층의 미주 언니와 저랑 같은 대학 다니잖아요. 게다가…….”'－뭐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니에요, 아가씨? 우리 집 1층 방은 2년 전부터 고시 공부하는 총각한테 내줬었는데? 그리고 아가씨 이름은 처음 들어보는데. 어이, 미주 양! 혹시 한세하란 아가씨 알아? '인터폰 저편에서 청주댁이 누군가에게 소리친 순간, 세하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제발, 제발……! 그러나 그것도 잠시, 미주라 불린 여자가 새치름하게 대꾸하는 소리가 들려왔다.'－모르는 이름인데요? 왜, 저랑 아는 사람이래요? '－아니, 모르면 됐어. 그리고 아가씨. 혹시 소개해준 부동산에서 잘못 알려준 거 아니야? 곧 문 닫을 시간이니까, 빨리 다시 한 번 가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