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어떻게 된 거지?’'그는 뇌가 튀어나갈 것 같은 통증에 머리를 싸매 쥐었다. 분명 공항에서 바로 호텔로 가서 술을 마시고, 시준에게 전화한 뒤로는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았다. '‘뭔가 잘못됐어.’'그가 침대에서 일어나 바닥에 한 발 디디자, 날카로운 무엇인가가 그의 발을 찔렀다. ‘악’ 소리를 지르며 발바닥을 살펴보자 빨간 색 조그만 레고 조각 하나가 그의 발바닥에 붙어 있다.'“에이 씨, 이게 뭐야?”'그러고 보니 그가 입고 있는 옷. 그의 옷이 아니었다. 세상에서 구하기도 힘들 것 같은 진한 보라색에 흰색, 하늘색, 노란색 자잘한 꽃무늬가 빽빽하게 쉴 틈 없이 자리 잡은 흔히 말하는 몸빼와 분홍색 낡은 여자 티셔츠 차림이었다. 간밤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그는 의아했다. 사태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이 방을 나서야만 했다. 어쩌면 납치당한 것인지도 모르니까.'그가 슬그머니 문을 열자, 그의 빈 위를 자극하는 시원한 북엇국 냄새가 먼저 그를 공격했다. 저절로 입이 벌어져,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문 밖 처음 들어온 광경은 시원해 보이는 왕골 돗자리가 깔린 마룻바닥엔 동그란 자개상-그가 어릴 때 봤음이 확실한-에 어린아이 둘이 둘러 앉아 밥을 먹는 중이었다.'“너희는 누구냐?”'곱슬머리가 뽀글뽀글 귀여운 다섯 살 가량의 남자 아이, 양쪽으로 분수 머리 묶은 볼이 터질 것 같은 아주 어린 여자 아이 하나가 입에 밥을 가득 물고, 그를 바라봤다.'“그건 아저씨가 먼저 얘기해야죠.”'아주 공격적인 말투로 남자 아이가 반격했다. 그가 내심 마음에 안 드는 눈초리였다.'“그,……그게 나도…….”'그때 낯익은 음성이 그의 귓가를 강타했다.'“우리 애 말이 맞네. 먼저 불청객이 먼저 자기소개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가 돌아보니, 유진서가 국그릇을 쟁반에 받쳐 들고 우람한 자태로 버티고 서 한 마디 했다. 뒤로 넘어갈 일이었다. '“놀랄 것 없어요. 내 전화번호가 어떻게 거기 입력된 줄은 모르겠지만, 어젯밤에 전화해서는 데리러 오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더라구요. 근데 그쪽 매니저 전화번호를 내가 어떻게 알아요? 내가 가서 데리고 왔지.”'그런 실수를 하다니. 기가 막혀서 잠시 그는 아무 말하지 못했다. 겨우 꺼낸 말이 그가 생각해도 억지 같긴 했다.'“그럼 호텔에 올려놓든가.”'그의 말에 유진서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아휴, 여자가 어떻게 감히 스타를 호텔에 올려놔? 소문이라도 나면 나는 어떡하라고?”'아줌마랑 소문나는 게 과연 누구에게 해가 될지는 누구나 알고 있다. 어이가 없지만 우선 급한 것은 이 사태를 수습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진서는 그에게 알고 싶지 않은 어젯밤 일을 줄줄이 그에게 고했다. 그것도 애들 앞에서.'“소문나지 않게 하라는 게 계약서에 있던 말 아닌가? 내가 그쪽 집을 내가 알겠어요? 아니면 매니저 집을 알겠어요? 할 수 없이 우리 집에 데리고 왔더니, 완전 오바이트 해 놔서 옷도 다 버리고, 울 엄마 옷 입혀 놨으니 이따 갈 때 내놓고 가요. 증거 사진 이런 건 안 찍었으니 걱정 마시고. 나 그렇게 모진 사람 아니거든요. 누구처럼…….”'이 여자는 남편도 없나? 그때 밥을 삼킨 여자 아이가 그를 가리키며 그녀에게 물었다.'“엄마, 이 아저씨 우리 아빠야?”'갑자기 남자 아이와 그녀의 얼굴이 굳었다. 어떻게 된 아이가 아빠 얼굴도 몰라서 생판 처음 보는 총각보고 아빠라니…….'“이 바보야! 아니야!”'남자 아이는 씩씩거리며 동생 머리를 쥐어박았다. 여자 아이는 갑작스런 오빠의 공격에 울음을 터뜨렸다. 얼마나 우렁찬지 도윤은 양 손으로 귀를 막았다.'‘이건 꿈이야. 내가 이런 데에 있을 리가 없어.’'눈을 감았다 떴지만, 그의 눈앞에는 여전히 분노에 찬 곱슬머리 사내애와 금방 울음을 그치고 어른 수저로 가득 밥을 퍼 먹는 분수머리 여자애가 보일 뿐이었다.'“정신없겠지만, 빨리 와서 밥이나 먹어요. 북엇국 끓였으니.”'그녀는 별일 아니라는 듯 발로 신문지를 슥슥 밀어 자리를 마련하고는 북엇국과 밥을 차려주었다. 그는 수저를 들고 국물을 한 술 먼저 떠서 입에 넣었다. 아침에 이런 밥과 국을 먹어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국물이 목울대를 지나 위로 들어가자 간밤의 술로 성났던 속이 확 풀어졌다. 짜지도, 싱겁지도 않은 적당한 간의 국은 북어에서 우러난 고소함과 부드러운 간이 배어 술술 잘 넘어갔다. 게다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파의 초록색과 북어의 노란색은 자꾸 그의 수저를 유혹했다.'“아.”'“한 그릇 더 줘요?”'도저히 거부할 수 없었다. 희고 윤기 나는 찰진 쌀밥 역시 입에서 단맛을 남기며 혀에서 살살 녹았다.'“원래 잡곡밥 먹는데, 속이 말이 아닐 것 같아서 쌀밥 했어요.”'그녀는 무뚝뚝하게 얘기하지만, 왠지 안쓰러움이 묻어났다.'“근데 애들은 왜 북엇국이 달라요?”'도윤은 옆 자리 애들 국 사발을 들여다보더니 생뚱맞게 트집을 잡았다.'“별 걸 다 질투하네. 애들은 북어를 계란 입혀서 끓였어요. 눈독 들이지 말아요. 그렇게 기름진 안주랑 술 먹은 뒤에는 계란 별로 안 좋다고 해서 도윤 씨 거는 그냥 시원하게 끓였으니까.”'“내 옷이나 빨리 줘요.”'그가 퉁명스럽게 다른 말을 하자, 그녀는 숨 한 번 크게 쉬고 한마디 했다.'“고맙다는 말 들으려고 한 건 아니지만, 정말…… 우리 집엔 드라이머신 같은 거 없어서 아직 안 말랐거든요. 그러니까 마당에 널어 놨으니까 마르면 걷어 입든가 해요.”'어쩌다 실수를 해서는 인생의 오점을 남기게 됐을까. 그런데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는 어릴 때 엄마와 있는 것처럼 편하고, 자꾸만 잠이 솔솔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