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동이 어슴푸레 비쳐드는 방 안, 원룸 한구석에 자리한 침대 위에서 자잘한 움직임이 일었다. 조심스런 동작으로 알몸을 시트로 가리고 일어나 앉는 여자의 등 뒤로, 역시나 알몸의 남자 모습이 드러난다.'자신으로 인해 온기를 잃은 남자의 몸에 시트 끝자락을 내어주는 여자의 손길이 한없이 부드럽다. 남자를 깨우지 않기 위한 서글픈 배려이자, 침대 위에서의 대면을 피하기 위한 여자의 방어적 수단이었다. '밤새 비스듬히 열려 있던 창문 사이로 연보랏빛 커튼이 흔들렸다. ''침대에서 무릎을 세워 웅크린 가희는 아직도 깊이 잠들어 있는 시혁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꿈인가 싶어 몇 번을 보고 또 보아도 깊은 숨으로 인해 오르내리는 시혁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는다. '조심스레 팔을 뻗어 흐트러진 시혁의 머리카락을 만지려던 그녀가 잠결에 고개를 돌리는 그로 인해 놀라 손을 거둬들였다. 놀란 손끝의 떨림이, 숨조차 멈춰 버린 소심함이 정면으로 보이는 거울에 비쳐 그녀를 조롱한다. '가희는 그렇게 마냥 거울을 바라보다 자신의 몸에서 시트를 걷어냈다. 드러난 알몸은 분명 언제나 보아왔던 자신의 몸인데, 하룻밤 사이에 달라 보인다. 같으나 같지 않은 몸, 그랬다. 시혁으로 인해 여자가 된 몸은 더 이상 예전의 몸이 아니었다. '팔 년의 사랑을 하룻밤에 불태우며 얻은 가슴 언저리의 흔적들, 가만히 그것들을 훑는 손끝이 차가웠다. 밀려드는 상념을 떨치듯, 가희는 침대에서 내려섰다. '침대 주위로 그녀와 시혁의 옷이 흩어져 있었다. 허물을 벗듯, 아무렇게나 나동그라져 있는 옷들이 지난밤 연인들이 얼마나 서둘렀는지를 보여주었다. 가희는 허리를 숙여 마침 발에 걸린 시혁의 셔츠를 주워 올렸다. '윽! 그 단순한 허리 숙임에 당겨진 근육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제야 확연해지는 현실, 스물여섯, 사랑하는 사람에 의해 여자가 되었다. '시혁은 시작의 망설임이 무색할 정도로 열정적인 연인이었다. 처음인 가희를 배려하는 부드러움 속에 거친 욕망이 어우러진 환상적인 연인, 적어도 가희에게 시혁은 그러했다. '그에 못지않게 그녀는 또 얼마나 격렬했던가. 유일한 바람이었던 시혁으로 인해 여인으로 거듭나면서 소극적이고 얌전함을 가장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누구에게도 길들여지지 않았기에 과감할 수 있었고,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기에 절박했다.'시혁이 생각이란 것을 하지 못하게, 눈앞의 현실에만 몰두하기를 원했고 그녀는 그 바람을 이루었다. 온몸과 마음을 부딪쳐서. '시혁의 셔츠에 얼굴을 묻어 본다. 희미하게 배어 있는 그의 체취가 느껴졌다. 긴장감이 스르르 사라지는 것이, 행복하다 자위하며 욕실로 향했다.' '옷을 다 차려입은 가희는 다시 한 번 시혁의 얼굴로 시선을 옮겨, 그 위의 평화로움을 위안삼아 걸음을 옮겼다. 잠깐의 유예, 깨어나면 사라질 평화였다.'마지막까지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고 자신의 집을 도둑고양이처럼 빠져나왔다. 한여름의 텁텁한 공기가 아침부터 한낮의 기온을 가늠케 했다. 가희는 닫힌 문에 기대어 이미 떠오른 태양을 쳐다보았다. '눈물이 흘렀다. 맨눈으로 바라본 태양 빛이 너무 밝아서라고 스스로에게 변명을 한다. 그러나 가슴의 통증이, 앙다문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흐느낌이 애써 만든 변명을 비웃었다.'가지면 행복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오만이었던 모양, 그녀에게 있어 또 하나의 태양이었던 이시혁이라는 남자를 품은 가슴은, 지금 화상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얼마나 그렇게 태양과 눈싸움을 하고 있었을까. 옆 오피스텔의 문이 열리며 남녀 한 쌍이 나왔다. 오며가며 안면이 익은 여자와 초면의 남자였다. 가희와 시선을 마주친 여자가 눈인사를 한다. 서둘러 문단속을 하는 그녀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의 당황스러워 하는 모습에 지금까지 뒤쪽에 서 있던 남자가 몸을 움직여 그녀와 가희 사이를 차단한다. 자연스럽게,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연인을 지키려는 남자의 행동이었다. 문단속을 끝내고 승강기로 향하는 연인들을 바라보는 가희의 가슴에 진한 부러움이 쌓였다. '그들의 밤도 진한 연인들의 밤이었을 터, 같은 밤을 보냈음에도 아침을 맞는 방법에 차이가 있다. '딩동, 승강기가 움직여 남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기까지, 가희는 옆의 빈자리를 뼈저리게 느끼며 아파해야 했다. '침대 옆 협탁 위에 올려놓은 짧은 메모의 내용을 떠올린 가희는 겨우 문에서 몸을 세워 그곳을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