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만에 도희는 자금성을 탈출했다. 사실 집안 분위기도 어두워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침묵. 도희가 제일 싫어하는 것 중에 하나이다. 지금까지 충분히 침묵 속에 살아왔다. 혼자였던 삶. 집에 돌아오면 반겨 주는 이 없이 책과 씨름하는 게 전부였다. 살던 집의 크기가 달라졌을 뿐 가끔 무거운 침묵에 자금성이 더욱 외롭게 다가왔다. 그래서일까? 도희는 재균이 좋았다. 사람을 외롭지 않게 해주는 사람. 사실 좀 귀찮을 때도 있지만 재균은 항상 사람 마음을 잘 헤아려 살펴 주었다. 이런 이유로 주말 재균의 오피스텔을 찾아오게 되었다.'“아저씨, 내가 놀러 온 게 그렇게 좋아요?”'연실 방실거리며 커피를 타고 있는 재균을 보자 도희도 모르게 웃음꽃이 피었다. 어젯밤 자금성에서 있었던 일은 잠시 묻어 두기로 했다.'“내가 뭐 엄청 좋아서 이러는 줄 알아? 그냥 혼자 밥 먹기 싫었는데 잘 됐다 싶어서 그런 거지.”'“어떻게 아저씨는 처음부터 끝까지 밥이에요.”'입을 삐죽거리는 도희 앞에 재균은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내밀었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여기까지 온 거야? 네 전화 받고 넌가 싶었다니까.”'갑자기 말이 없는 도희를 보자 재균은 미간에 주름이 지었다. 구 실장과 연관 있는 일이 아니기를 바랄뿐이었다.'“점심 뭐 먹고 싶니?”'재균의 물음에 도희는 냉장고부터 열어 보았다.'“뭐 먹고 싶으냐니까 냉장고는 왜 열어?”'“해 먹을 재료가 뭐가 있나 해서요.”'“해주려고?”'놀란 재균의 몸이 도희에게 바짝 다가갔다.'“네. 나가는 것도 귀찮고 매일 얻어먹는 것도 미안하고 음…… 마땅한 것이 없네요. 시장 좀 봐오실래요?”'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는 재균을 보자 심부름 잘하는 어린아이같이 보였다. 물론 이런 말을 입 밖으로 했다가는 그 다음 일어날 파장을 알기에 속으로 삼켰다. 몇 가지 재료를 적어 재균을 내보낸 도희는 냄비에 물을 담아 불 위에 올렸다. 다 시들은 파를 다듬고 달랑 하나 남은 양파를 까고 양념장을 만들던 도희는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벌써 갔다 온 거예요?”'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중년의 여자를 보자 도희는 순간 동작을 멈췄다. '“놀란 것은 알겠는데 수돗물은 잠그는 것이 좋겠네요.”'고상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도희는 수도꼭지를 잠갔다. 젖은 손을 자신의 옷에 대충 닦고 주방에서 걸어 나오자 중년의 한 여자와 마주하게 되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딱 보아도 사모님 같은 분위기가 넘쳐흘러 도희는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나도 놀라기는 했는데 좀 앉아서 얘기할까요? 좀 무겁기도 하고.”'여자가 도희 앞에 내민 것은 보자기로 싼 반찬들이였다. 얼른 그것을 받아들고 난 도희는 어째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꼭 연애하다 들킨 사람처럼 도희는 우물쭈물하다 소파에 마주 앉았다. '“차라도…….”'말끝을 흐리며 묻고 나니 이곳이 자신의 집처럼 얘기한 것이 실수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괜찮아요. 그런데 재균이는?”'“아, 네. 지금 시장 보러…….”'말을 하다 만 도희는 아차 싶었다. 영락없이 연애질 하는 사이로 오해하기 딱 맞았다.'“재균이가? 호호호, 미안해요 웃어서. 내 아들이 시장을 보러 갔다니 웃지 않을 수가 없네.”'‘아들?’ '짐작이 맞았다. 정말 이런 상황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지만 우습지도 않게 드라마에서 많이 보던 그 장면이었다. '“아가씨 이름은?”'“나도희라고 합니다.”'“도희, 예쁜 이름이네요. 얼굴만큼.”'“감사합니다.”'오, 제발! 재균이 빨리 돌아와 주길 바라고 있건만 현관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럼 재균이 하고는 어…….”'“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직장 동료에요.”'“아, 직장 동료.”'손까지 젖어가며 부인했지만 전혀 믿지 않는 표정이었다. '“요즘은 직장 동료끼리 집까지 찾아와서 점심까지 해먹고 그런가 봐요?”'웃으면서 말씀하시지만 저 뼈가 있는 말에 도희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지만 왠지 지금 이 상황을 즐기고 계신 듯한 착각도 들었다. '‘왜일까?’ '그때 그렇게 원하고 원했던 현관문이 열렸다.'“빨리 왔지?”'‘네, 빨리도 오셨네요.’ '울고 싶은 표정으로 도희는 재균을 바라보았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온 재균은 얼었다. 두 여자를 번갈아 쳐다보던 그가 시장 본 것을 뒤로 감췄다. '“오! 아들. 다 봤단다.”'늦었다. 빠릿빠릿하게 움직일 것이지 새삼 재균을 보며 도희는 곰 같단 생각을 했다. '“앉아. 내가 그렇게 이방인이니? 눈치껏 빠져 줄 테니 앉아.”'“아니에요. 그런 거.”'재균은 도희 옆에 나란히 앉았다. '“반찬 가져다 놓고 가려고 했는데 예쁜 아가씨가 있더라? 아들 걱정 안 해도 되겠네?”'자신들을 놀리고 있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지만 어른이시니 딱히 대꾸도 못하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점심은 맛있게 둘이 먹고 저녁은 본가에서 먹어요. 내가 아가씨, 집으로 초대하는 거야.”'“네?”'“싫어요?”'“아니…….”'도희는 재균에게 따가운 눈총을 보냈다. 이 무슨 일이냔 말이지. 자신이 가는 곳마다 사고가 끝이질 않는 것 같았다.'“어머니, 불편하게 왜 그러세요. 아직 그런 사이 아니에요. 오해 마세요.”'“아들 나이가 벌서 몇이더라? 많이 늦었지? 그 많은 선 자리도 마다하고 집으로 들인 아가씨잖아. 사실 마음 같아서는 이 아가씨한테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인걸. 고마워서.”'“제가 어때서요. 고마워해야 하는 것은 얘라고요.”'가만히 있던 도희가 재균을 노려보았다. 지금 누가 누구더러 고맙다는 말을 쓰는지 몰라도 여사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표정으로 지었다.'“좀 많이 빠지기는 하지. 네가.”'고개를 저으며 재균을 바라보는 여사님이었다. 이상하게 처음보다 많이 편해지고 있었다. 장난처럼 불편하지 않게 긴장감을 풀어 주시는 마음이 감사했다. 물론 집에 초대한다는 말만 빼면 말이다. 여전히 티격태격하고 있는 아들과 엄마였다.'“오라니까. 너 좋아하는 양념게장 해줄게.”'“다음에 혼자 갈게요. 얘, 낯 많이 가려요.”'“우리 집이 어때서? 잡아먹겠다는 것도 아니고 노총각 구제해 줘서 고맙다고 초대하는 건데.”'“제가 어딜 봐서 노총각이에요!”'“그렇게 큰 소리 칠 나이는 아니지.”'점심은 다 먹었다 싶다. 끊이질 않는 두 모자의 대화 때문이었다. '“오는 걸로 알고 나는 이만 가마.”'“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