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머머머머머머!”'오두방정이라는 네 단어를 의성어로 표현하자면 바로 저런 것이 되지 않겠나 싶다. 세상에는 ‘어머’도 있고 ‘어머머’도 있는데 ‘어머머머머머머머!’는 또 뭐란 말이냐.'내가 들은 척도 않고 책장을 넘기는 동안 거실 쪽에서는 오두방정이 무한 반복되기 시작했다.'“어머머머머머머머머머머머머!”'대개 ‘어머’라는 건 혼잣말 혹은 감탄사겠지만 저렇게 ‘머’에 강조점을 두는 것이고 보면 ‘어머머머머머머머머머머머머!’라고 들리더라도 ‘얘 이리 와서 아는 척 좀 해줘.’라고 해석해야 타당했다. 끝까지 모르는 척하면 과연 ‘머’를 몇 번이나 할 것인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한 여름이라 에너지 절약차원에 온 아파트 주민들이 다 창문을 열고 있는데 밤하늘에 낭랑하게 울려 퍼지는 모친의 목소리가 마리아 칼라스 같을 리가 없었다. 언제나 공익을 생각하는 나는 결국 몸을 일으키고야 말았다. 언제나 그렇지만 나란 존재가 이렇게나 사려 깊다.'“왜요, 어머니? 무슨 일 있어요?”'궁금하지 않더라도 궁금한 척 하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28년쯤 모친의 딸로서 지내다보면 분명히 별일도 아니고 재미도 없을 일이라도 물어야만 하는 일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왜냐면 세상의 모든 장구 중 가장 상대의 기분을 좋게 하는 장구는 맞장구이기 때문이고 모친의 기분이 좋아지면 가정의 평화가 오며 가정의 평화가 오면 가정의 일원인 나의 삶이 편안해지기 때문이다. 신의 은총이, 아니 장구의 은총이 이 가정에 내리시길.'모친은 드디어 화제를 공유할 누군가가 나타났다는 기쁨에 입을 크게 벌리곤 다소 오버된 액션으로 손가락을 뻗어 TV화면을 가리켰다. '솔직히 말하자면 TV화면에 로또 번호가 6개 떠 있는데 그 번호와 똑같은 번호가 적힌 복권을 모친이 들고 있는 게 아니라면 저렇게 입과 눈을 동그랗게 만드는 일에 내가 동참할 것 같진 않았다. 설사 예수재림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다고 해도 그 예수가 내 친오라비가 아니라면 난 그냥 성호 한 번 긋고 내 방으로 돌아가서 읽던 책을 마저 읽을 성격이었으니까.'“저, 저거 사, 상우 아냐?”'화면에 크게 클로즈업된 얼굴을 보고 ‘진짜 예수재림인가?’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모친이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말을 더듬으며 이야기를 꺼냈다. 모친의 연극적인 표현법은 지나치게 진부하다. 놀라움을 표현할 때는 반복, 충격을 표현할 때는 더듬는다. 그나저나 상우? 상우가 누구지?'“상우, 유상우! 너네 고등학교 일 년 선배였잖니!”'아, 그제야 유상우라는 세 글자가 머리에 들어왔다. 동시에 아주 불쾌하고도 짜증나는 감각이 배 안에서 느글거리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인상이 우그러들었다.'유상우가 누구냐면 천하의 개 날라리로 세상 무서운 것 없이 제 멋대로 학교를 다녔는데도 단지 반반하다는 이유만으로! 키가 크고 팔다리가 길쭉길쭉한데다가 뽀얀 살결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은근히 지지 세력이 있었던 인물이다. '게다가 그 외모가 무슨 판타지를 자극했는지 몰라도 찌질하게 본드, 신나, 이런 정도가 아니라 근처 폭력배와 관계가 있어 진짜 마약을 구한다는 둥, 사실은 어떤 폭력조직의 후계자로 고등학교만 졸업하라는 오야붕의 지시로 학교를 다니던 중이라는 둥, 그 오야붕이 우리 학교 이사장이라는 둥, 밤에는 일본에 가서 모델 일을 한다는 둥 말도 안 되는 소설이 무성했다. '아니, 반항아인데 얼굴이 잘 생겼으면 상처받은 거고 못 생겼으면 그냥 개자식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들 있다. 난 정말 이런 태도들이 짜증난다. 아니, 이런 태도를 야기하는 놈들 자체가 짜증난다.'자신의 악행을 다른 걸로 덮는다. 바로 그런 놈들이 진정한 악마인 것이다. 아닌 건 아닌 거고 잘못된 것은 잘못된 건데 진정한 악(惡)은 가장 눈에 띄는 방식-외모-로 사람을 현혹한다.'물론 우리 모친은 그런 판타지를 몹시도 좋아하시는 분이시며 내가 지금 유상우라는 이름과 사연을 발가락 때만큼이라도 기억하는 이유는 모친이 그 판타지를 전파하다 못해 창시하시기까지 한 분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똑똑히 기억나는데 그 당시 모친이 다른 반 학부형들과 한 통화내용은 주로 이런 식이었다. '“그거 아세요? 3학년 유상우가 17대 1로 싸웠는데 왼팔은 뒷짐을 진 채 오른팔로만 아이들을 상대하며 뒤로 훅훅…….”'……난 우리 모친을 안 닮았고 그때도 모친이 부끄러웠다.'이런 모친에 대한 반항심은 아니었지만 고등학생 때의 나는 범생 중의 초 범생으로 애들이 떠들기라도 하면 손들고 선생님께 ‘쟤 떠들어요!’라고 고해바칠 정도로 정의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 악마의 자식만 보면 성수를 뿌리고 싶은 기분에 시달려야 했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지? 사실 떠드는 게 잘하는 짓인가 아니면 그걸 막는 게 잘 하는 짓인가? '난 분노한다! 내 학창시절 다른 아이들도 저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왜 자기들이 떠들고 날 백안시 하는가? 왜 옳지 않은 일을 하고 옳은 일을 한 자를 핍박하는가? 세상은 의인을 탄압한다. 정의는 언제나 외로웠다. 왜 저런 슈퍼 개날라리는 곱상하게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나쁜 짓을 해도 열광적인 반응을 얻어내고 나는 옳은 일을 하는데 다들 내 뒤에서 쑥덕대는 건가?'뭐 어쨌든.'모친이 유상우에 대한 호감도가 높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고 그래서 지금 저 화면을 보고 관심이 생겼는지 모르겠으나, 나의 유상우에 대한 호감도는 지극히 낮았기 때문에 같은 화면을 보고도 생긴 관심이라고는 풀잎 끝에 매달린 작은 이슬방울보다도 더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다. '난 약간 불쾌해져서 TV 화면에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즉시 모친의 초롱초롱한 눈과 눈이 마주쳤다.'눈도 말을 한다. 모친의 눈이 한 말은 ‘물어봐, 물어봐. 쟤가 왜 TV에 나오는지 물어봐. 그걸 물어봐주면 난 기분이 좋아질 것 같아.’였다. '다시 말하지만 모친이 기분이 좋아지면 가정에 평화가 온다. '난 굴복했다.'“……쟤는 왜 TV에 나온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