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OOOO년 7월 22일 화요일 대한신문 '혼란 속에 몸살 앓는 DS그룹 '하지만 진짜 싸움은 이미 침묵 속에서 진행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절 최고 경영자로 만들어 주세요. 작은아버지와 승우, 그리고 그 누구도 다시는 절 마음대로 뒤흔들 수 없게, 그렇게 해주세요. 그런 다음에 당신이 원하는 게 뭐가 됐든 모두 들어드릴게요.’'-네게 그럴 만한 배짱이 있기나 한지 모르겠군. 난 손해 보는 장사는 좋아하지 않아.-'‘절 최고 경영자로 만들어만 주신다면 당신의 꼭두각시라도 되어드릴게요. 당신이 웃으라면 웃고 울라면 울고, 그리고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하는 그런 꼭두각시요.’'-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하는 꼭두각시라…….-'‘…….’'-네 영혼까지 내게 팔겠다는 건가?-'‘대신 제가 최고 경영자 자리에 있는 동안에는 절 노리고 위협하는 모든 적들로부터 절 지켜주세요.’'-널 갖는 대신 지켜라. 하지만 네가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인간일까?-'커다랗고 시커먼 그림자가 용솟음치듯 거세게 꿈틀거렸다. '‘그런데 당신의 실체는 뭐죠?’'-정말 그게 알고 싶은가?-'‘…….’'-내 실체를 알게 되면, 그 순간 넌 죽을 수도 있어.-'“헉…….”'잠에서 깨어난 승현은 낮게 한숨을 몰아쉬며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분명 꿈이었지만 아직도 귓가에 음산하게 울리던 목소리의 여운은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승현은 식은땀에 젖어 목덜미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내며 잠시 마음을 가다듬은 후 바닥으로 다리를 내렸다. 바닥에 내려서자 땀이 식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엄습해오는 한기 때문인지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니 어쩌면 지금 그녀를 진짜 떨게 만드는 것은 방금 전 꿈속에서 형체조차 제대로 보여주지 않은 채 그녀를 비웃고 몸서리치게 만들었던 검은 그림자의 목소리인지도 모른다.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왜 자신이 그토록 비루하게 목숨을 구걸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꿈에서조차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자신의 모습은 생각할수록 스스로를 비참해지게 만드는 것 같았다. '소파로 다가간 승현은 소파 팔걸이에 걸어둔 가운을 몸에 걸쳤다. 가운의 매듭을 단단히 여미며 초침 끝 형광물체로 시간을 가리키고 있는 벽시계를 바라보니 아직 새벽 5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기분 나쁜 꿈이었지만 악몽 덕분에 적절한 시간에 잠에서 깬 것이다. 잠시 방 한가운데 서서 깊게 심호흡을 한 그녀는 정원에서 새어 들어오고 있는 흐릿한 랜턴 불빛에 의지해 조용히 방을 나섰다.'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그런지 복도 역시 거실에 걸린 시계의 초침소리만이 분주히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승현은 더욱 숨을 죽이며 작은 발자국 소리도 나지 않게 조심조심 깜깜한 복도를 지나 서재 앞으로 다가갔다. 더듬더듬 문을 어루만지자 차가운 금속 손잡이가 손바닥에 닿았다. 그녀는 두 손으로 그것을 움켜잡고 소리가 나지 않게 조용히 문을 열고는 재빨리 안으로 들어섰다. 서재로 들어서자 복도와는 또 다른 서늘한 한기가 와락 그녀를 반겨왔다. 가운을 좀 더 단단히 여미며 그녀는 어둠 속에서 발로 바닥을 더듬듯 천천히 소파를 지나 책꽂이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뒤꿈치를 들어야 겨우 손가락 끝만 닿는 높이의 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곧 단단하고 묵직한 물체의 촉감이 손가락 끝에 닿았다. 승현은 그것을 조심스럽게 잡아당겨 손가락으로 단단히 움켜잡고는 단 한 번의 동작으로 끌어내려 얼른 가슴에 안았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한 표정으로, 하지만 행동만은 민첩하게 서재를 벗어나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방으로 돌아온 승현은 침대에 앉아 협탁 위에 놓인 스탠드의 조명을 가장 약하게 켰다. 그리고 서재에서 가져온 책의 표지를 내려다 봤다. 경제학 원론, 책의 표지에는 분명 그렇게 적혀 있었다. 승현은 소리 내지 않고 피식 웃으며 책의 단단한 겉표지가 열었다. 그러자 그 속에 숨어 있던 스펀지로 감싸인 검은 펜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사실 그것은 평범한 펜이 아니라 어제 작은아버지를 만나고 회사에서 돌아오면서 구입한 펜 타입 녹음기였다. 어쩌다 이런 지경에까지 온 것일까? 아니 왜 진작 이렇게라도 손을 쓰지 못했던 것일까? 승현은 펜을 손에 움켜쥔 채 책망인지 한탄인지 모를 한숨을 낮게 내쉬었다. '녹음기는 소리가 날 때만 녹음이 되도록 설정을 해 놓았기 때문에 이어폰을 연결해 귀에 꽂은 뒤 스위치를 켜자 곧바로 나직한 소음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앞부분에 녹음된 소리는 대부분 서재 문이 열렸다 닫히고 집사와 가정부로 짐작되는 사람들이 오고가는 발자국 소리들 뿐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유난히 직직 끌리는 승우의 발자국 소리가 서재 안으로 들어오더니 재호에게 전화를 해 자신이 지시한 일을 재대로 해결하지 못했다고 욕설을 퍼붓고 윽박지르다 더 나아가서는 협박을 하는 소리가 듣기 민망할 정도로 오랫동안 흘러나왔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이렇게 심한 말들을 서슴없이 쏟아 붓다니 과연 안하무인이라는 말을 듣는 것도 당연한 녀석이었다. 그런데 좀 더 이어진 두 사람의 통화 내용으로 미루어 승우 역시 그녀와 동욱의 관계를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승우의 눈에조차 자신들의 관계가 의심스럽게 보였다니 어디가 문제였던 것인지 승현이 기억을 더듬어 보려는 찰나, 분명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의 인기척이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역시 처음 자신의 존재를 그녀에게 알려준 것은 문을 열었다 닫는 평범한 기척 소리였다. 하지만 그는 서재 안으로 들어선 뒤 작은 달칵 소리로 문을 잠그고 있었다. 그리고 책상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의자를 빼내어 자리에 앉았다. 그 순간 승현은 펜을 들고 있던 자신의 손바닥에 땀이 배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드디어 작은아버지의 육성이 이어폰을 통해 나직하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김 부장 날세. 통화 괜찮은가?”'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승현은 어딘가에서 작은아버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하지만 펜을 움켜잡은 손에는 본능적으로 더욱 힘을 실고 있었다. 그 무엇도 절대 빼앗기지 않겠다는 듯.'“그래, 자네 형님도 별일 없으시지? 지금은 무슨 사건을 조사 중이신가? 하하하. 그러시겠지. 그렇지 않아도 바쁘신 분인데, 내가 무리한 부탁을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하지만 내가 이런 얘기를 김 부장과 김 부장 형님께 하는 건 다 김 부장을 믿고 우리 그룹을 위해서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건 알고 있겠지?”'승현은 꿀꺽 침을 삼켰다. '“그래, 다 우리 그룹의 미래를 위해서 이러는 걸세. 그렇지 않으면 내가 뭐 하러 이렇게 굳은 일에 직접 손을 대겠나? 내가 자네에게 넘겨준 파일, 바로 검토해 보시고 문제될 부분이 없다면 내일 오전 중으로 수사에 들어가 달라고 말씀을 드려 주게나. 나야 물론 빠를수록 좋겠지. 사실 마음 같아서야 지금 당장이라도 움직여 달라고 부탁을 드리고 싶네만 모든 일엔 다 적당한 때와 순서가 있는 법이니까. 그런데 말이야, 집사람이 내일 자선 바자회에 나가서 JB건설 사모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다고 잔소리가 여간이 아닐세. 그래도 내 곁에 자네 같이 든든한 재목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하하하. 제 아무리 SC라도 이 정도 물증을 가지고 검찰에서 들이닥친다면 쉽게 저항하거나 허튼짓을 꾸미지는 못할 걸세. 다른 건 걱정 말게. 그래, 나도 그 노인네가 그런 꼼수를 부릴 줄 알았다면 그때 그 부지를 그런 헐값에 넘기지는 않았을 텐데 말일세. 지금은 일이 좀 골치 아프게 돌아가고 있긴 하지만 자네가 도와준다면 곧 모든 일이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흘러가게 될 걸세. 그리고 그 부지를 계약한 사람이 분명 한 이사의 매제였네. 건설사 사장이 그 매제의 친형님이라는 것 같지만 계약서에는 매제라는 사람이 사인을 했던 모양이야. 우리한테는 오히려 잘된 일이 아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