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쾌하게 불어오는 바람과 푸르른 하늘. 평소 같았으면 맑은 하늘에 두둥실 떠 있는 하얀 구름을 보며 감탄했을 연수이지만 오늘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평일의 한산한 인도를 가로지르는 그녀의 표정은 비장하기까지 했다. 마치 목숨 바쳐 싸우기 위해 전쟁터로 나가는 장군처럼.'정략결혼.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의 결혼. 집안끼리의 약속이라는 조부의 구시대적인 발상에 맞서 일주일 동안 꿋꿋하게 단식투쟁을 한 결과 그녀가 얻은 것이라고는 조금 줄어든 몸무게와 약간 납작해진 복부가 전부였다.'하지만 절대 한 평생을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마음을 섞고 몸을 섞으며 살 자신은 없다. 게다가 결혼할 상대가 사촌 동생인 지혁의 친구이자 학교 후배인 이시원! 그 싸가지 없고 유들유들한 녀석과 쪼글쪼글 할머니가 될 때까지 손 붙잡고 같은 길을 걸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다.'절대 무너지지 않는 철옹성 같은 조부, 서훈도 옹을 설득 하는 것은 포기하고, 그녀가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이시원, 그놈과의 계약.'‘그놈도 분명 나랑 결혼하는 것은 싫을 테니, 계약은 쉽게 성립 될 거야’라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약속 장소인 커피숍이 가까워질수록 긴장이 되었다.'‘이시원 그 녀석은 만만한 놈이 아니니 잠시도 긴장을 늦춰서는 안 돼!’'커피숍 앞에서 잠시 마음을 다잡은 그녀는 유리문을 밀며 안으로 들어갔다. 한가한 내부를 둘러보자 창가에 앉아 있는 시원이 보였다. 그녀는 최대한 여유로운 걸음걸이를 떼었다.'그때, 시원의 자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앉아 있는 세 명의 여자가 연수의 이목을 잡아끌었다. 날씬한 몸매와 세련된 옷차림의 그 예쁜 여자들이 혼자 있는 시원을 힐끗힐끗 훔쳐보며 저희들끼리 소곤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연수는 인상을 찡그렸지만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여자들의 눈초리는 관심도 없다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창가를 내다보고 있는 시원의 곁에 선 연수가 맞은편에 몸을 내렸다.'연수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그가 시선을 옮겼다.'“10분 늦었어.”'손목에 차고 있는 은빛의 시계를 내려 보던 시원의 차분한 어조가 이어졌다.'“먼저 만나자고 한 사람이 늦으면 안 되지.”'“치사하긴.”'연수는 구시렁거렸다. 시원이 소파 등받이로 몸을 느긋하게 기대며 그녀를 응시했다. 그 여유 있는 태도에 그녀는 이유 없이 긴장하고 말았다. 갸름한 얼굴에 날씬한 몸매, 그에게 푸른빛의 셔츠가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용건이 뭐야.”'시원이 짧게 물었다. 연수는 미간을 찡그렸다. 정말 내가 만나자고 한 이유를 모르는 건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을 하는 걸까? 이놈도 분명 나랑 결혼하라는 말을 들었을 텐데, 왜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지?'“넌 나한테 뭐 할 말 없어?”'“무슨 말?”'오히려 되묻는 그로 인해 그녀는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시원도 자신이 어떤 말을 하려는 지 대충은 짐작하고 나올 줄 알았다. 자신을 보자마자 그도 그 어이없고 황당한 ‘정략결혼’ 이야기를 제일 먼저 꺼낼 것이라 예상했고.'“우리 결혼…….”'연수가 먼저 운을 띄우자 그제야 그가 알았다는 듯 말했다.'“아, 그거?”'그녀의 인상이 찌푸려졌다.'“아, 그거? 서로 사랑하지도 않는 우리 둘이 결혼이라는 걸 하게 생겼는데, 고작 한다는 말이 아, 그거? 넌 아무렇지도 않냐? 나랑 결혼하는 거?”'연수가 열을 내자 그가 말했다.'“아무렇지도 않진 않지. 그래서 오늘 나한테 할 말이 뭔데?”'시원이 꽤 진지하게 그녀의 말을 들을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잠시 마음을 가다듬은 그녀가 조곤조곤 자신의 의견을 내놓기 시작했다.'“우리는 서로 사랑하지 않잖아? 그럼 우린 결혼을 해선 안 되는 사이잖아.”'“그래서?”'“하지만 난 우리 할아버지의 완강한 고집을 꺾을 수가 없어. 눈이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절대 당신을 거역하는 걸 보지 못하는 분이시니까. 너희 아버지의 고집도 대단하시다고 들었는데. 음, 그래서 말인데…….”'시원의 얼굴을 슬쩍 본 연수가 말을 이었다.'“우리 일 년 동안 계약 결혼을 하는 건 어때? 나는 결혼을 함으로써 일 년 동안 자유를 얻고, 너도 더 이상 집 안에서 시달리지 않아도 될 테니까. 물론, 너도 나랑 같이 지내는 게 싫겠지만, 나도…….”'“좋아.”'“뭐?”'말이 채 다 끝나기도 전에 결론을 내려버리는 시원으로 인해 연수는 놀란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러자 시원이 한쪽 입술을 여유롭게 치켜 올리며 커피잔을 들었다.'“그렇게 하자고.”'“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대답한 거야?”'“일 년 동안 계약 결혼 생활을 하자는 거잖아.”'시원의 신속한 결단력에 연수는 멍해졌다. 그를 만나러 오기 전, 이것저것 할 말을 정하며 연습까지 했던 자신의 행동이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다.'“그럼, 용건은 다 끝난 거지? 난 일이 있어서 그만 일어난다.”'시원은 기다란 몸을 일으켰다.'“뭐야, 이 상황은.”'나지막이 읊조린 연수는 이 꿈 같은 상황에 냉수를 벌컥벌컥 마셨다. 연수가 시원의 맞은편에 앉은 그 순간부터 이어진 커피숍 안 여자들의 수군거림과 따가운 눈총조차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 버렸다.'연수는 시원이 사라진 쪽을 돌아보았다.'‘그럼, 계약이 성립된 건가?’'그 자리에 혼자 남은 연수는 갑자기 허탈해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