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폭풍을 삼키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눈동자가 섬뜩했다. '아랫배에 느껴지는 통증 때문에 인상을 찌푸리던 해주는 불안한 시선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으로 얼굴의 반이 가려져 제대로 볼 순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녀는 그의 목소리가 낯설지 않았다.'“젠장.”'낮게 욕설을 뱉어 내던 남자가 몸을 움직이며 입술을 비틀었다.'“마, 많이 다쳤어요?”'“살짝 스쳤을 뿐이야.”'“어, 어디 좀 봐요.”'“윽.”'검은 재킷을 들추려던 해주는 순간 멈칫했다. 그녀의 손이 닿지도 않았는데 남자는 벌써 입술을 꾹 다물며 가슴을 움켜쥐고 있었다. 강하게 그러쥔 그의 손마디 사이로 벌건 핏물이 보였다.'“피, 피가…….”'“조용히 해.”'그 순간 다닥다닥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문이 벌컥 열렸다.'“읍.”'순간 남자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코끝에 끼쳐 오는 비릿한 피 냄새가 역겹게 느껴졌지만 그의 손을 떨쳐 낼 수도 없었다.'“쥐새끼 같은 놈.”'그때 퍽 소리와 함께 빈 상자들이 우르르 바닥으로 널브러졌다. 그러자 그녀의 입안에 고여 있던 침이 꼴깍 넘어갔다. 해주는 불안하게 쌓여 있는 상자더미를 바라보며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있던 남자의 커다란 손 위에 제 손을 덮었다.'“아무래도 튄 것 같은데요.”'“이쪽으로 들어온 게 확실한데 말이지.”'“그만 포기하세요. 반반한 계집이야 세상에 쌔고 쌨는데…….”'“내가 지금 그깟 계집 하나 때문에 이러는 줄 알아?”'씩씩거리던 남자는 분에 못 이겨 다시 퍽퍽 발길질을 해 댔다. 그 충격으로 눈앞의 상자들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심하게 흔들렸을 때 악 소리가 그녀의 손바닥을 뚫고 터져 나올 뻔했다.'“혹시 아는 놈이었어요?”'“멍청하긴. 그럼 내가 고작 계집 하나 잡자고 그놈 배에 칼까지 쑤셔 박았는지 알아?”'“아, 아까 그러고 보니 그놈은 누구에요? 사실 손놀림이 보통은 아니다 싶긴 했는데.”'“지난번 영수하고 민철이…….”'“설마 혼자서 다섯 명을 상대했다는 그 괴물 같은 놈이 이놈이었단 말이에요?”'“젠장, 좀 더 아래를 찔렀어야 하는데.”'“흐미……. 그 괴물인 줄 알았으면 진작 튀는 건데. 다섯 명도 개박살 냈는데 우린 셋 밖에…….”'“시끄러워!”'남자는 퉷 하고 침을 뱉으며 이를 갈았다. 빠지직, 빈 깡통이 구겨지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침묵이 흘렀다.'“가자.”'구세주 같은 그 한 마디에 해주는 눈을 질끈 감았다. 살았다는 안도감이 퍼지자 저도 모르게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윽고 피 묻은 남자의 손이 천천히 그녀의 입술에서 떨어졌다. 케케묵은 곰팡이와 비릿한 피 냄새, 그리고 땀에 흠뻑 젖은 체취. 좁아터진 창고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두 사람은 동시에 후우 하고 긴 한숨을 토해 냈다.'“이……, 이봐요.”'발자국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들이 완전히 밖으로 나갔는지 확인을 해 볼 수도 없었다. 그 순간 남자의 고개가 그녀의 무릎 위로 툭 떨어졌다. 깜짝 놀란 해주는 한껏 목소리를 죽여서 남자의 몸을 흔들었다.'“괘, 괜찮아요?”'대답이 없자 심장이 털컥 내려앉았다. 괜찮을 리가 없지. 피를 꽤 많이 흘린 것 같은데. 해주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남자의 얼굴과 몸을 더욱 세게 흔들기만 했다.'“일어나 봐요. 얼른 병원…….”'“지금 나가면 들킬 거야. 잠시만…… 이러고 있자.”'축 늘어진 몸을 보니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 불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그녀는 자신에게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저 평소처럼 중간고사가 끝난 기념으로 친구들과 영화를 봤고, 입이 얼얼할 정도로 매운 냉면을 먹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었을 뿐이다. 그렇게 하루를 마감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엄마가 일찍 들어오라고 두 번이나 전화했을 때 얌전히 일어나 집에 갈 것을. '“안 돼요. 이러다 정말 큰일 난단 말이에요. 제발 정신 차리고 일어나요.”'“정신은 멀쩡해.”'“그러니까 일어나요. 일어나서 얼른 병원으로 가요.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거잖아요.”'불과 몇 십 분 전, 사람들은 도와 달라는 그녀의 외침을 듣고도 슬금슬금 도망치며 외면을 했다. 그리고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남자들의 행동은 더욱 거칠어졌다. 결국 입이 틀어 막히고 어깨와 양팔을 잡힌 채 그녀는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질질 끌려갔다. 세차게 도리질을 치자, 잠시 남자의 손이 입에서 떨어져 나갔고 해주는 그 틈을 이용해 어깨를 잡고 있는 다른 남자의 손을 죽을힘을 다해서 콱 물었다. 그러나 그때, 무리 중 한 남자의 강철 같은 단단한 주먹이 그녀의 아랫배를 사정없이 가격했다. '정말이지 태어나서 그런 지독한 통증은 처음이었다. 해주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배를 움켜잡은 채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맞은 곳이 너무 아파서 당장 죽을 것만 같았다. '“죽여 버린다.”'어렴풋이 들리는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바람을 가르는 섬뜩한 움직임 뒤로 찰나의 침묵이 흐르고, 퍽 소리와 함께 주저앉는 그녀를 일으켜 잡아끄는 손길이 느껴졌지만 제대로 된 생각이라는 걸 할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나서 한참을 그렇게 달렸던 것 같다. 이렇게 따라가는 것이 맞는지, 뿌리치고 도망을 가야 하는 것이 맞는지 도무지 판단을 할 수 없었다. 그 뒤에 벌컥,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갔고 어둠 속에서도 남자가 이끄는 대로 무작정 따랐다. 해주는 아직도 이 모든 일이 꿈만 같았다.'“왼쪽 주머니에…… 휴대전화 좀 꺼내 줘.”

미리보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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