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꾸러미 속에서 기어 나와 눈을 들었을 때 아이의 세상은 온통 붉었다. 천막이며 짐, 바닥에 쓰러져 배며 머리에서 피를 게워내고 있는 사람들이 역겨운 냄새와 함께 살을 태우고 뼈를 태웠다. '이 세상에 태어나 단 한 번도 좋은 옷, 좋은 음식 먹고 입어본 적 없는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태어난 아이는 불안에 오들거리며 떨던 마음도 잠시, 담담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얼마든지 불길이 일지 않는 방향으로 뛰어가 한 목숨 살릴 수 있었지만 아이는 희끗하게 흐려진 시선으로 멍하니 섰다.'아이는 깨달았다. 곡에단을 빠져나가도 이곳이 어디인지도 몰랐으며 아비가 어디있는지도 몰랐다. 아비를 찾는다 해도 또다시 어디론가 팔려갈 가능성이 높았다. 아이는 죽을 자리를 고르기로 했다. 늘 제 곁에 있었던 유일무이한 친구, 대금을 가슴 가득 끌어안으며 아이는 타오르는 열기에 눈을 빼앗긴 양 멍청히 앉아있었다. 모두 죽었다. 그 절망감이 가슴속 어딘가를 자극한 게 분명하다.'담담하고 무뎌 보이던 아이의 눈가에서 차오른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하지만 아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고장 난 인형처럼 서 있었다. '“넌 뭐냐?”'어디에선가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불쑥 나타나 아이를 안아들었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은 양 정지해 있던 아이의 눈에 초점이 들어왔다. 남자는 아이보다 적어도 일고여덟은 나이가 많아 보였다. 턱 밑에 파르라니 난 수염도 남자의 앳된 얼굴을 가리지는 못했다. 그나마 많이 봐줘야 일고여덟이었다.'아이는 동그랗고 맑은 눈을 들어 남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보았다. 남자는 아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 불의 벽을 넘어 훌훌 날아올랐다. 한 번도 날아보지 못한 아이는 그 순간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꼈다.'아이의 몸이 안긴 품이 든든했고 손이 감긴 목 역시 따뜻했다. 아이의 가슴이 꿀렁였다. 새처럼 하늘을 가르던 남자와 아이는 어느 순간 시커먼 복장을 한 일련의 사내들 사이에 내려앉았다. 남자는 굳은 얼굴을 하고 아이를 내려놓으려 했다.'하지만 아이는 그 굵은 목을 꼭 틀어쥐었다. 이 남자와 함께 있으면 아이는 또다시 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유라고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아이의 눈에 열망이라는 빛이 떠올랐다. '“이거 놔라.”'남자는 차갑게 말했다. 아이는 그의 목에서 손이 떨어지자 그가 입고 있는 옷을 꽉 틀어쥐었다. 고집이었다. 처음으로 겪은 자유 의지에 대한 동경이며 고집이었다. 그러다 문득 아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옷이 뜯어져 드러난 남자의 가슴 앞에 낙(烙)이란 글자가 깊은 고랑을 패고 새겨져 있었다. 남자의 얼굴이 단단히 굳어졌지만 개의치 않는 듯 아이가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 상처 위를 작은 손으로 덮었다.'“아프겠다.”'심장 위에 올려진 작은 손을 내려 보는 남자의 눈가가 미세하게 꿈틀거렸다.'“아프겠다…….”'곧 아이의 커다란 눈에 물기가 어리고 넘쳐흘렀다. 느닷없는 울음에 남자가 손으로 아이의 볼을 거칠게 훔쳤다.'“아프겠다…….”'아이는 그 말만을 읊조리며 남자의 가슴 위에 올린 손을 가만가만 문질렀다. 마치 엄마들이 자신의 아이가 다쳤을 때, 상처를 감싸고 보듬어주는 그 몸짓을 닮아 있었다. 아이가 하는 양을 가만히 보고 있던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멍청한 녀석이구나. 너도 아프겠다.”'비뚤어진 웃음을 문 남자가 아이의 머리통을 쓱쓱 문질렀다. '“나는 안 아파요. 아프지 않아요.”'“안 아프다고?”'무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아이가 처음으로 웃음을 방긋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손은 여전히 꼬물거리며 남자의 가슴을 따뜻하게 문질러 주었다.'“그래도 치료는 해야 한다.”'남자의 옆에 있던 철탑을 연상시키는 거한의 사내가 아이를 떨어뜨리려 하자 아이는 기를 쓰고 남자의 가슴팍에 철썩 붙었다. 그러자 남자가 거한의 사내에게 손을 내저었다. '“됐습니다, 부장. 제가 데려가겠습니다.”'남자는 자신의 가슴에 새겨진 글자 위에 얹힌 작은 손을 내려 보다 아이를 다시 고정시켜 안았다. '“아플 땐 아프다 해야 하는 거다.”'남자가 나직이 말하자 아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제 이름은 군명이에요. 오라버니는요?”'“무영.”'아이가 재잘거렸다.'“군명아, 하고 불러주세요.”'“…….”'“불러주세요, 네?”'아이가 조르듯 남자의 목을 두른 팔을 작게 흔들었다.'“……군명아.”'아이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단단히 잡은 무영이라는 사내의 목에서, 가슴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