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하게 휴가 준비를 하는 연희의 모습을 바라보는 이 여사의 눈이 세모꼴이었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새빨갛게 변한 연희의 눈두덩이 이 여사의 심기를 건드렸다. '‘호재 녀석이랑 무슨 일이 있는 게 틀림없어.’'호재와 연희 사이에 이상기류가 흐른다는 것쯤은 눈치로 짐작할 수 있었다. 요즘 들어 연희는 도통 호재에 관한 이야기를 입도 뻥끗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 여사가 입원했을 때에도 호재는 코빼기 한번 보이질 않았다. 뭔가 있지 않고서야 호재가 감히 그럴 순 없었다.'‘나중에 보자. 망할 녀석 같으니.’'벌겋게 부은 눈에 차갑게 식한 수저 두 개를 대고 있는 연희의 모습을 보는 이 여사의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갔다. '‘아이고, 답답해.’'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눈이 저 지경이 되었는지 답답할 따름이었지만 이 여사는 묻지 못했다. 젊은 남녀 사이의 일은 그냥 모르는 척 하는 것이 제일 좋다는 것을 알기에 오늘도 이 여사는 벙어리 냉가슴 앓듯 그녀는 끙끙거려야만 했다. '“엄마 출근 안 해?”'자신의 침대 끝에 앉아 팔짱을 끼고 노려보는 이 여사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기에 연희는 그녀의 눈치를 보고 있는 중이다.'“나이 서른이 넘어가지고 아직까지도 친구들이랑 휴가를 가냐?”'속으로 뜨끔해 연희는 일부러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엄마는 말을 해도.”'“뭐가? 호재는 뭐해? 호재랑 가야지. 왜 수경이랑 간다고 그래?”'“우리 둘이 스케줄이 안 맞아서 그런 거라니까. 몇 번을 말해.”'연희는 이 여사의 시선을 피하며 가방을 챙겼다. 아직은 이 여사에게 호재와 헤어졌다는 것을 숨기고 싶었다. 언제까지 숨길 순 없는 일이었지만. '“휴가 스케줄 하나 딱딱 못 맞추고 뭐 하니? 너희들은.”'“과가 다르잖아.”'“작년에도 너희 셋이 괌에 갔다 왔잖아. 작년도 그렇고 올해도 그렇고. 어떻게 된 애가 일도 못 치냐? 다른 애들은 혼수로 아이까지 장만해 간다는데.”'“어떻게 요즘은 엄마들이 더 개방적이야?”'“개방은 무슨. 뒷구멍으로 호박씨 까는 거 다 알아. 그러니까 빨리 일이나 쳐서 날이나 잡아. 네 나이가 몇 살이니? 더 나이 들면 화장도 안 먹어. 호재야 남자니까 그렇다 치지만 너는 다르잖아.”'요즘 들어 이 여사를 보는 사람마다 연희 언제 시집가냐고, 다들 한마디씩 해서 그녀도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요즘 나도 바쁘고 호재 씨도 바빠. 결혼 생각할 틈 없어.”'“바빠다고 결혼 못하냐?”'연희는 크게 숨을 들이켜고 이 여사의 어깨를 잡았다.'“엄마, 제발 여기까지.”'“지랄하네.”'이 여사는 연희의 머리통을 콩 쥐어박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자식은 이래서 애물단지라고 하는 거야. 하라는 결혼은 안 하고.”'“엄마!”'연희가 바락 소리를 질렀지만 이 여사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괜히 이것저것 재지 마. 호재만한 남자 없다. 학벌 좋고 직장 좋고. 인물은 오죽 잘났어? 돈이야 둘이 벌면 되는 거지. 괜히 딴 생각하지 말고 빨리 날이나 잡자고 해. 나도 모아 둔 돈 한 삼천 정도 되고 너도 그동안 저축한 돈 꽤 된다. 전셋집은 꼭 남자만 얻으라는 법 없으니까 그냥 네가 얻는다고 해. 혹시 그것 때문에 망설이는 거면.”'솔직히 당장이라도 쥐뿔도 없는 호재랑 헤어지라고 호통을 치고 싶었지만 이 여사는 호재를 두둔할 수밖에 없었다. 스물아홉만 되었어도 당장 헤어지라고 했을 것이다. 요즘 세상에 서른이 뭐 어떠냐고들 하지만 여자 나이 서른한 살은 남자 나이 서른한 살과는 많이 다르다. 남들은 고리타분하다고 말을 할지 몰라도 이 여사는 그렇게 생각했다. 비록 남들에게는 요즘에 서른은 흉도 아니라고 했지만 해가 갈수록 이 여사의 속은 바싹바싹 타들어갔다. 남자가 없는 것도 아닌데, 답답하기만 했다. '‘에휴, 마음에 딱 드는 사윗감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이 여사는 아쉬운 마음을 애써 감추며 연희의 방을 나섰다.'“엄마, 너무 늦었어요.”'방문이 닫히자 연희는 웅얼거리며 침대에 주저앉았다.'-사랑했다. 그리고 지금도 사랑한다. 미안해.'그것으로 충분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호재의 말을 듣는 순간 연희는 그를 마음에서 떠나보낼 수 있었다. 더 이상 그를 의식하지 않고 석현만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눈물을 신의 축복이라고 누가 말 했던가? 이상하게도 밤새 펑펑 우니 속이 후련했고 호재에게 남아 있던 미련이 사라졌다. 눈물을 통해 미움과 애착과 질투 같은 것이 다 씻겨 내려간 듯했다.'“이젠 정신 차리고 살자!”'연희는 손바닥으로 양 볼을 때리며 고개를 저었다. 연희는 방긋 웃으며 속옷을 넣어 둔 서랍을 열었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어젯밤에 짐을 다 꾸렸어야 했는데 우는 바람에 짐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연희는 아침부터 부산하게 움직여야만 했다.'“에휴휴휴.”'어제 백화점에서 속옷을 샀어야만 했다. 아무리 이것저것 살펴보아도 괜찮은 것이 별로 없었다.'“이건 온천 갔을 때 입었던 건데. 기억하려나?”'연희는 거금을 주고 산 속옷을 먼저 챙기고 열심히 속옷 서랍을 뒤졌다. 개중 쓸 만한 몇 개를 담았지만 그녀의 마음에 쏙 드는 것은 없었다. '“가서 사지 뭐.”'대천에도 백화점은 있겠지 하는 심정으로 연희는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다녀오겠습니다.”'작은 새처럼 지저귀며 연희가 아파트를 나오자 석현이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연희는 경비실을 흘깃 보고는 석현의 차 문을 열었다.'“오래 기다렸어요?”'“응.”'석현이 연희의 안전벨트를 매주며 가볍게 그녀의 볼에 키스를 했다. '“사람들이 봐요.”'살짝 눈을 흘기는 연희를 보는 석현의 입가엔 미소가 가득했다. '“오래 기다린 값은 해야지.”'“몇 시에 왔는데요?”'약속 시간에서 한 십 분 정도 늦었는데……하며 연희는 의아한 눈길을 석현에게 보냈다.'“십 분이 일 년 같더라.”'낯간지러운 말도 잘도 하는 석현이다.'“뭐야? 간지럽게.”'석현을 구박하는 연희의 눈이 기쁨으로 반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