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현이 연희를 처음 보았을 때 그녀는 허겁지겁 횡단보도를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신호등의 파란 불빛이 숨 가쁘게 깜박이고 있을 때였다. 8차선이 넘는 도로를 하이힐을 신고 뛰어가는 그녀의 모습은 길이 잘 든 가죽 시트에 등을 기대고 있는 석현의 시선을 단박에 잡아끌었다. 이제 곧 빨간 불로 변하니 건너지 마시오, 라고 신호등이 신호를 보내도 그것을 무시하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아 그리 특별할 것 없는 광경이었지만 그녀는 석현의 시선뿐 아니라 현 이사의 시선도 잡아끌었다. '“저런.”'현 이사가 혀를 찼고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운전기사도 안타까운 시선을 그녀에게 보냈다. 아마도 다른 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8차선 중간에 있는 버스 정류장과 인도(人道)의 중앙에 머리에 붉은 보자기를 이고 양손도 보자기를 든 노파에게 다가간 그녀는 노파의 손에서 보자기를 받아들었다.'“저런저런.”'현 이사가 혀를 차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석현의 관심도 집중되었다. 어느새 신호등의 불빛은 붉게 변했지만 노파와 그녀의 발걸음은 그리 빨라지지 않았다.'“어허.”'노파와 그녀가 두 차선을 앞두고 있을 때에 은빛 자동차가 쌩 하고 내달리자 횡단보도에 서 있던 차들이 망설이듯 조금씩 앞으로 나왔다. 꽤 위험천만한 상황이었지만 연희는 침착하게 분홍 보자기를 든 손을 옆으로 쭉 뻗어 차들을 제지시켰다. '남색 치마에 연회색 블라우스를 입은, 하늘을 찌를 듯 높은 마천루를 자랑하는 빌딩에 무수히 많이 있을 것만 같은 여자의 모습이었지만 당당하게 차들을 제지시키는 모습이 석현에게는 잔다르크처럼 느껴졌다. 미국이었다면 당연히 차를 출발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적어도 석현이 기억하고 있는 한국은 말이다.'노파와 연희가 차도를 거의 다 건널 때에 운전기사는 가속기를 밟았다. 석현은 고개를 돌려 허리를 구부리고 노파에게 말을 거는 연희의 옆모습을 보았다. 귀밑에서 찰랑거리는 검은 머리칼이 흔들릴 때 석양이 하얀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지적이면서도 품위 있어 보이는 얼굴은 분명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어딘지 친근하게 느껴졌다. '‘어디서 봤을까?’'속으로 말했지만 석현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여자라는 것을. 그러면서도 석현은 그녀를 기억에서 떠올리려는 듯 미간을 좁히고 점점 멀어지는 노파와 연희를 응시했다. 전체를 한 번에 빠른 속도로 훑는 시선이었지만 여자의 몸매역시 얼굴에 맞춘 듯 유려하고 늘씬하다는 것을 단박에 파악했다.'“뭘 그렇게 보나?”'그제야 석현은 이미 그의 시야에서 사라진 연희에게 시선을 뗐다.'“아직도 한국이 살만한 나라구나, 그런 생각이 드네요.”'“그것 이제 알았단 말이야?”'현 이사가 주먹으로 장난을 치듯 석현의 팔뚝을 툭 건드렸다.'“네.”'쓰게 웃으며 대답하는 석현의 옆얼굴에 그림자가 가득했다. '“한국만한 곳이 없다. 세상 여기저기 돌아봐도.”'석현을 강제로 한국에 들어오게 한 것은 현 이사였다. 석현의 모친이 오 여사의 부탁이 아니었더라도 현 이사는 석현을 데리고 왔을 것이다. '“여자도 한국 여자만한 여자 없고. 안 그래?”'한국 여자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오 여사의 푸념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라는 것을 석현도 안다. 하지만 석현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한국 여자나 외국 여자나 여자는 다 마찬가지였다. 이기적이고 자기 합리화에 강한 족속이라는 것을. 사랑이란 이름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쟁취한다.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으면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아, 단순하게 합리화하며 공격하기 일쑤다.'“노인네 짐 들어 준 아가씨 봐. 어느 나라 여자가 그렇게 행동하겠어?”'현 이사의 말에 보자기를 들고 차들을 제지시켰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자 가슴 한편이 따뜻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