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혜주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거리를 걸어서 면접을 보러 가는 길이었다. 이제는 누군가의 아내가 아닌 5년 전의 정 혜주로 다시 돌아 와 버린 것이었다. 아이를 갖지 못한 혜주는 결국은 5년의 결혼 생활을 접어야 했다. 고달프기만 했던 결혼 생활과 안녕을 고하는 것이 쉽지는 않은 일이었지만 더 이상 버텨 낼 힘이 남아 있지 않은 혜주였다. 어쩌면 그렇게 외롭고 힘들었던 5년 전의 혜주가 더 행복한 혜주였을지도 몰랐다. 비록 이제는 먹고 사는 걱정과 앞으로 자신에게 닥칠 일들을 모두 혼자만이 책임질 수 있어야 했지만 그래도 오히려 지금의 생활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이제 홀로서기의 첫 발을 내 딛는 혜주는 그나마 예전의 경험으로 베이비시터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몇 군데의 보육시설에서는 혜주의 이혼경력이 마음에 걸렸는지 일자리를 주지 않았지만 어쩌면 베이비시터일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지 몰랐다. 혜주는 신문을 뒤적이다 눈에 띤 한곳에 전화를 걸어 면접약속을 잡고 집을 나왔다. 숙식제공에 급여도 제법 많은 베이비시터 자리라 경쟁이 셀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 혜주에게는 그 자리가 너무나 절실히 필요했다. 나름 능력이 있던 남편은 혜주와 이혼을 하면서 위자료를 챙겨 주기는 했지만 그 위자료는 터무니없는 금액이었다. 그 돈으로는 단칸방을 얻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혜주는 두말하지 않고 그 돈만을 받았다. 혜주는 그 돈과 달랑 옷가방 두개를 들고 시집을 나와 빠듯하게 살고 있는 언니인 혜정의 집으로 향했다. 겨우 방 두개 달린 집에서 셋방살이를 하고 있는 혜정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혜주가 갈 곳은 그곳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넉넉하지 못한 언니의 집에서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런 혜주에게는 일자리가 절실히 필요했고 혜주는 하루도 쉬지 않고 일자리를 알아보고 다녔다. 그러다가 신문에서 보게 된 숙식제공이란 말에 전화를 걸고 이력서를 써서 집을 나선 것이었다. 언니인 혜정은 급하게 서두를 것 없다고 했지만 벌써 몇 달째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혜주는 마음이 급하기만 했다. 언니부부와 두 쌍둥이 조카가 살기에도 비좁기만 한 집에 자신마저 신세를 진다는 것이 너무나 마음을 무겁게 했다. 그런 혜주가 베이비시터란 직업을 선택한 것은 결혼 전 교육을 받고 보육시설에서 영아를 돌봤던 경험과 두 쌍둥이 조카를 키운 경험으로 고른 직업이었다. 솔직히 면접을 보러 가면서도 자신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맡겨만 준다면 아주 잘 키울 자신은 있었지만 한 번도 아이를 낳아 본 적이 없는 혜주에게 과연 아이를 맡겨 줄 것인지는 순전히 면접을 보는 아이의 부모들의 선택이었다. 혜주는 어느 한 동네에 발걸음이 멈췄다. 그리고 가방에서 작은 메모지를 꺼내서 살폈다. 분명 여기 어딘가가 그 집이 분명한데 하는 생각에 혜주는 몇몇 집을 기웃 거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집을 찾아냈다. 혜주는 집의 외관을 보자 입이 쩍 벌어졌다. 너무나 크게 보이는 집의 외관의 모습 때문이었다.'‘도대체 이런 집에는 어떤 사람들이 사는 건지. 식구가 엄청 많은 가보네.’'혜주는 혼자서 중얼 거리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자신도 이렇게 큰집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나 넒은 집에서 사모님 소리를 들으며 살았었다. 하지만 그건 순전히 남편의 존재가 있을 때였다. 지금의 혜주는 그저 이 큰 저택의 모습에 위압감마저 느끼는 그런 평범한 여자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자신이 더 편안한 것은 마치 맞지 않은 옷을 걸치고 있다가 벗어 던진 것과도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결국은 그 자리가 자신의 자리가 아니었다는 말 이었다. 혜주는 초인종을 누르기 전에 맑은 공기를 한가득 가슴속에 담았다. 그리고 초인종을 눌렀다.''딩동딩동'왜 이 초인종 소리마저 위압감이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누구세요?”'“네, 아침에 면접 약속을 한 정 혜주라는 사람인데요.”'인터폰을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에 혜주는 대답을 했다. 혜주의 대답을 듣자 덜컥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혜주는 조심스럽게 대문 안으로 발을 내 디뎠다. 그리고 천천히 돌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하나씩 오르자 넓게 펼쳐진 정원의 모습이 보였다. 깔끔하면서도 정갈하게 잘 정리가 되어 있는 정원의 모습을 보자 주인의 성격이 무척이나 꼼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 혜주였다. 꽃이 핀 정원에는 꽃잎을 볼 수가 없었고 그런 정원의 모습은 마치 금방 정원을 정리한 듯 했다. 하지만 왠지 정감이 가지 않는 것은 부자연스러움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일 때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혜주에게는 초록이 물들어 있는 정원의 모습에도 너무나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는 이 정원은 삭막하게만 느껴지고 있었다. 자연스럽지 못함. 이집의 정원은 자연스럽지 못함 그 자체였다. 혜주는 정원을 지나자 현관문을 열고 나온 중년의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의 엄마라기에는 나이가 좀 들어 보였다. 하지만 요즘은 늦둥이가 유행이지 않던가. 혜주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여자에게 공손히 인사를 했다.'“안녕하세요. 정혜주라고 합니다.”'“들어오세요. 회장님이 기다리십니다.”'혜주는 무안하게 인사도 받아 주지 않고 쌩한 분위기의 여자가 이 집의 주인이 아니란 것을 이제 깨달았다. 회장이라는 말에 여러 가지 추측이 들기는 했지만 그런 추측은 지금은 접어 놔야 했다. 주희는 현관에 들어서자 헉 소리가 나올 지경이었다. 집의 크기와 정원을 봐서 알긴 했지만 이 집의 주인은 아마도 굉장한 부자이거나 복권에라도 당첨이 된 사림이 분명한 듯 했다. 어떻게 이렇게 고급스러운 분위기로 집안을 꾸며 놓았을까 하는 생각이 혜주를 주눅 들게 하고 있었다. 앤티크한 분위기의 거실은 마치 모델하우스나 드라마의 재벌가의 집을 보는 듯 했다. 혜주는 조심스럽게 신발을 벗고 거실의 실내화로 갈아 신고 거실로 들어섰다. 거실에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한 노부인이 혜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혜주가 면접을 봐야할 사람은 저 노부인인 모양이었다. 혜주는 노부인의 앞에 얌전히 두 손을 모으고 서서 인사를 했다.'“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정혜주라고 합니다. 아침에 전화로 면접을 약속한 사람입니다.”'혜주는 가까이서 보는 자신의 앞에 노부인이 그렇게 나이가 들어 보이지는 않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왠지 어딘가가 불편해 보이는 여자가 솔직히 살짝은 신경이 쓰였다.'“앉아요. 아줌마 여기 차 좀 부탁해.”'혜주는 그제야 자신에게 문을 열어준 여자가 이집의 가정부인 것을 알았다. 그래서 혜주의 공손한 인사를 받지 않았나 싶은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인사를 그렇게 무안하게 무시한 여자가 왠지 얄미웠다. 혜주는 회장이라는 여자가 권한 자리에 앉았다. '“난 그냥 회장님이라고 부르면 되요. 그리고 혜주 씨라고 부르면 되나?”'“네? 네 편하시게 불러주세요.”'“그래요. 그럼 혜주 씨라고 부를게요.”'“네.”'박 회장은 혜주란 여자가 이렇게 어린 여자일 줄은 몰랐다. 전화로 베이비시터 자리를 원한다고 했을 때 그래도 나이가 좀 있을 거라고 예상을 했지만 그 예상은 빗나가 버렸다. 박 회장은 그런 혜주를 유심히 훑어 봤다.'“차 드리겠습니다.”'“응, 그래요.”'가정부가 쟁반에서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향긋한 향이 나는 차향이 혜주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있었다. 혜주는 찻잔을 든 박 회장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자신도 찻잔을 들었다. 그런 혜주의 모습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고 있는 박 회장이었다.'“나이가 어떻게 되나?”'“아, 죄송합니다. 이력서를 먼저 드려야 했는데.”'혜주는 급하게 가방에서 이력서를 꺼내서 박 회장에게 내밀었다. 이력서를 받아든 박 회장은 안경을 찾아서 쓰고는 찬찬히 그리고 꼼꼼히 이력서를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혜주는 박 회장이 이력서를 읽어 내려갈 동안 차향에 흠뻑 취했다.'“나이가 서른이나 되었나?”'“네. 올해 서른입니다.”'혜주는 들고 있던 찻잔을 으며 대답을 했다. 자신도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나 싶었다.'“그렇게 안보이던데. 난 혜주 씨가 많아야 이십대 후반이라고 생각이 들었거든요.”'“감사합니다.”'“나이가 서른이면 시집을 가야 할 나이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