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야…….”'“…….”'“최지우! 민이 엄마!”'“…….”'이젤 앞에 앉은 그녀가 대답이 없었다. 어젯밤 끝없이 내리던 폭우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던 그녀 때문에 그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지난 8년 동안 늘 여름만 되면 그녀가 힘들어 하는 것을 고스란히 곁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다른 계절과 달리 여름에는 그녀가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어 했다. 특히 어제처럼 그렇게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는 등에 쇠꼬챙이를 빼달라며 울고 매달리는 그녀 때문에 동희의 가슴이 무너질 것 같았다. 아무리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고 아껴도 그녀의 등에 남아 있는 상처가 없어지지 않는 한 그녀는 그날의 기억들을 잊지 못할지도 모른다.'고통을 호소하며 울부짖는 그녀를 품에 안고 그날 보고 겪었어야 했던 고통의 시간들을 반복하는 것 외엔 해 줄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기억을 지워 줄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이 그녀가 지쳐 잠이 들고 난 후에도 그를 잠들지 못하게 했다. '그렇게 꼬박 날 밤을 새우고 나니 동이 터 오기 시작하면서 구름이 걷히고 환한 빛이 세상을 다시 비추기 시작하자 그녀는 지난밤의 고통은 잊어버린 것처럼 밝은 얼굴로 그를 맞았다. 한바탕 폭우가 휩쓸고 간 세상은 완전히 깨끗해지고 새로웠다. 마치 새날이 밝아오는 것처럼 그렇게 모든 것이 달라진 것처럼 보였다.'“참 이상하죠?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고 나면 모든 것이 새로 시작하는 것 같아 보이죠? 사람들도 그럴까요? 폭우처럼 한바탕 아픔이 덮쳐오고 난 후 고통스러운 시간이 지나가고 나면 또다시 새로운 날이 찾아오는 것처럼 그렇게 모든 것을 잊고 살아갈 수 있을 까요?”'“글쎄…… 눈에 보이는 것과 다르지 않을까? 폭우로 인한 흔적은 무서울 정도로 깊이 패여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메워지지 않을지도 모르지…….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폭우로 아픔을 겪은 사람은 절대 그 폭우로 잃어버린 것들을 잊지 못하는 것처럼…….”'“그럴까요? 좀 무섭군요. 영원히 아픔으로 기억되는 상처라니…….”'“그래도 난 그런 상처를 안고 살아가더라도 폭우가 내리기 전의 환한 햇빛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그렇겠죠? 아픔도 있겠지만 기쁨도 있었겠죠? 그래서 험한 폭우의 존재를 잊고 다시 살아가는 거겠죠?”'“응. 오늘은 정말 날씨가 좋을 것 같지 않아? 햇살이 참 강할 것 같아.”'“예. 폭우의 흔적을 덮어야 하니까요.”'“덕분에 오늘 하루 꽤나 무더울 것 같은데, 당신은 뭐할 거야?”'“난, 마무리 작업해야 해요.”'“그래? 그럼 나도 오늘은 병원이나 지키고 있을까? 당신 작업하는 데 방해되지 않게?”'“그럼 좋죠.”'“좀 섭섭해. 그렇게 말하면 좋아? 이건 매일 나만 혼자 해바라기도 아니고…….”'“그래서 억울해요? 그럼 다른 사람 찾아보세요.”'“또, 그 소리 한번만 더 해봐. 내가 그냥…….”'“농담이에요. 농담. 내가 당신을 절대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것 알죠? 그러니 섭섭해 하지 말고 열심히 환자나 보러 가세요.”'“알았어.”'“치프.”'“응?”'“난 당신에게 폭우가 아닌 이슬비이고 싶어요. 왈칵왈칵 갑자기 쏟아져서 온 세상을 적시고는 여기저기 상처투성이로 만들고 떠나는 폭우가 아닌, 소리 없이 내려서 어느새 흥건히 젖어드는 그런 이슬비처럼 오랫동안 조용히 당신 곁에 머물고 싶어요. 그런데 이미 난 당신에겐 폭우겠죠? 치프, 그렇지만 나 떠나고 난 후에는 내가 남긴 상처 따위는 잊어버리고 새롭게 살아요. 부탁할게요.”'“그런 말 하지도 마. 떠난다는 말은 입에도 담지 마. 한번만 더 그런 소리 하면 내가 용서하지 않을 거야.”'“알았어요. 환자들 기다릴 텐데 어서 가 봐요.”'“……바보. 내게 지우는 영원한 폭우야. 절대 끝나지 않는 끝없이 왈칵왈칵 쏟아져 내려서 나조차 흔적 없이 사라지게 하는 그런 폭우……. 이미 난 네게 쓸려 내려가서 더 이상 혼자서는 살아갈 수조차 없는 그런 폭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