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독 난이며 나무, 풀과 같은 자연에 애착이 많은 노인의 고풍스러운 한옥 앞마당에는 잔디가 무성했다. 가을의 초입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기분 좋게 뜰 안을 휘저었고 구름이 낮게 깔린 하늘은 남빛과 주홍이 뒤섞여 하루의 끝을 예고했다.'어둑어둑한 내실, 창가에 서서 서서히 저물기 시작한 하늘을 올려다보던 커다란 체구의 노인이 오랜 침묵을 깨고 천천히 돌아섰다.'“그래서 어떤 말을 하고 싶은 게냐?”'바깥으로부터 비어져 들어오는 짙은 황혼처럼 강렬한 노인의 안광이 내실의 한 곳을 향해 매섭게 내리꽂혔다.'“이 자리에 앉고 싶지 않다?”'노인, 이장훈 회장은 마치 호랑이가 먹이를 노릴 때 자세를 낮추고 기척을 지우는 것처럼 은근하게 말했다. 하지만 부리부리한 호목(虎目)에 감도는 날카로운 기세는 미처 감추지 못했다.'“대답하지 못해!”'상대로부터 대답이 없자 이 회장은 책상 위를 거칠게 내리쳤다. 먹이를 향해 달려들어 목덜미를 잡아채는 산짐승의 광포함이 언뜻 내비춰졌다.'“이찬주!”'내내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담담히 앉아 있던 찬주는 고개를 들어 이 회장을 직시했다. 그녀의 곧게 편 등과 높게 치켜든 턱, 살짝 내리깐 눈꺼풀은 함부로 고개 숙일 것 같지 않은 기개와 당당함을 갖고 있었다.'“할아버지께서는 제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어요.”'찬주의 고운 다홍빛 입술이 열리자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말을 잇는 그녀의 다갈색 눈동자는 무척이나 건조해서 마치 흙먼지가 이는 황무지를 연상시켰다.'“제가 이곳에 온 열네 살 이후 줄곧, 제게 전부를 주셨어요.”'“선문답이나 하자는 것이 아니다!”'서두가 길어지자 이 회장은 미간에 내 천(川)자를 그리며 얼굴을 험상궂게 일그러뜨렸다.'“늘 할아버지 눈에 차는 손녀가 되기 위해 원하시는 대로 해 왔어요. 웃지 말라면 웃지 않았고 울지 말라면 울지 않았어요. 친구도 할아버지 마음에 드는 아이들로 골라 사귀었고 대학도 원하시는 대학, 원하시는 과를 졸업했어요.”'이 회장은 자신의 손녀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러나 냉랭하게 가라앉은 찬주의 눈에서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내 자리를 잇지 않겠다는 건 날 배반하는 행위다. 이날 이때까지 너를 입혀주고 먹여주고 키워 줬는데, 고작 이런 식으로 내게서 등을 돌리겠다는 게냐?”'“상대가 하나를 원하면 둘을 받아내야 한다고 말씀하신 건 할아버지세요.”'목소리의 고저가 불규칙한 이 회장과는 달리 차분한 찬주의 음성이 살얼음판 같은 침묵의 시작을 알렸다. 빤히 그녀를 직시하던 이 회장의 입매가 문득 비틀리며 비릿한 조소가 떠올랐다.'“원하는 게 있는 게로구나?”'“네.”'“둘이냐?”'“네.”'그가 가르친 것을 그대로 답습하는 손녀의 모습에 이 회장은 회가 동했다. 그는 흥분을 가라앉히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느긋이 기대고는 눈앞에 정갈하게 앉은 찬주를 바라보았다. 어렸을 때부터 그의 손에서 자라온 녀석이다. 걷는 법, 말하는 법, 생각하는 법, 식습관까지도 모두 그가 가르쳤다.'그리고 찬주는 단 한 번도 그를 실망시킨 법이 없었다. 찬주는 스펀지 같았다. 무엇이든 그가 원하는 것을 습득하고 빨아들여 제 것으로 만들었다. 가당찮은 여자 문제로 늘 일만 치고 다니던 아들, 성균에게서 나온 씨치고는 제법이었다. 영특한 머리하며 차가운 성정은 찬주가 사내 녀석이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마저 일축시켰다.'“그러고 보니, 너는 그날 이후 내게 무언가를 요구한 적이 한 번도 없구나.”'찬주는 대답하기에 앞서 잠시 시선을 내려 탁자를 응시했다. 그녀가 하려는 말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을뿐더러, 더러운 오명을 겹겹이 덧써야 하는 일이었다.'“뭐냐.”'단정하게 하나로 모아 묶은 머리 아래, 밀랍처럼 하얗게 죽어 있던 찬주의 얼굴이 이 회장을 향했다.'“결혼하고 싶습니다.”'“……결혼? 상대는?”'찬주는 흔들리는 마음을 애써 다잡으며 입술을 벌렸다.'“……민희재 씨입니다.”'“민희재? 민희재라……. 내가 아는 인사인가?”'찬주는 그녀를 살피며 말꼬리를 흐리는 이 회장을 서늘하게 응시했다. 바짝 굳힌 얼굴은 폐부를 샅샅이 꿰뚫어 보는 이 회장의 눈초리로부터 그녀를 안전하게 지켜냈다. 하지만 딱딱한 가면 아래 풍랑을 만난 듯 술렁이는 마음은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은 위를 메슥거리게 만들었다.'“뭐, 그보다 나는 네가 왜 갑자기 결혼을 생각했는지가 더 궁금하구나.” '찬주는 어째서 그녀가 조선한복 경영권 자리를 놓고 이 회장과 거래 아닌 거래를 하게 되었는지를 차분히 떠올렸다. 모두 그 때문이었다. 민희재……. '“혹여 결혼이라는 관습에 대해 환상이라도 갖고 있는 게냐?”'이 회장은 상대가 누가 됐든, 찬주가 언급한 결혼이라는 말에 더 흥미가 일었다. '“민희재 씨는 정예원과 이 년 전에 약혼한 사람이에요. 박 선생님 아드님이기도 하죠.”'순간, 이 회장의 눈이 매의 그것처럼 날카로워졌다. 읍, 면 단위로 알음알음 팔던 것에 지나지 않았던 한복 공방을 전국구의 거대 사업체로 키워 낸 그다. 본능에 가까운 예리한 감각이 바짝 곤두섰다.'“남의 것을 탐하다니, 너답지 않구나. 배가 다르다 해도 예원이는 네 언니지 않느냐?”'“한 번도 언니라 생각한 적 없습니다.”'이 회장은 찬주의 제안을 곰곰이 되새겨 보았다. 이복 언니의 약혼자와 결혼을 하겠다는 것은 그가 늘 고집하는 윤리에 어긋난, 깔끔하지 못한 관계였다. 지나치리만치 결벽이 심한 그의 성향은 주변 환경 뿐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서슴없이 발휘되었다. 쓸 만한 패라 여겨지면 쥐고 필요 없어지면 버린다. 또한 속이 시커멓게 썩은 자는 용인하여도 등을 돌린 자는 다시 보지 않는다.'게다가 양 집안에서는 희재와 찬주의 이복 언니인 예원의 결혼 이야기가 슬슬 오가려는 참이었다. 그것을 찬주에게 알린 지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민희재와 결혼을 하겠다는 찬주의 심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그러나 한편으로는 찬주가 누구의 것을 탐냈건 간에 집안의 기둥뿌리를 축내기만 하는 그 버러지 같은 모녀의 허를 찌르겠다는 생각은 그를 무척이나 흡족하게 했다. 유쾌함에 가까운 감정이 가슴을 시원하게 뚫고 지나갔다.'“그 사람과 결혼해 독립하겠습니다. 이것이 제 두 번째 제안입니다, 할아버지.”'“쉬이 그러라고 말할 수는 없겠구나. ……이유가 뭐냐.”'“정예원은 호적에 올라 있지 않으니 파혼을 해도 별 문제는 되지 않을 거예요.”'“그래도 아는 사람들은 안다. 예원이가 네 아비 피를 받았다는 것을.”'“아는 사람은 극소수일 뿐입니다. 큰 지장은 없어요. 그리고 그 사람이 대단한 힘을 가진 것도 아니니 이슈 될 일도 없고요.”'이 회장은 찬주를 집요하게 응시했다. 찬주의 결혼을 수락한다면 며칠 동안 그의 귀에 대고 팔자니 인생이 어떠니 한탄할 정가 계집의 까랑까랑한 목소리를 감당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겠지만 언제나처럼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먼저 보낸 아들, 성균의 유언만 아니었다면 그는 정가 모녀를 곧바로 집에서 내보냈을 것이었다. 그들은 아들의 부끄러운 짓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였고 이 집안의 치부였다.'“제 제안을 받아들여 주셔야만, 할아버지의 뒤를 잇겠습니다.”'이 회장은 미간을 좁혔다. 그 역시 쉬이 대답할 수 없었다. 그의 신경 어딘가를 찝찝하게 긁어오는 이 불쾌함의 이유는 알아야 했다. 왜 찬주가 그녀 앞에 놓인 좋은 자리를 마다하면서까지 민희재를 선택하려 하는지, 그것이 중요했다.'“설마 그치에게 어리석은 감정이라도 품은 것이냐?”'찬주는 시선을 내리 깔았다. 가슴 밑이 묵직해졌다. 차마 입 밖으로 소리 내 말할 수는 없었지만 이유야 명백했다. 민희재, 그 남자 때문이었다. 그를 마음에 담은 것을 만약 이 회장이 알게 된다면 그녀가 민희재와 엮일 일은 죽는 날까지 없으리라. 그녀는 그를 가질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갖고 싶으니까요. 이유가 따로 필요한가요?”'“나는, 이유가 필요하다. 내가 납득할 만한.”'이 회장의 굵은 눈썹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동양인 치고 확연한 금빛이 도는 고동색의 눈동자는 횃불처럼 활활 타오르는 눈을 가진 호랑이를 떠올리게 했다. 은연중 풍겨 나오는 위압적인 기운이 그녀를 갑갑하게 짓눌렀다. 바짝 말라 버린 입 안이 텁텁했다.'“……정예원이 그 남자를 가졌으니까요. 그 사람 어머니, 박 선생님은 회사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어요. 조선한복 일 년 수입 중 10%의 매출을 혼자 벌고 있다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니까요. 그것을 정지인 씨가 모를 리 없죠. 그래서 할아버지 손을 빌어 민희재 씨와 약혼을 진행했을 테고요. 적어도 그 사람과 정예원이 결혼한다면, 박 선생님이 살아 계신 한 그 모녀가 이 집에서 쫓겨날 걱정은 없겠죠. 어쩌면 다른 생각을 품을 수도 있고요. 그러니 제가 가져야겠어요. 조선한복의 후계자 자리를 떠나서 저는 더 이상 그 암캐 같은 여자의 손에 놀아나고 싶지 않습니다. 할아버지도 그러실 거라 믿어요.”'“……좋다, 나가 봐라. 후에 부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