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지 말고, 시키는 대로 말 잘 듣고 있어. 아빠가 금세 돈 벌어서 너 데리러 올 거야.”'‘안 믿어.’'마음속의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사유는 물끄러미 아버지의 눈을 쳐다보았다.'사유의 눈에 비친 추레하고 비겁한 모습의 늙은 남자가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딸의 입에서 단 한 번이라도, 대답 같은 게 나오길 기다리면서. 그러나 사유는 입을 열지 않았다.'사유의 어깨를 잡는 늙은 남자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알코올중독. 수전증. 간경화 말기. 등등의 어휘가 어린 사유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 늙은 남자가 가끔 쓰러져서 인사불성이 되어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갈 때면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짠 듯이 같은 말을 반복했던 것이다. 이렇다 할 교육이란 것을 전혀 받아 본 적이 없는 일곱 살짜리 꼬마가 이해하기엔 그저 거창한 말이었다.'사유는 그것을 그저, 술병(病)이라고 이해했다. 이 남자가 쥐어준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 몇 장을 쥐고 근처 구멍가게에 가서 소주를 달라고 말할 때마다 주인아주머니는 쯧쯧 혀를 차면서 “그놈의 인간, 뭐 좋은 거라고 징허게도 처마시네. 그러다 술병으로 어느 날 저세상 가지.” 하고 말하곤 했다. 술병이 무어냐고 어느 날인가 물었더니 아주머니는 사유를 짠한 듯 쳐다보다가 “먹는 것 없이 매일 술만 처먹는 인간들이 술에 몸이 썩어서 나는 병”이라고 했다.'그 말은 사유도 이해할 수 있었다. 늙은 남자는 매일같이 술을 마셨고, 몸에서는 썩은 내가 났으니까.'그래서 그런 늙은 남자를 버리고 사유의 엄마도 멀리 가 버린 것이다. 늙은 남자가 여자를 사오면서 치렀던 돈 대신 덜렁 사유 하나만 남겨두고, 멀리멀리 도망가 버렸다.'늙은 남자는 때문에 사유를 팔백만 원짜리라고 불렀다. 귀에 못이 박이도록, 거듭거듭 말해 주었다. '‘야, 이년아. 너는 팔백만 원짜리다. 팔백만 원짜리야. 언제 커서 그걸 갚을 거냐? 씨팔, 염병할 세상. 이 핏덩이를 어디 팔아서 팔백만 원을 도로 받아? 씨발, 이놈의 좆같은 신세 지지리 복도 없지. 씨발, 씨발!’'그 남자가 지금 희희낙락거리면서 사유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난생처음으로 입가에 미소 비슷한 것을 짓고 있다. 그러면서 말한다. 돈을 벌어 찾으러 오겠다고.'‘안 믿어. 안 믿어. 그러니까 그만 하고 어서 가서 술이나 마셔.’'무언중에 눈으로 그렇게 사유가 말했다. 늙은 남자는 그녀를 한 번 안아 주기까지 했다. 오소소, 온몸에 두드러기처럼 소름이 돋았다. 사유의 두 주먹에 꽉 힘이 들어가면서 뼈마디가 살을 찢고 나올 듯 두드러졌다.'늙은 남자가 팔을 풀어 주었다. 일어나면서 그녀의 머리를 두드려 주고는 다시 말했다.'“말 잘 들어야 해. 그래야 따스운 밥 얻어먹고 산다.”'남자가 마침내 등을 돌리고 멀어져갔다. 가건 말건 상관없는데도 사유의 눈은 늙은 남자의 등에 못 박혀 있다. 그 모습이 영영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보았다.'아주 없어진 순간, 불현듯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아빠, 아빠, 아빠아……!”'‘나도 데리고 가, 나도, 나도 데리고 가!’'차마 입에서 나오지 않는 그 말과 함께 사유는 처음엔 멈칫거리다가 어느 순간 아버지가 사라진 쪽으로 달렸다.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거기 서! 감히 도망갈 참이야?”'주춤하고 멈추려던 사유의 발은, 멀어지는 아버지의 모습에 다시 뛰기 시작했다.'“서랬어, 거기 서랬잖아! 비노, 물어!”'바짝 약이 오른 소년의 목소리에 이어, 컹컹거리는 개 짖는 소리. 힐끗 돌아본 순간, 사유보다 몸집이 더 큰 사나운 도베르만이 쏜살같이 달려와 사유에게 덤벼들었다.'“꺄아아아!”'팔을 들어 막지 않았다면 목을 물어뜯었을 것이다. 개는 목 대신 팔목을 물었다. 날카로운 개의 송곳니가 팔에 박혀오는 걸 느끼면서 사유는 개와 함께 바닥에 뒹굴었다.'“으아아아, 으아아아악!”'도와달란 소리도, 살려 달란 소리도 없이 사유는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개는 그녀의 팔을 사정없이 입에 문 채로 발로 그녀를 짓눌렀다. 거품을 문 개의 광기 어린 눈과 피투성이가 되어가는 팔, 거기다 팔에서 흘러내린 피가 뚝뚝 얼굴로 떨어지면서 퍼지는 역겨운 피비린내 속에서 사유는 거의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비명을 질러댔다.'“시끄러. 너 진짜 죽을래?”'좀 전에 개에게 물라고 지시했던 그 목소리가 바로 곁에서 날카롭게 소리쳤다. 사유는 흡, 하고 급하게 숨을 들이켜면서 이를 악물어 소리를 참았다.'그런 사유의 위로 한 소년이 고개를 숙였다. 그림에서나 볼 법한 천사 같은 얼굴을 한 일곱 살의 소년. 그러나 그 소년의 입가에 떠오른 것은 잔인한 미소였다.'“너 머리 꽤나 나쁘다? 지금 네가 저 인간 따라갈 상황이냐? 다시 말해 줘? 저 인간 너 팔아치웠어. 돈 받고 너 팔아치웠다고. 넌 말이야, 지금 네 팔 물고 있는 이 개하고 똑같은 처지야. 이 집에서 키우는 동물이 하나 추가된 거야. 알았어, 벌레야?”'사유는 이를 앙다문 채 한조의 눈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자존심 같은 건, 없다. 그러나 자신은 벌레가 아니란 것은 알았다.'“나 벌레 아니야.”'“벌레야, 넌.”'“벌레 아니야, 아니라고!”'“웃기고 있네.”'“난 사람이야. 사람이란 말이야!”'목청이 터져라 소리쳤지만, 그 소리도 소년이 내는 웃음소리에 묻혔다. 소년이 키득거리면서 한참을 웃다가 사유를 내려다보고는 말했다.'“내가 벌레라고 하면 벌레야. 주인인 내가 그렇게 결정했다고. 그게 싫으면 네 아버지한테 따져. 그리고 먹은 돈 토하게 하고 다시 사람이 돼 보든가. 어때, 지금이라도 네 아버지 불러다 줄까?”'사유가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소년은 알고 있었다. 사유의 입은 다시 닫혔다. 빠드득 소리가 날 만큼 이를 악무는 사유에겐 개가 물고 있는 팔의 상처도 이젠 별것 아닌 것 같았다.'더 끔찍한 상처가, 가슴을 심하게 할퀴어 버린 날. 아버지가 사유를 돈 이천만 원에 팔아 버리고 간 날. 데리러 올 거란 믿음 한 조각 없이 그녀가 혼자 버려진 날. 사막에서 짐승에게 물어뜯기고, 그 짐승의 주인에게 비웃음 당하면서 벌레라고 불린 날.'고작 일곱 살의 나이에 세상엔 희망이란 게 없을지도 모른다는 어려운 생각을 마음속에 품어 버린 날.'그날 한조가, 사유의 주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