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서는 사전을 한창 뒤적이는 중이었다. 이제까지는 주로 문학선을 중심으로 번역해 왔는데 이번엔 전문적이고 학문에 관계된 원고를 맡는 바람에 평소 작업 스타일과는 달리 전자사전까지 총동원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단어 하나하나의 뜻을 찾는 시간이 훨씬 길어졌다.'잔뜩 이맛살을 구긴 채 책상머리에 붙어 앉아 있은 지 벌써 열두 시간을 넘기고 있었다. 그런데도 작업이 끝나 구석으로 치워놓은 원고는 고작 여남은 장 정도였다. 왠지 스스로의 능력에 한계를 느끼는 기분이었다. 그 오랜 시간을 내내 구부정하게 숙인 자세로 있었던 탓에 뻐근하게 뭉친 어깨 근육을 주무르며 안경을 벗어 내려놓았다. 얇지 않은 렌즈의 무게에 짓눌려 콧잔등이 내려앉을 것만 같았다.'경서는 문득 망설이는 눈길로 현관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밤을 꼬박 새고 현재 시각 오전 10시 2분 전. 괜스레 애꿎은 손톱을 물어뜯었다. 의식하고 있는 건 결코 아닌데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김없이 이 시간인 것이다.'“마치 알람시계 같잖아…….”'경서의 푸념 섞인 혼잣말이 긴 꼬리를 감추며 사라질 즈음, 시계의 긴 바늘이 정확하게 숫자 12의 위로 겹쳐졌고 그와 동시에 집 전화의 벨이 요란스레 울리기 시작했다.'요 며칠 계속 같은 시간이었다. 10시만 되면 어김없이 전화벨이 울렸다. 그리고 10시가 되기 직전의 경서는, 한창 일에 집중하다가도 갑자기 일손을 놓으며 전화만 쳐다보곤 했고 그 덕에 매번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찔끔 물러나 앉는 것이었다. 오늘도 다르지 않았다. 누가 걸어온 전화인지는 뻔했다. 그래서 더 망설여졌다. 받아야 할지 무시해버려야 할지.'“여보세요.”'하지만 경서는 슬금슬금 움직여가는 손을 막을 재간이 없었다. 결국 이번에도 역시 수화기를 집어 들고 말았다.'- 이럴 줄 알았다니까. 또 밤 새웠군.'몇 번의 통화에, 말미가 반 이상 뚝 잘려져 버린 것이 언제부터였는지도 가물가물할 정도로 이젠 너무 익숙한 지경까지 이른 이현의 목소리가 둥실 타넘어 왔다. 경서는 무심코 쓴웃음을 흘렸다. 이제부터 그의 잔소리가 시작될 것이다.'- 진짜 말 안 듣는다. 정상적인 생활을 하라는 게 그렇게 어렵나? 낮밤이 한 번 바뀌면 되돌리기가 얼마나 힘든지 알기나 해요? 그거, 자기 몸 망치는 지름길이라니까. 경험자로서 충고라는데 적당히 좀 받아주는 시늉이라도 하면 참 예쁠 텐데. 고분고분 따라주면 어디 덧나기라도 하는 건지. 매일 하는 말, 쥐꼬리만 한 보람이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닐까? 최소한 걱정은 시키지 말아요.'못말리겠다는 듯, 이현이 크게 내쉬는 한숨소리가 들렸다.'“내가 밤을 샜는지 아침 일찍 일어났는지, 그걸 이현 씨가 어떻게 알아요?”'- 설마 모를 리가. 프리랜서 치고, 더구나 당신처럼 집에 틀어박혀 작업하는 직종의 사람치고 이 시간에 전화 받는 목소리가 개운한 사람은 별로 없을걸?'경서는 머리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말로는 당해낼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경서는 불퉁한 목소리로 밤샘 작업을 인정해야 했다.'“일할 때마다 밤을 새는 건 아녜요.” '사실은 경서의 작업 스타일 자체가 그런 편이었다. 작업에 들어갔을 때 낮밤이 바뀌는 건, 그녀에겐 매우 자연스러운 상황이었다.'“남 말 할 처지는 아니잖아요. 그러는 이현 씨도 밤 샜으면서.”'- 나야, 워낙 일정이 촉박해져서 어쩔 수 없는 거고. 평소엔 절대 안 이래. 내 몸 축날 짓을 왜 해, 바보같이.'“나도 마찬가지예요. 서울 사는 모모 씨들 때문에 하도 시간을 많이 뺏겨서 밀린 진도를 빼느라 그런 거지. 마감에 맞춰 대려면 앞으로 일주일은 더 밤낮 없이 해야 한다고요. 문 밖에 나갈 짬도 없어서 오히려 내가 더 답답해 미치겠는 걸요.”'죄책감 좀 느껴보라지, 쳇! 경서는 부러 말끝을 뾰족하니 세웠다. 그런데 이현은 영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일주일? 어, 그건 곤란한데.'“……곤란?”'- 응, 곤란해요. 일주일씩은 안 돼.'“안되다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음…….'이현은 한참이나 침묵을 지켰고 그게 왠지 신경 쓰여서 경서는 책상 위로 연필만 도록 굴려댔다.'- 좋아.'“에? 예? 뭐, 뭐가 좋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