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솔직해지자. 넌 내가 왜 좋았니?”'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한 수는 그가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생각해 보았다. 역시 빠져나갈 구멍을 찾고 있는 걸까?'“나한테 첫눈에 반했다고 했지? 그럼 너한테 사람의 내면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내 내면에 첫눈에 반한 거야?”'여전히 조용조용한 음색에 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 외모가 마음에 들어서 좋아진 거 아니야?”'“그, 그건…….”'재민의 말이 맞았다. 처음 그를 본 순간 수는 번개에 맞은 듯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 채 그저 재민에게서 풍기는 강렬한 느낌에 빠져들었던 것이다.'“나도 마찬가지야.”'재민의 말간 눈과 마주친 순간 그녀는 그의 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은 누군가를 인식할 때 그 사람의 내면뿐만 아니라 외면 또한 뇌리에 각인시킨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봐. 어느 날 갑자기, 죽었던 내가 거구의 옥동자의 모습으로 네 앞에 나타나서 ‘내가 설재민이다.’ 그러면 넌 받아들이기 쉽겠어?”'심각한 상황이었는데 웃음이 났다. 재민과 옥동자라! '“네가 내 내면만을 사랑했어? 외모도 사랑했잖아.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몸무게 90킬로그램의 옥동자가 되어 나타나도 ‘당신 모습이 어떻든 상관없어. 당신은 설재민이니까.’ 하고 다시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 아무렇지도 않게 키스하고 섹스를 할 수 있을까?”'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트렸다. 재민의 말 중 틀린 부분은 없었다. '“소영이 졸업 축하 파티장에 있는 널 본 순간 갖고 싶었어. 아슬아슬하게 파인 검은 드레스를 입은 널 본 순간 침대로 데리고 가고 싶었어. 붉은 입술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뇌쇄적인 미소에 다리가 후들거렸어. 네 내면? 그딴 거 관심도 없었어. 단지 난 네 외모에 반한 거야.”'그의 말엔 거짓이 없다는 것을 수도 알고 있었다. 그녀를 발견한 재민의 얼굴이 어떻게 변했는지 지금도 생생했다. 한쪽 입술이 비틀어지며 음흉하게 올라갔고 검은 눈이 반짝거렸다. 그것을 흘깃 훔쳐본 수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오랫동안 그를 원했기에 그 감정은 더 컸다.'“그렇다고 외모에 반해서 결혼할 수 있을까? 난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 네 외모에 반한 다음 네 내면을 볼 수 있었어. 당차고 밝고 긍정적인 성격이 좋았어.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데 내면만 맞으면 될 것 같아? 아무리 못생긴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외모 중 어느 한 구석이라도 마음에 들어야 하는 거야.”'연애를 처음 시작할 때 있어서는 사실 내면보다 외모가 중요했다. 눈빛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상대의 눈빛을, 정갈한 손을 좋아하는 사람은 상대의 손을, 풍만한 가슴을 좋아하는 사람은 상대의 가슴을, 쭉 뻗은 다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상대의 다리를 보게 된다. 다른 점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점에 높은 점수를 주고 관심을 표하게 된다. 수는 재민이 세련되고 우아하면서도 섹시한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기에 그에 부합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재민의 눈에 들고 싶어서.'“난 네가 섹시하면서도 우아해서 좋았어. 너보다 아름다운 여자? 얼마든지 있어. 하지만 너처럼 우아하면서 섹시하게 웃을 줄 아는 여자는 없어. 백조처럼 우아한 걸음걸이, 곧은 척추가 내 심장을 감당 못하게 만들 만큼 매력적이었어.”'지금의 수는 백조처럼 우아하지도, 섹시하지도, 매력적이지도 않았다. 통나무보다 굵은 다리와 임산부 같은 배, 코믹스에 나올 만한 둥글고 큰 얼굴에 작은 눈과 코, 입술. 그 어떤 것 하나 예쁜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것이 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하는 재민이 미웠다. '“네 웃음소리를 듣고 있으면 천국에 온 것 같았어. 새하얀 햇살을 받으며 웃는 네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알아? 사랑을 하고 난 후 네가 날 쳐다보면 마치 내가 세상의 주인이 된 것 같았어.”'“그럼 혜린이 외모에 내 내면을 만나면 되겠네!”'절망에 사로잡힌 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바보야, 사람이 내면과 외모가 분리되니? 넌 그렇게 생각해? 사람의 외모와 내면은 분리될 수 없어. 난 수를 사랑했어. 아름답고 섹시하면서도 우아하게 웃을 줄 아는 수의 외모와, 밝고 명랑하고 고운 마음씨를 가진 수의 내면 모두를 사랑했어. 내가 네 외모만을 사랑했다면 절대 너와 결혼할 생각 따위 하지도 않았을 거야. 그토록 오랫동안 널 그리워하면서 울지 않았을 거야.”'그랬다. 인간이란 존재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공존하는 유기체다. 보이지 않는 마음과 이성이 육신에 존재할 때 하나의 인간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지수의 육체에 현수의 영혼이 들어왔지만 그녀는 지수라고도, 수라고도 할 수 없는 존재였다. 만일 그녀가 수였다면 당장 자신의 집으로 찾아가 수로서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지수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고생스럽다는 고3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온전히 현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그럼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야? 아무리 죽어라 다이어트 해도 이 망할 놈의 살은 1킬로그램도 빠지지 않는데,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나한테 적응할 시간을 줘.”'“적응?”'“그래, 적응. 새로운 너한테 적응할 시간을 줘. 지금도 네가 낯설어. 네가 스킨십을 할 때마다 움찔움찔 놀라. 수를 두고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재민의 말이 수에겐 더 큰 상처였다. 차라리 말을 하지 말지……. '“서로 솔직하지 않으면 우리 관계는 와르르 무너질 수 있어. 무너트리지 않기 위해 아프더라도 솔직해져야 해.”'아픈 자국에나 인두질을 하는 듯한 재민의 솔직한 말에 수는 울 듯 잔뜩 인상을 쓰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재민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다. 절대 울지 않을 거다! 현수는 약한 모습 따위, 우는 모습 따위는 보인 적 없었으니까.'“그래.”'억지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수는 수긍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말이 전부 맞았지만 그래도 가슴이 아픈 것은 그녀도 어쩔 수 없었다. '“맞아. 예전처럼 다시 돌아갈 순 없을 거야. 우리 다시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