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은 화려한 고급 가구로 가득 찬 자신의 방에서 손톱을 물어뜯으며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집중했다. 다정의 아버지 한진수는 기훈을 심하게 야단치고 있었다.'“다정이 하나 제대로 간수 못하겠어? 사내놈이 하자는 대로 다 해주고……. 도대체 다정이 곁에 너란 녀석을 붙여 놓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한진수는 흥분해 마침 들고 있던 석간신문을 그에게 던져 버렸다. 노기가 등등한 그의 얼굴은 오랫동안 속 썩이는 하나뿐인 딸자식에 대한 실망과 분노와 걱정을 아무 잘못 없는 운전기사 아들 기훈에게 다 쏟아 붓고 있었다.'“내 저 녀석 아예 집 밖을 나가지 못하게 하겠어. 도대체 이게 몇 번째야! 그래, 내가 널 붙들고 얘길 하느니 저런 건 맞아야해……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한진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정의 방으로 들이 닥치려 하자 그 때까지 침묵하던 기훈이 빠르게 뒤 따라와 다정의 방문을 막았다.'“다정이는 아직 철이 안 들어서 그래요, 아저씨……. 제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서…… 제가 정신 차릴게요…… 그러니 다정이 때리지 마세요…….”'“네 말 듣고 봐주고 봐주다 이 지경까지 이른 거야. 내가 오늘은 매질을 해서라도 저 기집애 버르장머리를 고치고야 말겠어. 비켜!”'기훈이 들썩이는 한진수를 세게 잡았다. 기훈은 다정이 맞는다는 말만으로도 온 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안돼요…… 아저씨…… 다정이 때리지 마세요…….”'기훈은 애걸하기 시작했다.'갑자기 와장창 소리가 나며 기훈의 따귀 맞는 소리가 살이라도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크게 들렸다. 자신의 방에서 모든 걸 듣고 있었던 다정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그녀는 애꿎은 페르시안 고양이에게서 위로라도 받고 싶은지 고양이가 끙 소리를 내도록 꼭 안아 버렸다.'기훈은 어렸을 때부터 다정의 집에서 같이 지냈다. 그는 운전기사의 아들이었다. 다정의 부친 한진수는 다정이 기훈과 어울리는 것이 못마땅했지만 그럭저럭 우직한데다가 다정을 보호하는 걸 보고 보디가드 겸 해서 두 사람이 붙어 다니는 걸 허용했다. '다정이 아슬아슬하게 행동하는 것은 날이 갈수록 도가 지나쳤다. 그나마 준재벌인 아버지 배경으로 퇴학당하지 않고 고등학교 졸업을 할 수 있었다. 겨우 입학한 대학교에서도 수업에 빠지기 일쑤고 매일 말썽을 일으키며 기훈과 저러고 다닌다.'하지만 다정을 함부로 야단칠 수도 없었다. 그랬다가는 정말 어긋날 것처럼 아슬아슬해 보였다. 다정父는 그래서 할 수 없이 기훈을 야단치곤 했는데 오늘은 여러 가지 감정이 북받쳤는지 처음으로 기훈의 뺨을 멍이 들 정도로 세차게 치고는 골프채로 근처 가구들을 부숴 버렸다.''''“기훈아…….”'기훈은 침울하게 저택 안마당 의자에 털썩 앉아 있었다. 큰 덩치에 남자답게 잘 생긴 얼굴이었지만 어째 상처받은 어린애처럼 안 돼 보였다. 다정이 살짝 옆에 앉아 그의 안색을 살피자 왼쪽 볼이 퍼렇게 부어오른 것이 보인다. '“아파……?”'다정은 손등으로 살짝 그의 볼을 건드리려 했다. 그러자 기훈은 움찔하며 그녀의 손을 피했다. 다정이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 잡아주자 갑자기 그는 미친 듯이 심장이 두근거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버렸다. 그는 무덤덤한 다정의 얼굴을 바라보며 떨리는 맘을 숨기려는 듯 큰 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빨리 철들어, 알았어? 이제 곧 유학도 가야 하면서…….”'“유학 가기 싫거든.”'“유학 안가면? 아저씨가 가만 계실 것 같아? 그나마 네가 그 약속이라도 했으니까 참아주시는 거라 생각하면 돼.”'“기훈아, 너도 같이 가자.”'“내가 어떻게…….” '기훈은 일부러 밝게 말한다. '“우리 집 형편에 유학비용을 어떻게 대냐…… 그리고 아저씨가 참 좋아 하시겠다…….”'“돈은 내가 대줄게. 같이 가자…… 응? 응? 너 없이 내가 어떻게 지내냐…… 응?”'다정은 엄마 잃은 강아지 같은 처량한 눈으로 기훈을 바라본다. 기훈은 그녀의 순한 눈빛이 자신을 향하고 있기만 해도 뺨 한대 맞은 것 따위 아무렇지도 않다. 거기다 웃어주기까지 한다면 솔직히 말해서 대신 죽어주고 싶을 만큼 기쁘다.'마침 다정의 집에서 주방 일을 하고 있던 어머니가 자신을 찾는 소리에 퍼뜩 현실로 돌아온 듯 떨리는 마음을 겨우 가라앉힌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소곳이 앉아있는 다정을 한 번 바라보곤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긴다.'그는 등 뒤로 자신을 바라보는 다정의 시선을 느끼며 잠깐 멈춰 섰다. 그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저씨 눈에 띄기 전에 방으로 돌아가…… 야단맞는다.”'청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터벅터벅 사라지는 기훈의 뒷모습을 끝까지 바라보던 다정은 자리를 고쳐 앉아 자신의 집 넓은 정원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만만치 않은 악동 같은 눈빛은 아무도 자신을 주목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인지했는지 아주 잠시 공허한 듯 긴장이 풀어졌다.'바람이 불어 그녀의 긴 머리가 살랑 흩날린다. 아직 쌀쌀한 봄 날씨 때문인지 쪼그리고 앉아 있는 다정의 모습은 더 여리고 추워 보인다.''''서연은 미국에서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다. 공항에 들어서는 그는 하얀 셔츠에 청바지 차림이었는데 서글서글한 눈매가 인상적이다.'약간 긴 머리를 손으로 걷어 올리자 그의 반듯한 이마가 드러났다. 이목구비 하나하나를 따져보면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지만 전체적인 조합은 누가 봐도 핸섬했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무뚝뚝하니 차가워보였지만 활짝 웃거나 미소 지으면 보조개가 들어가며 순수하고 따뜻해 보인다. 목소리는 부드럽고 조용했지만 듣기 좋은 울림이 있었다. 군살하나 없는 그의 몸은 적당히 큰 키에 맞게 탄탄하게 균형 잡혀 있어서 굳이 성공한 사업가라는 그의 배경이 아니라도 여자들이 좋아할 은근한 매력이 가득했다.'서연은 도착하자마자 VIP주차장에 세워진 차를 몰고 어느덧 시골길을 달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엔 점점 미소가 퍼졌다. 창문을 여니 시골 특유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향취가 물씬 풍겨온다. 그는 아직은 서늘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창문을 활짝 열어 놓는다.'“바쁘세요……?”'밭에서 쪼그리고 앉아 있던 아담한 중년여자가 서연의 외침에 그를 바라본다. 그녀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서연의 무표정한 얼굴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반가움이 스며든 부드러운 미소만이 가득하다. 서연은 빠른 걸음으로 중년의 여자는 종종걸음으로 서로에게 다가간다.'“어머니…….”'“연락 했으면 뭐라도 준비했지…… 집에 찬도 없는데…….”'서연母 지현의 말투엔 아들에 대한 정이 뚝뚝 떨어진다.'“엄마가 만든 된장찌개면 돼요.”'서연母는 활짝 웃으며 서연의 어깨를 쓸어주었다.'“출장 갔던 일은 잘 해결되었고?”'서연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아득한 눈길로 어머니를 바라보더니 품에 따뜻하게 안아준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는데 그의 모습에서 어머니에 대한 애정과 존경이 사르르 녹아있었다.'그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항상 최선을 다해 사셨다. 갑작스런 사업의 실패 후 돌아가신 아버지로 인해 온 집안이 휘청거릴 때도 형의 어이없는 교통사고로 요절했을 때도 그의 어머니는 서연 앞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하지만, 서연은 안다. 얼마나 힘들었을지…… 얼마나 통곡하고 싶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