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녀를 만난 것은 반월도로 가기 2주 전의 일이다.''대학 기말 고사 중 벌어진 고교 동창들과의 술자리가 한참이나 벌어졌다. 나는 반월도로발굴을 가기 싫다며 떠들어대었고 짓궂은 친구 놈들은 내 불행을 기꺼이 축하해 주었다. 자신들의 기말고사 따위나 귀찮은 회사 일들 따위는 까마득하게 망각한 채였다. '“반월도 따위 정말 싫어.” '사실은 섬의 이름 자체의 어감도 싫어서 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이가 갈렸다. '가득 채운 소주잔을 연방 흔들어대며 건배를 계속하던 녀석들이 날 비웃어댔다. '“신미남. 그래도 가야 한다며? 못 가면 졸업도 없다고 하지 않았수?” '“그래. 너희 어머니가 바라시는 대로 대학 졸업은 해야지.”'“맞아. 그래야 개명한다고 하지 않았냐?” '맥주는 성이 안 찬다며 2차로 대학가 밑 낡은 포장마차 가게에서 낄낄대며 웃는 친구 놈들을 보자 이가 더욱 갈렸다. 오늘은 재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었고 다 큰 사내들 넷이서의 술자리는 그 하루의 대미를 장식하는 최악이었다. 덕분에 난 술만 들이켰다. '셋째는 아들 대신 딸을 바라던 진 여사는 날 출산한 뒤 아무렇게나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것이 신미남. 얼마 전 동명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드라마가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학창 시절 내내 놀림 거리였던 내 이름은 이제 안주거리로 씹혔다. 바라는 소망은 한 가지. 개명. 어머니는 대학만 졸업하면 개명을 허락한다고 엄포를 놓았고 남은 반 학기만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맙소사. 내 학과가 발목을 잡았다. '빌어먹을 고고학과! 발굴일수란 게 모자라면 졸업도 안 된다니?'수능을 실패해서 아무렇게나 들어간 대학의 학과는 하필이면 고고학과였다. 적성에도 맞지 않아 군대를 자원입대까지 했었고 군대를 갔다 온 뒤엔 연애사업과 옷가게 창업에만 매진했다. 그럴싸한 옷가게의 사장이 되었지만 덕분에 수업은 건성, 학점도 엉망이었다. 그래도 졸업은 가능할 거라 여겼건만 예상하지도 않은 발굴일수가 내 발목을 잡다니. '말 그대로 발굴일수를 채워야 하니 발굴을 가야한다. '그것도 4학년의 널널한 여름방학에 남해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섬에 발굴! '왜 고고학과에는 의무발굴일수가 있는 걸까. 나는 대학과 나라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의무발굴일수란 고고학과생이나 사학과의 고고학 전공자들에게 필수로 주어지는 과정이다. 말 그대로 해당 발굴일수를 의무적으로 채워야 졸업이 가능한 제도를 의미했다. 학교마다 달랐지만 우리 학교는 졸업할 때까지 90일이다. '내 남은 발굴일수는 고작 9일. 9일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2주간을 반월도에서만 보내야 한다는 것이 억울했다. 여초 현상이 심한 탓에 남학생의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과의 특성도 마음에 안 들었고, 어차피 성별만으로도 난 이미 현장에 차출될 운명이었다. '‘젠장.’ '2주간의 발굴 로테이션에 참석하게 되는 내 신세가 끔찍했다. 어디로 보나 발굴은 노가다였고 2주씩이나 땡볕 아래에서 지내는 건 더 끔찍했다.'조교인 준호에게 이런 사실을 푸념하지 않았어도 조금은 달라졌을까? 사정이야 어찌되었든 그놈은 어떻게든 날 발굴명단에 집어넣었을 것이다. 이미 이름이 올라가 버린 상황이니 빼도 박도 못하는 데다 2주씩이나 가게를 비워야 하는 건 짜증이 났다. 아직 갚아야 하는 옷 가게 대출금을 떠올리자 속이 쓰리다. 그런데 일주일도 아니고 이주씩이나?'불만이 목까지 차올라 술을 들이부어 마셨다. 덕분에 취기만이 잔뜩 차올랐다.'삼차를 달리자는 친구들의 말에 대꾸하는 대신 끌려갔던 모양이다.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호프집이었고 나는 토기를 참을 수 없어서 가방을 멘 채 화장실로 달려가 한바탕 토했다. 토한 뒤엔 정신이 조금 돌아왔지만 그게 한계였다. '대충 인사를 하고 호프집을 나왔는데도 날 말리는 놈 하나 없었던 걸 보면 친구들도 어지간히 취해 있었던 모양이다.'이미 시간은 자정을 넘긴 상태였다. '나는 찬바람을 쐬며 멍하니 2코스 정도 떨어진 집까지 걸어야 하나 버스를 타야 하나, 택시를 탈 건가 한참을 고민했다. 이미 버스가 끊겼을 테지만 그런 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모퉁이를 돌아 큰 길 사거리로 막 접어든 참이었다. '내 흐릿한 시야에 여자 하나가 들어왔다. '평소 시끄럽고 사람들로 북적이던 길에는 지나가는 몇 대의 차들 이외엔 그 여자와 나 밖에는 없었다.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하얗게 보이는 여자.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귀신인가? '민소매의 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자는 술기운에 봐도 이상해 보였다. 어깨 아래로 오는 단정한 머리, 무릎까지 오는 원피스에 낮은 굽의 샌들. 참하고 단정한 차림새였지만 그 하얀 원피스가 소복처럼 어두운 거리에 혼자만 부유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여자의 얼굴 역시 단정한 미인형의 얼굴이었고 예쁘지만 별다른 특징도 없어서 더욱 기이하게만 느껴졌다. '여자와 전봇대 하나를 사이에 두고 눈이 마주친 나는, 당황해 말을 걸고 말았다. '“이봐요. 집이 어디예요?” '여자는 집 밖을 산보하러 나온 것도 아닌데 가방도 지갑도 없었다. 뭔가를 쥔 것도 아닌 빈손에 그 원피스에는 호주머니 하나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그 눈. '그 여자의 눈과 마주하자 귀신에 홀린 기분이 들었다. '여자의 눈은 너무나 깊었다. 여자의 커다란 눈동자에 내 얼굴이 고스란히 거울처럼 비춰지고 있었다. 초점 없이 흐려진 그 여자의 눈은 약에 취한 것 같기도 했고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해 보이기도 했다. 어쨌든 바로 앞의 나를 보고 있지 않은 건 확실했다. '술기운이 상당히 달아나긴 했지만 이 불안해 보이는 여자를 그대로 둬선 안 된다는 생각만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