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쪽팔려서!”'지홍은 침대를 세게 내리쳤다.'꼬르륵.'문득 뱃가죽을 뚫고 들려오는 싼 티 나는 음향에 인상을 썼다.'배가 고프다. 벌써 네 시간째 꼼짝도 않고 방에 처박혀 있었더니 저녁 먹을 때가 훨씬 지나 버렸다. 뭐, 까짓 저녁 한 끼쯤이야 굶어도 그만이지만, 방에 들어앉아 있는 것이 너무 답답했다. 왕재식의 행방에 대해서도 물어야 하는데 언제까지나 숨어 있을 수도 없고.'꾸르르륵.'지홍은 자신의 납작한 배를 쓰다듬었다.'“하아, 쪽팔려서 죽을 것 같아도 살고자 하는 본능은 여전하구나. 죽지는 않겠다. 배고픈 건 아는 걸 보니.”'사실, 이렇게까지 숨어 있을 이유는 없었다.'“딱 까놓고 말해서 내가 뭘 어쨌는데? 난 그냥 우연히 거기 앉아 있다가 놈과 눈을 마주친 것밖에 없어. 안 그래? 아닌 말로 석명운이 내가 자기 입술에 입술 갖다 대는 걸 본 것도 아니잖아. 내가 하는 말을 들은 것도 아니잖아. 내가 자길 좋아하는 걸 아는 것도 아니잖아.”'혼자서 중얼거리다 보니 정말 그렇다. 정말 별일 아니었다. 이렇게 숨어 있는 것이 더 수상하다. 눈 마주쳤을 때 그냥 씨익 웃어 버렸으면 됐을 걸 괜히 제풀에 놀라 도망친 것이 결정적 실수라면 실수다. 그 외에는…….'지홍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이 뭔가 의심 살 만한 짓을 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눈이 마주치기 전까지는 분명히 석명운이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가 눈을 떴을 때 그녀가 앉아 있는 뒷모습을 봤다는 말이다.'“그런데 내가 왜 도망을 쳤지?”'침대에서 벌떡 일어서며 자문했다. 지홍은 굳게 닫힌 방문을 노려보았다.'“찔릴 것 없잖아!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고 혼자 감옥살이를 해?”'갑자기 용기가 샘솟으면서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지홍은 스스로의 행동에 완벽한 합리화와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 후 힘차게 방문을 열어젖혔다.'그래! 내 속마음을 석명운이 어떻게 알 거야!''주눅 들 것 전혀 없다고 스스로 주문을 외면서도 지홍은 잔뜩 움츠린 채 거실을 훑고 있었다. 고개를 쑤욱 빼서 마당 쪽도 살피고 현관에 그의 신발이 놓여 있는 것도 확인했다. 누가 보면 딱 도둑고양이로 보였다. 뒤꿈치를 든 채 당장이라도 튈 준비를 갖추고 이곳저곳을 살피는 폼이 뭐 훔쳐 먹으러 들어온 도둑고양이다.'아래층을 전부 살펴본 지홍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했으니 이젠 정말로 주방을 습격할 차례다. 이왕 도둑고양이 흉내를 내기로 했으니 배고픔의 본능까지 해결할 심산이었다.'슬금슬금 식탁을 돌아 주방 안으로 들어섰다. 혹시 몰라 거실 쪽을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고 2층 계단에서 들려올지도 모를 인기척도 놓치지 않았다. 귀를 쫑긋 세우고 신경을 잔뜩 긴장시킨 채 냉장고 문을 열기 직전이었다.'“한곈가 보지?”'화들짝! 지홍은 정말 펄쩍 뛸 듯이 놀라 몸을 돌렸다.'헉! 석명운이다!'그녀는 순식간에 얼굴을 붉혔다가 시선을 외면했다가 안절부절, 당황했다. 그러다 이러면 안 된다는 조금 전의 주문을 떠올리며 어깨를 폈지만 이미 보일 건 다 보인 것 같은 기분에 제대로 폼이 안 나와 주었다. 그래도 목소리 높이면 당당한 거다.'지홍은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목소리를 높였으나 마음과 달리 입이 굳어 말을 더듬고 말았다.'“뭐! 뭐, 뭐? 내가 뭐?”'뭐, 뭐, 뭐라니. 제기랄!'그가 저벅저벅 걸어오더니 커피 머신 앞에 섰다. 물을 넣고 유리병에 든 원두커피 한 스푼을 넣는다.'“저녁 먹을 땐 내려올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훨씬 오래 견디더군.”'지홍의 눈이 커졌다.'“무, 무슨 소리야?”'이럴 땐 시침 떼는 것이 상책이다. 그녀가 방 안에 숨어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내색하지 않고 해결할 일이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머신을 작동시키고 그가 돌아섰다. 무표정한 얼굴이 오늘따라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홍은 턱을 치켜들고 그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어깨를 매만지며 오만 인상을 썼다.'“아, 진짜 너무 바빠서 일만 했더니 어깨가 뻐근하네. 전화기만 붙잡고 부하들에게 지시만 하려니 좀이 쑤셔. 밥 때가 지난 줄도 모르고 말이야.”'지홍은 슬그머니 돌아섰다. 그가 믿는지 안 믿는지는 상관없었다. 어쨌든 지금 상황을 모면하고 둘 사이의 어색한 상황을 풀어야 했다. 냉장고 문을 열며 흘깃 뒤쪽을 훔쳐보며 크게 말했다.'“밥 때를 놓쳤더니 배가 고파 죽을 것 같네. 뭐, 먹을 것 없나?”'탁.'헉!'눈앞에서 냉장고 문이 닫혔다. 지홍은 깜짝 놀라 몸을 바로 세우고 돌아섰다. 코앞에 석명운이 있었다.'“무, 무슨……!”'그가 팔을 뻗어 냉장고를 짚었다. 지홍은 얼굴 바로 옆에 쳐진 바리게이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 다시 눈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지금 뭐, 뭐 하는 짓이야?”'탁.'나머지 한쪽 팔이 또 그녀의 얼굴 옆을 가로질렀다. 지홍은 갇혔다. 석명운표 바리게이트에. 그리고 그녀는 단 한 번의 동작으로 그 바리게이트를 물리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멍청하게 서 있었다.'냉장고와 석명운에게 포위당한 지홍은 멍한 얼굴로, 아니 정확히 말하면 겁먹은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온갖 난폭한 놈들 다 상대할 때도 겁 같은 거 안 먹었는데 지금은 겁이 났다. 석명운, 이 망할 자식이 또 어떻게 자신을 흔들지…… 두렵다.'그가 눈을 빛내며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술을 뗀다.'“너.”'그녀를 부르는 거다. 지홍은 자신을 부르는 거라는 걸 알면서도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온다.'“나, 좋아하지?”'빌어먹을!'지홍은 얼어 버렸다. 들켰다. 절대 티 안 냈다고 생각했는데 알아 버렸다. 석명운에게만은 안 들키려고 용썼는데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쪽팔린다. 쪽팔려서 당장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홍은 한 줄기 동아줄을 필사적으로 움켜쥐었다.'“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장난치지 말고 비켜!”'무작정 소리 지르고 아니라고 오리발 내미는 건 그녀의 장기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이렇게 빠져나가면 된다. 놈도 완전히 100퍼센트 확신하는 걸 아닐 테니까. 아닐 거다. 아니어야 한다.'“아니야?”'웃는 것 같다. 미치고 환장하겠다. 지홍은 아득해지는 정신을 끌어 모아 세우고 턱을 쳐들었다.'“아니야! 누가 널? 하! 누가 너 같은 놈을…….”'“그럼 피해.”'뭐?'지홍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순식간에 내려온 그의 입술을 피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입술에 닿는 부드러운 석명운의 입술을 느끼는 순간 지홍은 심장이 커다랗게 부풀어 오르며 팡 하고 터지는 것을 느꼈다. 가짜로 했던 두 번의 키스와는 전혀 달랐다. 격렬하지도 않았고 깊지도 않았다. 그저 마주 댄 입술에서 느껴지는 온기만이 존재할 뿐이었다.'지홍은 눈을 크게 뜬 채 그대로 빈 공간을 노려보고 있었다.'드디어 그가 입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눈을 보지 못했다. 앞으로도 절대 못 볼 것이다. 이젠 다 들켰으니 다시는 석명운과 눈을 마주치지 못할 것이다.'“안 피했네?”'그래, 안 피했다. 자식아!'“정말 좋아하나?”'그래! 정말 좋다. 이 자식아!'지홍은 고집스럽게 정면만 노려보았다.'커피 머신에서 내는 향긋한 커피의 향이 코끝을 자극한다. 눈앞에 존재하는 석명운도 저 커피처럼 향만 남기고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 이대로 땅으로 꺼져 버렸으면 좋겠다. 흔적도 없이.'그가 돌아섰다. 저벅저벅 걸어가더니 머신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한 잔 따르기 시작했다. 지홍은 그 뒷모습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알아도 모른 척하면 안 되나? 꼭 그렇게 아는 티를 내야 했어? 꼭 이렇게 사람 자존심을 긁어야 했냐고!'“커피 마실 거야?”'등을 돌린 채 태연하게 묻는 그가 얄미워 죽을 것 같았다. 미워서 환장할 지경이었다. 야비하고 잔인한 놈. 여자가 자길 좋아하는 걸 확인하고도 태연하게 커피 마시겠냐고 묻다니? 차갑기 그지없는 놈, 인정머리라고는 털끝만치도 없는 놈!'머리끝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 같았다. 주먹 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래, 이왕지사 이렇게 다 까발려진 거, 갈 데까지 가 보자!'“너는!”'지홍은 빽 소리를 질렀다. 그가 천천히 돌아선다. 완전히 돌아서기도 전에 지홍은 일을 저질렀다.'“그러는 너는! 너도 나, 좋아하잖아!”'무슨 이런 억지를!'지홍은 자신의 말도 안 되는 억지에 스스로도 놀랐다.'그가 왜? 그가 왜 날 좋아하겠어? 나 같은 걸 왜 좋아하겠어? 반짝반짝 윤나는 여자가 주위에 널렸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