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가볍다. 홀가분한 듯도 하고, 또 서글픈 듯도 했다. 이렇게 갑작스레 떠날 줄 알았다면 속내를 비춰볼걸…….'예련은 잘려진 그녀의 목이 작은 목궤 속으로 사라지는 걸 허공으로 둥실 떠오르며 지켜보았다. 영혼이 빠져나간 육체란 저런 것인가? 목에서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는 피로 인해, 비류가 특별히 하사해 준 그녀의 은빛 찬란한 갑옷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았다. 눈으로 보이고, 역한 피 냄새도 났다. 목이 없는 초라한 육신은 그녀의 것이었고, 비위를 상하게 하는 비릿한 검붉은 피도 그녀의 것이었다.'“준비 되었는가?”'하얀 옷을 입은 젊은 여인이 예련의 앞에 섰다. 사자(使者)였다. 그 순간에도 자신이 죽었다는 걸 잠시 잊고 그녀 앞에 나타난 사자가 젊은 여인이라는 사실에만 놀랐다. 사자는 예련의 표정을 보고 그저 입가에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하얀 옷이 무척 잘 어울리는 고운 여인이었다.'“예.”'만약 죽게 되어 저승사자와 마주서면 절대로 따라가지 않겠다고 발버둥을 칠 줄 알았는데, 사자가 보여준 은은한 미소에 그녀의 마음이 평온해지고 말았고, 준비되었냐는 사자의 물음에 저절로 대답이 흘러 나왔다.'예련이 사자를 따라 돌아서려는데, 적군이 떠난 자리에 도검이 나타났다.'‘시신을 그냥 버려둬. 그걸 가져가지 마.’'예련은 목이 터져라 도검을 향해 외쳤지만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이것이 죽은 자와 산 자의 경계란 말인가?'도검의 처절한 절규가 그녀의 귀를 아프게 했다. 저 대규(大叫)를 멈추고 그녀의 음성을 들어주면 좋겠는데, 도검의 울부짖음은 끝이 없었다.'도검은 예련군의 상징인 깃발을 걷어 그녀의 시신을 덮었다.'“왜 이리 미련하십니까? 무슨 생각으로 혼자서 사지에 뛰어 드신 겁니까? 폐하께 이 사실을 어찌 말씀드려야 합니까?”'‘아무 말도 하지 마. 난 장수였고, 그저 전장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뿐이야. 그러니 제발 저 따위 시신은 버려두고 그냥 가.’'그녀는 자신의 육성이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잊은 채 또 도검을 향해 외쳤다.'“소용없네.”'사자는 이런 상황을 수없이 보았는지 예련의 안타까운 심정을 이해한다는 얼굴이었다.'“자네가 열심히 살아온 거, 다 아네. 허나 명줄이 여기까지인 걸 어떡하겠는가?”'예련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그녀의 모습을 본 사자의 얼굴엔 더욱 측은한 표정이 떠올랐다.'“가겠느냐?”'예련은 가고 싶지 않았다. 영혼이나마 그녀와 함께 했던 저들의 곁에 남고 싶었다.'“네가 저들 곁에 남는다고 이제 무슨 도움이 될 것 같으냐?”'예련의 망설임을 알아챈 사자의 한마디에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사자는 빨리 가자고 채근하지 않았다. 그녀 스스로 결심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사자를 향해 돌아서는 그녀의 발걸음이 무겁기만 했다.'그렇게 천근처럼 무거운 걸음을 옮겨 예련은 사자의 뒤를 따라 상제의 앞까지 갔다. 그런데 상제뿐만 아니라 여럿이 예련을 지켜보며 술렁거렸다.'“데려왔습니다.”'상제는 예련을 내려다보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상제의 길고 하얀 수염이 위엄을 더해주고 있었다. 상제는 쉽게 말을 꺼내지 않았고 오랫동안 예련을 보고 또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러다 주위에서 어서 말을 하라는 듯 헛기침이 쏟아지자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너는 환생하지 못한다. 너에 의해 전장에서 죽어간 이들의 원망이 짙어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다시 인간으로 환생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다음 생애, 또 그 다음 생애가 되어도 비류를 만날 수 없다는 말이었다.'“저 또한 타인의 손에 죽었습니다. 허나, 저는 그들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저는 전장을 누벼야 하는 장수였습니다. 적장의 손에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제 손에 죽어간 이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 역시 적장에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전장에 나온 이들입니다. 헌데 그들의 원망이 짙다고 제가 지옥에 가야 하다니요? 어불성설입니다.”'예련의 항변에 주위가 조용해졌다.'“허나 넌 사람을 죽였다.”'상제가 말했지만 힘은 실려 있지 않았다.'“저는 장수입니다. 제 일이었습니다. 세상이 어지럽지 않았다면 그리하지 않았을 겁니다. 전장이 아니면 풀 한 포기, 짐승 한 목숨 가볍게 다룬 적 없습니다. 그런 제게 지옥에 가라니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억울합니다.”'예련의 태도는 당당했다. 그래서 더 상제나 다른 이들은 예련을 몰아붙이지 못했다.'상제의 한숨에 그녀의 주위에 늘어서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상제의 곁으로 모여 들었다. 그녀에게 들리지 않는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쉽게 결정할 일이 아닌 것 같구나.”'딱히 누구에게라고 정해지지 않은 상제의 한마디가 한숨처럼 흘러 나왔다. 상제는 난감한 얼굴로 그녀를 데려온 사자를 불렀다. 사자는 상제와 조용조용 대화를 주고받으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한참 후 그녀에게 다가왔다.'“머무를 곳을 알려 주겠다.”'상제의 앞에서 물러 나와 사자의 뒤를 따라가면서 예련은 그녀의 곁을 스쳐가는 무수한 영혼을 보았다. 예련은 죽었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비류가 하사해준 갑옷을 입고 있었다.'‘이 훌륭한 갑옷이 아깝구나.’'“제가 여기서 보내는 하루는 지상의 하루와 같습니까?”'사자는 측은한 눈으로 예련을 훑고 이내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다르지. 하루가 되기도 하고, 혹은 십 년이 되기도, 또는 백 년이 되기도 한다네. 간혹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하지만 그러지 않을 때도 있지. 자네가 안타까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예련은 사자의 말이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자의 말을 곱씹어 생각하다가 걸음이 느려져 멀찍이 뒤처지고 말았다. 예련은 서둘러 사자를 따라갔다.'“인연이 아니었지요?”'사자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만들었다. 예련은 마음이 흔들렸다가도 사자의 저 미소만 보면 평온하게 가라앉았다.'“무엇이 인연인가? 자네와 자네가 모시던 그분이 만났다는 건 이미 인연이었다는 소리지.”'“제 말 뜻은…….”'“인연은 만드는 것이라네. 아무리 인연으로 이어진 사이라도 노력하지 않으면 맺어지지 않는 법이지. 그렇다는 건 인연이 아니더라도 노력하면…….”'묘한 울림과 함께 사자는 뒷말을 흐렸다.'“나는 죽은 자의 영혼을 이끄는 사자라네. 사자의 일은 참으로 어렵고 힘들지. 특히 자네처럼 맑은 영혼을 하늘로 이끌어야 할 때는 그 마음이 더 무겁다네.”'“결정된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