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수고하셨습니다.” '오늘따라 유난히 지치고 짜증스럽기만 한 더빙이었다. 들고 있던 대본으로 부채질을 하며 영채는 녹음실을 나섰다. 이상하리만치 오늘은 기분이 꿀꿀했다. 매직을 시작하려면 아직도 멀었고 게다가 어젯밤 별다르게 꾼 꿈은 없었다. 다만 아침에 일어날 때 특유의 게으름 탓에 조금 허둥대며 집을 나서긴 했지만 그거야 별다를 게 없는 영채의 자잘한 일상이었다. 그랬는데 아침부터 컨디션이 난조를 보이며 녹음실에 들어서며 마치던 지금까지 계속 대사가 씹히고 있었다. 대사가 많지 않아서 그나마 천만다행이었다. 그렇지만 뭐, 언제는 대사가 많았나? 하는 생각으로 영채는 쓴웃음을 지었다.'“정영채! 너 오늘 무슨 일 있냐? 대체 왜 그래? 많지도 않은 대사 내내 틀리기나 하고 말이야. 너 때문에 녹음 시간만 길어지고 이게 뭐야? 가뜩이나 날도 더운데! 그나마 다음 스케줄이 저녁때라 다행이지 안 그랬음 너 오늘 나한테 죽었어!” '평소 영채를 무척 무시하고 갈구 는데 일가견이 있는 선배 윤성이 참지 못하고 결국 한마디를 내뱉었다. 윤성의 꾸지람에 오늘도 역시나 영채는 그저 고개를 숙이며 죄송하다는 말 외에는 다른 할 말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말은 안했지만 녹음 내내 딴 생각에 빠져 있는데다 간단한 대사 한마디조차 제대로 치지 못하고 실수만 연발하는 영채를 곱게 봤을 리 만무했다. 못마땅한 듯 영채를 쳐다보는 눈빛들이 여실히 말해주고 있었다. '“잘 좀 하자? 응? 연습 좀 하고. 그거 다 연습 부족이야. 알아? 그러니까 네가 후배들한테 밀리고 무시당하는 거야. 알아? 능력이 안 되면 다른 일을 알아보든지 그것도 안 되면 시집이라도 가든지!” '이런 젠장! '영채는 자신도 모르게 구겨지는 얼굴을 하며 윤성을 바라봤다. 독사 같은 선배였다. 영채의 3년 선배이기도 했고 성우실 실장이기도 한 윤성은 여러모로 영채에게 암적인 존재였다. 평소 영채 갈구는 게 취미이자 유일한 삶의 낙이기라도 한 것처럼. '따지고 보면 그런 빌미를 준 건 영채였다. 자신이 잘 나가는 성우였으면 윤성이 하는 저런 타박도 기분 좋게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유쾌하게 ‘죄송합니다.’ 정중하게 인사 한마디 하고 웃어넘길 수도 있었다. 아니, 애초에 이렇게 후배들 있는데서 자신을 무시하는 말은 하지도 않았을 테지.  '“그렇게 능력이 안 되면서 몇 년째 성우 한다고 붙어 있는 너도 참 대단하긴 해. 어휴, 더워. 덥다, 더워!” '말을 마친 윤성이 신경질적으로 녹음실을 나섰다. 그런 윤성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던 영채는 한숨을 내쉬며 그의 뒤를 따라 녹음실을 나섰다. 장마가 시작됐다더니 비는 오지 않고 후덥지근한 날씨만 며칠째 계속이었다. 가뜩이나 기분도 심란한데 윤성의 꾸지람까지 더해져 영채는 축 늘어진 어깨를 하며 터버터벅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어머? 영채언니?” '누군가 반가운 기색으로 영채의 어깨를 건드리며 아는 척을 하자 순간 영채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 '아, 젠장! 오늘 대체 왜 이런다니? 재수 없게 얠 또 여기서 만나? 평상시엔 그렇게 마주쳐라 그래도 마주칠 일도 없더구먼. 오늘은 마치 여기서 날 기다렸던 것처럼 만나네? 어휴, 정영채 오늘 재수 옴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