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한 하늘만큼 정윤의 마음도 온갖 설렘으로 가득 찼다. 사회복지사가 되고 처음으로 직장을 갖기 위해 면접을 보러 가는 길, 하지만 집에서 두 시간 거리에 있어 너무 멀다는 이유로 면접을 보기도 전에 그녀는 부모의 반대에 부딪혔다.'“정윤아, 다른 곳을 알아보는 게 어떻겠니? 급하게 서두르면 체하는 법이다. 좀 더 시간을 두고 찬찬히 알아보자.”'모친의 말에 정윤은 해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괜찮아요. 저한테 거리는 아무 문제없습니다.”'“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매일 어떻게 다니려고 하니? 네 심신이 고달파서 안 된다. 가뜩이나 야위어서 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데…….”'“아빠도 참…….”'부친의 만류에도 역시나 정윤은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녀는 첫 직장부터 이것저것 따지고 싶지 않다며 만약 그곳에서 자신을 받아 준다면 그것도 감사할 일이라면서 일단 보고 온다고 했다. '“저한테 선택권이 있는 거 아니잖아요. 절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전 너무 행복할 거 같은데요. 지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기분 좋아요. 빨리 가서 아이들도 보고 싶고요.”'그녀가 온갖 제스처를 해가며 빛이 날 정도로 해맑게 웃어 보이자 부모도 어쩔 수 없었다. 항상 딸의 미소를 보며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았던 그들이었다. 그녀의 미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석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녀의 미소가 다른 이들에게 희망과 행복을 준다면 그녀말대로 다른 조건들은 필요치 않을지도 몰랐다. '“알았다. 조심해서 다녀오너라.”'“다녀올게요.”'그렇게 10여 분만에 정윤은 부모의 걱정스런 눈빛을 받으며 집을 나섰다. ''두 시간 가까이 지하철과 마을버스를 탔지만 정윤의 얼굴에 피곤함이라고는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버스에서 내려 약도를 보고 쉼터를 찾기 위해 마을로 걸어 들어갔다. 다행히 쉼터는 마을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고 쉼터 옆으로 큰 은행나무가 있어 생각보다 찾기가 쉬었다. '쉼터의 정문이 보이자 가슴이 쿵쾅거렸다. 발걸음도 빨라지고 얼굴엔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입구에 들어서니 별다른 이름이 붙지 않은 채 그냥 검정색 글씨로 큼지막하게 ‘쉼터’라고 쓰여 있는 나무 푯말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정윤은 정겨웠다. 투박하지만 글씨체가 예뻤고 심플한 것이 마음에 쏙 들었다. 누군지 모르겠으나 이것을 만든 사람은 분명 마음이 깨끗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활짝 열려진 철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먼저 널찍한 운동장이 그녀를 반겼다. 운동장에서는 사내아이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다. 잠시 넋을 잃고 아이들을 바라보던 정윤은 휴대폰 알람이 울리자 정신을 차리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약속 시간을 알리는 소리였다. '직사각형의 건물을 향해 서둘러 걷던 그녀의 앞에 별안간 축구공이 굴러왔다.'“공 좀 던져 주세요!”'“어! 그래!”'정윤은 걸음을 멈추고 발밑에 있는 공을 주워 모여 있는 아이들 틈으로 힘껏 던져 주었다.'“고맙습니다.”'아이들이 손을 흔들어 보이자 그녀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하지만 녀석들은 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기들끼리 뭔가 쑥덕거리며 정윤을 빤히 바라봤다. 키득거리는 녀석도 있었고 도리질을 하는 녀석까지. 급기야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는 걸 보니 아마도 내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정윤은 그런 녀석들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건물을 향해 계속 걸어갔다. 그러다 뭔가와 ‘쿵’ 부딪혀 하마터면 뒤로 자빠질 뻔했다.'“어머!”'큰 나무에 그대로 얼굴을 들이받힌 정윤을 보고 녀석들이 박장대소하기 시작했다. '“괜찮으세요?”'한 녀석이 웃으며 물어왔다. '“응. 근데 원장실이 어디야?”'이마를 매만지며 정윤이 미간을 찌푸린 채 낮은 목소리로 뱉어냈다. 혹이라도 난 것처럼 욱신거렸다. 쓰러지지 않은 게 용할 정도로 충격이 꽤나 큰 탓이었다.'“바로 앞에 보이는 창문이요. 그 방이에요.”'“으응? 어, 고맙다.”'정면으로 보이는 창문에는 ‘원장실&상담실’이라고 쓴 시트지가 붙여 있었다. 그녀는 아이에게 한 번 더 웃어 주고는 빠르게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정윤은 막상 원장과 부딪히려고 하니 괜스레 떨려왔다. 그녀는 옷의 먼지를 털고 옷가지를 단정하게 쓸어내렸다. 머리도 매만지고 헛기침도 하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이윽고 정윤이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똑똑’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정윤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시 나와 길게 뻗어 있는 복도를 바라보았다. 역시나 쥐 죽은 듯이 고요하기만 하다. 그녀는 원장을 찾기 위해 발걸음을 떼고 긴 복도를 따라 걸어 들어갔다. 하지만 식당과 공부방을 지나고 아이들의 방을 지날 때까지도 개미 한 마리 구경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다시 밖으로 나와 신나게 공놀이를 하고 있는 녀석들에게 원장의 행방을 물을 수밖에 없었다.'“방에 안 계시면 뒤쪽 텃밭에 계실 거예요.”'정윤은 그들에게 또다시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건물을 돌아 뒤쪽으로 가봤다. 녀석들 말대로 한 남자가 배추를 뽑고 있었다.'“안녕하세요?”'정윤이 해맑게 웃으며 남자에게 인사를 해보였다.'“누구십니까?”'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러닝셔츠와 반바지를 입은 그를 보니 농촌 총각의 모습이 떠올랐다. 밭에 있으니 더욱 그렇게 보였다. 11월의 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어깨에는 구슬땀이 맺혀 있었다. 정윤은 그 모습이 정겹게 느껴졌다. 모자를 쓰고 있어 얼굴을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마음을 놓을 수 있을 만큼 편하게 대해도 될 것 같았다.'“이정윤입니다. 전화 드렸었죠? 면접 보러 왔어요.”'정윤은 여전히 해맑게 웃으며 그를 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원장은 소박한 모습과는 달리 무척이나 퉁명스럽게 뱉어냈다.'“그래요? 이력서 줘 봐요.”'“네? 여기에서요?”'“그래요.”'남자가 구부렸던 허리를 폈다. 생각보다 키가 훤칠했다. 모자를 벗으니 까무잡잡한 피부 속에 숨겨져 있던 서글서글한 그의 눈빛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남자는 손등으로 콧잔등을 쓱 한 번 닦고는 손을 내밀어 이력서를 달라고 했다. 흙이 잔뜩 묻은 장갑을 낀 채로 말이다. '“장갑은…….”'“장갑? 아……. 빼야죠.”'그는 서둘러 장갑을 빼고 바지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찔러 넣었다. 정윤은 한순간 주머니 속으로 잔뜩 들어갔을 흙이 떠올랐다. 인상을 찡그리는 것도 잠시 그가 무척이나 털털한 사람 같아 그것마저도 마음에 들었다. '정윤은 그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서둘러 이력서를 내밀었다. 찬찬히 남자의 행동을 좇던 정윤의 눈에 이력서를 펼쳐 보이는 그의 투박한 손이 한눈에 들어왔다. 손은 여기저기 긁힌 상처로 거칠어져 있었다. ''남자는 이력서를 읽어 내려가며 틈틈이 정윤을 바라봤다. 아담한 체구지만 얼굴엔 생기가 가득하고 선해 보였다. 고집은 있어 보이지만 생글생글 웃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저 미소라면 아이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많이 야위었지만 체력적으로 힘든 일은 자신이 하면 그만이었다. 정윤은 아이들에게 정성만 쏟으면 된다. 헌신과 봉사를 할 수 있을 만큼 마음이 넓은 여자 같았다. 남자는 이번만큼은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이젠 그로서도 방법이 없었다. 한창 예민한 사춘기 소녀들의 마음을 읽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아이들에겐 정윤처럼 모든 얘기를 해도 다 들어줄 것 같은 저 온화한 눈빛과 저 미소가 절실히 필요한 때였다. 벌써 여러 명의 선생이 그만둔 상태라 어느 때보다도 신중하게 정윤을 바라봤다. '한참만에야 그가 입을 열었다.'“좋습니다. 숙식을 해야 하니까 이번 주 내로 짐을 챙겨 오시죠. 방은 마련해 두겠습니다.”'“숙식이요?”'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광고에 숙식 가능하신 분을 원한다고 명시했을 텐데요.”'“전 못 봤는데…….”'“싫으면 관두고요.”'원장이 딱 잘라 말하자 정윤이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녀는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아, 아뇨. 괜찮아요. 어차피 거리가 너무 멀어서 자취를 할까 했거든요.”'그녀가 겸연쩍게 웃어 보였다.'“그럼, 이번 주 안에 다 마무리 지읍시다. 가능하죠?”'“그럼요.” '“좋습니다. 그럼, 이만 가 봐요. 난 배추를 마저 뽑아야 하니까.”'원장은 다시 모자와 장갑을 챙기고 허리를 굽혀 큼지막한 배추를 집어 들었다.'정윤은 매정한 남자의 말투에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인사를 하려다 아직 밭에 남아 있는 많은 배추를 보고 거들어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이번에도 냉정하게 딱 잘라 말하고는 이만 가보라며 등을 떠밀었다.'“저기요…….”'정윤은 발에 힘을 준 채로 버티려고 했으나 건장한 남자의 힘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여긴 여자가 해야 할 일이 있고 남자가 해야 할 일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 일은 남자가 해야 할 일이니 신경 끄고 가요. 어서!”'“근데 통성명도 안 하시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