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박한 손이 어머니가 애지중지하던 티 팟과 찻잔이 든 상자를 짐짝처럼 들어 올리자 수호는 손을 뻗으며 주의를 당부했다.'“아아, 조심해 주세요.”'“예, 예.”'이번엔 콘솔을 든 인부들이 그를 찾았다.'“이건 어디다 놓을까요?”'“그쪽 코너에 놓아 주십시오.”'수호가 화장실 앞 벽을 가리키자마자 진료실에 책상과 책장을 들여 놓은 직원이 그를 찾았다.'“선생님. 여기 한 번 봐 주십시오.”'“예, 갑니다!”'수호는 긴 다리를 십분 이용해 성큼성큼 진료실로 향했다. 너른 유리창으로 푸르고 알록달록한 정원이 한눈에 들어오는 진료실은 적당히 끼쳐든 햇볕 덕에 온화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튼튼하면서도 특유의 우아함을 풍겨내고 있는 앤티크 책장과 책상은 수호가 원했던 곳에 잘 자리 잡고 있었다.'“좋네요.”'“그럼 고정 작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예. 그렇게 해 주십시오.”'진료실을 나온 수호는 대기실로 쓸 큰 거실로 나가 이삿짐센터에서 나온 사람들에게 정리를 시작하도록 지시했다.'“가구 들어갔으니까 책장부터 정리 좀 해 주십시오.”'“알겠습니다.”'정리를 부탁한 수호는 약간 습한 공기를 품고 있는 정원으로 나섰다. '“으음!”'양쪽 입 꼬리를 살짝 말아 올린 수호는 한 달 동안 고전 분투한 결과들을 뿌듯한 가슴으로 둘러보았다. 우선 가구들과 짐들이 들어오는 바람에 어수선하긴 했지만 정성을 들인 보람을 보여주고 있는 정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가 사들여 손을 대기 전에는 카페의 일부였던 정원은 오랜 시간 방치된 탓에 나무들은 봉두난발 같았고 거미줄과 쓰레기들로 가득 차 있던 아수라장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미용실에서 막 나선 아가씨의 머리처럼 정갈하고 아름다웠다. 알맞게 자르고 깎은 푸르른 나무들은 싱그러웠고 채송화와 애기 범부채, 비비 추에 붉고 노랗고 흰 개양귀비들도 각기 빼어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리고 입구 쪽에 놓은 하얀 철제 벤치와 그 옆 감나무에 걸어 놓은 새장 속의 카나리아까지 정원은 당장 잡지에 나와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고 하시면서도 가구 지원을 아끼지 않은 어머니 정 여사의 말처럼 병원인지 카페인지 알 수 없는 그 특유의 알쏭달쏭함이 수호는 무척 마음에 들었다. 신경정신과 전문의로서 환자들을 진찰하면서 수많은 미디어를 통해 왜곡된 정신과의 환경과 환자들의 모습으로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면서도 선뜻 정신과 문을 두드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려움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개원을 하게 되면 여타의 병원들과는 다른 그러니까 전혀 정신과답지 않은 그런 환경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그런 이유로 폐업한 지 오래된 카페 자리를 사들여 건물과 정원을 거의 새로 만들다시피 했다. 그동안 모은 돈과 아버지께서 남겨 주신 유산까지 헐어야 했지만 자신이 상상했던 그대로의 병원은 그의 가슴을 쫙 펴주고 어깨에 힘을 듬뿍 실어 주었다.'“어떤 환자들을 만나려나?”'흐뭇한 표정으로 할머니에 아저씨, 아줌마 그리고 새침한 여고생에 말썽꾸러기 사내아이까지 다양한 환자들을 그려보고 있는 그때 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수호는 바지 주머니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휴대전화를 꺼내 슬라이드를 밀었다.'“네! 권수호입니다.”'“넌 줄 안다. 인마.”'“형!”'수호의 얼굴이 환해졌다. 대번에 인마 소리를 내뱉은 사람은 고등학교 선배이자 대학 선배이기도 한 현준이었다.'“그래, 개원 준비는 잘 되어 가냐?”'“정신없어요. 가구랑 짐이 한꺼번에 들어오는 바람에 난리도 아니에요.”'“다들 미친놈이라고 하는 거 알지?”'병원답지 않은 병원을 만든다는 이유로 주위에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음을 모를 리 없지만 소신에 비추어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에 수호는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하하! 정신과 의사가 멀쩡하면 그게 이상한 거죠. 안 그래요?”'“네 말이 맞다. 아, 참. 나 너한테 부탁할 게 있어서 전화했다.”'수호는 부탁이라는 말에 짐짓 우는 소리를 했다.'“에이, 난 화분 보낸다고 하면 금일봉으로 하사하시라고 하려고 했는데.”'“요즘 같은 불경기에 금일봉이 어디 있냐? 병원까지 접는 마당에.”'“아, 맞다. 병원은 나갔어요?”'“응. 일주일 후에 비워 주기로 했다.”'아이들을 위해 좀 여유롭게 살자는 아내의 뜻을 받아들여 고향인 춘천으로 병원으로 옮기는 큰 결심을 한 현준이었다.'“시원섭섭하겠어요.”'“그렇지 뭐. 아, 자식. 너 때문에 또 이야기가 옆으로 샜잖아.”'“알았어요. 알아. 말만 해요. 뭐든지 들어 드릴 테니.”'“네가 무슨 램프의 요정이라도 되냐? 다 들어주게. 다른 게 아니고 환자 하나 맡아 주라.”'“환자요?”'“응. 내가 한 1년 정도 본 환자인데 손 놓으려고 하니까 꼭 우리 준희를 물가에 내어놓은 것처럼 마음이 쓰여서 말이야.”'현준의 말에 수호가 물었다.'“역전이(의사가 무의식적으로 과거의 인물과 현재의 인물을 동일시하는 현상. 주로 치료과정에서 나타나며 애정과 분노 등 다양한 감정 표현으로 표출된다.)에요?”'“뭐 그런 셈이야.”'“어떤 환자인데요?”'수호가 현준이 자신의 딸인 준희와 동일시 여기고 있는 환자에 대한 호기심을 나타내자 현준이 대답했다.'“천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