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 미안, 아침 일찍 돌아왔는데 벌써 출근했나 봐? 나 어제 술 마시고 1교시 수업까지 들었더니 너무 머리 아파. 집에서 자고 있을 테니 꿀물 좀.>'<누나 집에 열쇠가 있던데 두고 나간 거야?>'<암튼 꿀물 잊지 말아요, 알라뷰.>'간신히 지각을 면하고 수업에 열중하는 사이, 집에 있는 지용으로부터 몇 통이나 문자가 왔다. 꿀물 사러 나갈 기운도 없는 걸 보니 어제 무리한 게 확실했다. 벌써 컸다고 꿀물 타령하는 지용이 못마땅하면서도, 유진은 내심 귀여운 마음에 학교에서 퇴근하는 대로 근처 마트에 들렀다.'“2500원입니다.”'“네? 꿀물 하나에?”'“사실 거죠?”'생각보다 비싼 꿀물 가격에 당황하긴 했지만, 토종 벌꿀이라고 별표까지 세 개 쳐져 있는 것을 보고 효과가 좋긴 하겠다 싶었다. 이 돈은 꼭 너한테 받아내고 말 거야. 지용을 향해 중얼거리며 마트를 나서던 유진은, 저 멀리 약국에서 나오는 연우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뒤돌아섰다.'“어이.”'“…….”'“어이 아가씨! 방금 마트에서 나온 처자!”'그런데 무슨 볼 일이 있다고 녀석은 유진을 부른다. 너무 친숙하게 불러서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한산한 도로 위에 서 있는 것은 두 사람 뿐이었다. 유진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연우를 돌아봤고, 연우는 자연스럽게 유진의 옆으로 다가와 섰다.'“같이 갑시다.”'“내가 어디 가는 줄 알고?”'“퇴근하는 길이잖아요. 나도 집에 갈 거니까 같이 가요.”'바로 옆에 녀석이 있다는 게 꿈만 같았다. 자꾸 아가씨 어쩌고 하는 걸 보니 아침에 봤던 쪽지의 대상이 자신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잊지 못할 밤은 또 뭐람? 유진은 슬며시 운을 떼 보았고, 연우는 빙긋 웃으며 그녀 앞으로 약국에서 들고 나온 봉지를 내밀었다.'“어젠 무슨 일…….”'“감기는 괜찮아요? 이거.”'“이게 뭔데?”'“일단은 이걸로 감기 기운 좀 가라앉히고, 심해지면 꼭 병원에 가야 돼요.”'감기? 병원? 그러고 보니 아침에 머리가 지끈거려 괴로웠던 게 생각났다. '“어제는 정말 좋았어요.”'“뭐?”'“말했잖아요. 잊을 수 없는 밤이었소.”'어떻게 알고 약을 샀는지 물으려던 유진은, 뜬금없이 던져진 연우의 말에 바보처럼 할 말을 잃었다. 동시에 그녀가 혼란스러워 한다는 것을 눈치 챈 연우는 장난스럽게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짐짓 상처받은 표정으로, 그녀의 앞에서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잊은 거예요? 우리 함께 보낸 시간을?”'“뭐? 내, 내가 뭘 어쨌는데?”'“같이 있고 싶다면서요. 집까지 찾아와서는 무작정 유혹하기에 나도 바로 오케이 했는데?”'“유, 유혹? 내가?”'유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무리 제 정신이 아니었기로 서니, 자신이 연우의 집까지 찾아가서 그런 과감한 행동을 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 자신에게는 아무런 기억도 남아있지 않은데, 여자와 함께 오피스텔로 들어가는 연우를 보고는 너무 충격을 받아 기억이라도 상실해 버렸던 걸까?'“이럴 줄 알았어. 우리 둘 다 진심이길 바랐는데.”'할 말을 잃어 버렸다. 연우에게 아직도 감정을 가지고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유진은 명색이 고등학교 선생이라는 자신이 그렇게 체통 없이 굴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우리 둘 다라는 건…… 그럼 설마 연우도.'“말도 안 돼. 내가 그렇게 분별없이 굴었단 말이야? 4년 만에 처음 만난 너한테?”'“뭐 어때요?”'“어떻긴, 그건 있을 수도 없는 일…….”'“있을 수도 없는 일은 아니죠.”'뭔가 목숨을 걸고 열심히 치고 있던 방어막을 굉장히 허무하게 무너트린 기분이었다. 한바탕 소란스럽게 대화가 오고 간 뒤, 유진은 다시 한 번 연우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눈앞에 근사해진 녀석은 이제 다 큰 성인이었다. 23살의 나이보다도 어른스러운.'Chu.'더 이상 머리가 복잡하진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이, 유진과 마주보고 있던 녀석이 그대로 그녀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 내려놓았던 것이다. 지금이 아직 도로 위라는 사실에 움찔했지만, 그 입술이 너무나 부드럽고 따뜻해서 유진은 차마 움직일 수가 없었다.'“우리 이제 가능해요. 난 미성년자도 아니고, 길에서 키스한다고 누가 잡아가지도 않아요. 그러니까 마음만 오면 되요.”'찰나와 같았던 입맞춤이 끝나고 연우가 말했다. 순간 너무 꿈결 같아서 하마터면 알았다고 말할 뻔했다. 하늘에서 뿅 하고 나타난 것 같은 기회였다. 연우 말대로 이제 더 이상 예전 같은 제약은 없어졌지만, 유진은 어쩐지 선뜻 대답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하지만 우린…….”'“시간을 줄게요.”'“…….”'“나한테 못했던 말 있죠? 기다릴 테니까, 용기가 나면 말해요.”'사실이었다. 꼭 이럴 때 은성이 생각나서 마음을 어지럽힌단 말이다. '“그리고 나 아직도 많이 부족하긴 하지만, 이제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 하는 게 아니라 나서서 보호해 줄 수도 있어요.”'“연우야.”'“어른이라구요 이제.”'하지만 기대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의지한다는 것은 질색하는 그녀였지만, 28년 동안 그렇게 살아왔는데 이제 또 기약 없이 외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힘들었다. 무엇보다 오랜만에 만난 연우는 눈이 부시다. 너무 눈이 부셔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기다릴게요. 진실을 말하고 나한테 올 때까지.”'확실히 알고 있었다. 자신은 4년이 아니라 40년 후에 그를 보더라도 결국 처음처럼 사랑에 빠질 것이다. 연우는 그런 사람이었다. 먼저 인사를 하고 자신의 오피스텔로 돌아가는 연우를 유진은 애틋하게 쳐다보았고, 제발 한 번만이라도 그와 온전히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되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