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 나올 수도 숨어버릴 수도 없는 습관, 그 속에 네가 있었어. ''우편함 가득 쌓인 우편물들을 다 비워내지 못하고 일부분만 겨드랑이에 끼우곤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오래된 우편물들 중에는 인쇄된 이름 중 한 글자가 사라져 ‘정마루’ 중 ‘정마’만 남겨져 있는 것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오랜만이구나 싶어 배시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달랑 가방 하나만을 들고 떠났던 여행이 1년이 될 줄이야.'띵.'엘리베이터 도착음과 함께 캐리어와 더불어 늘어난 짐 한 덩어리를 들고 올라탔다. 현관 문 앞에 서서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자 매캐한 먼지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목이 따가웠고 코가 간질였다.'“집이다.”'오랜 비행 탓인지 마루는 정겨운 침대를 보자마자 짐을 내팽개치곤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침대에서는 늙은 스프링이 끼익끼익 소리를 냈지만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찬바람이 부는 오후, 네모반듯한 곳에 출입증 카드를 갖다 대자 경쾌한 소리와 함께 앞을 막고 있던 투명한 문이 열린다. 그제야 험악한 표정의 경호원 아저씨의 표정이 풀어지며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나서, 한쪽 모서리가 깨진 출입증을 요리조리 살펴본다. 출입증에 박혀 있는 사진은 이십 대 초반의 파릇파릇하면서도 약간 촌스러움이 느껴진다. 색이 바래서 누가 줍는다고 한들 이름을 보지 않는 이상 지금의 마루일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 할 테다. 픽. 웃음을 머금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다.'사실 조금 더, 휴가를 느긋하게 즐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긴 머리카락을 커트로 자르고 난 뒤, 느닷없이 갑작스럽게 일을 그만두었을 때, 장 피디가 거의 얼이 나간 표정으로 혹은 절박한 심정으로 마루를 잡았지만, 어느 누구의 탓도 아닌 마루 자신의 탓이었기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미련 없이 방송국을 떠났다.'홀가분하였고, 조금 억울하기도 했고 그래서 눈물이 나기도 했었다. 방송국에서의 해방을 선언하던 그날, 노트북 앞에 앉아서 흰 바탕의 텅 빈 문서를 노려보며 땅콩을 안주 삼아 맥주 3캔을 무리 없이 해치웠다. 효선의 전화도 받지 않았고, 도진의 문자에도 답하지 않았다.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었다. '그렇게 어느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무엇 하나 넌지시 던지지도 않은 채 일주일 뒤, 무작정 짐을 싸서 비행기에 올라탔다. 사촌 언니가 결혼해 살고 있는 영국에서 3개월을, 그 뒤에는 행선지를 정하지 않는 긴 여행이 시작됐다. 그렇게 어영부영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가지고 있는 돈도 바닥이 났을 무렵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진한이 ‘선배, 살려줘요!’라고 징징대며 밤낮 가리지 않고 메일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부산에서 엄마에게 어설픈 어리광을 부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한 번 더 출입증을 대자 문이 열린다. 이중 삼중, 보안은 확실하다. 뭐, 가져갈 게 있나. 흥. 코웃음 쳐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마루 선배!”'입구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진한이 쪼르르 달려 나온다. 나이 차이는 두 살밖에 나지 않는데, 연차는 4년차가 난다. 진한이 막내시절부터 보아왔으니, 함께한 시간 또한 제법 긴 셈이다.'“응, 오랜만이야. 여긴…… 변하지 않았구나.”'마루는 1년 3개월 전하고 별반 다를 것 없는 라디오국 사무실을 쭉 둘러본다. 여전히 지저분하고, 여전히 휑하다. 지저분함과 휑함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고 중얼거렸었는데.'“선배는 살이 엄청 빠졌어요. 일하다가 쓰러지는 건 아니죠?”'진한은 짐짓 걱정되는 목소리로 마루의 요리조리 훑어본다.'“그럴 일 없거든. 걱정 붙들어 매셔.”'“그럼, 이제 그깟 사랑 훌훌 털어낸 건가. 근데 겉모습은 아직도 선머슴이야. 머리가 자라긴 한 거예요?”'픽 웃으며 짧은 단발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매만진다. 그녀에 관한 이야기라면 모르는 것이 없는 녀석이다. 능구렁이마냥 은근 슬쩍 물어보는 것이 걱정이 되긴 한 모양이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고작 사랑을 앓고 나서 오랫동안 고집해온 긴 머리를 싹둑 자르지 않나, 그런데다 갑자기 일까지 그만두고 유유히 사라졌으니 놀랄 만도 했다. 지겨워도, 아주 가끔씩은 버겁다 느껴도 방송일은 ‘천직’이라고 생각해 왔으니 말이다.'“선배, 효선 누나한테 들르면 잔소리 장난 아닐 걸요. 며칠 전에 효선 누나 봤는데 선배 잡아먹을지도 모른다던데요. 각오 제대로 해야 할 것 같은데.”'아차! 잠시 잊고 있었던 효선이 생각나 머리가 지끈거린다. 모든 것이 행복하고, 어려운 것을 딱 싫어하는 효선은 재잘재잘 말이 많은 편이었다. 물론, 그런 효선이 삶의 활력소라는 점에서는 매우 만족하는 편이긴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며칠 전 전화 너머로 들려온, 훌쩍거림과 메일에서 느껴진 우울함이 생각나 마음에 걸린 참이었다. 참 무심하고 이기적인 친구인데도, 효선은 마루의 손을 먼저 놓는 법이 없었다.'“민영아, 인사해. 정마루 작가님.”'‘달콤한 상상’ 팀에는 앳된 얼굴의, 스물하나, 스물둘 정도 됐으려나. 머리를 두 갈래로 반듯하게 묶은 귀여운 인상의 아이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한다. 그 아이에게서 풋풋한 젊음이 느껴진다. 아아, 정마루에게도 저런 시절이 있기는 했던 걸까. 문득, 그녀의 스물하나, 둘은 어떠하였는지 생각에 잠긴다.'“작가님 안녕하세요. 저는 이민영라고 해요. 작가님 팬이에요. 작가님이 하신 프로그램 들으면서 방송 작가의 꿈을 키웠어요.”'민영이의 뺨이 새색시처럼 발그레해졌다. 마루는 묘한 느낌을 빙그레 웃음으로 대신한다.'“반가워요, 민영 씨.”'어느 누군가가 작가로서의 정마루라는 사람을 좋아해준다는 것은 기쁘기도 하면서 동시에 무거운 짐 덩어리가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느낌이 들곤 한다. 마루가 방송 너머로 날리던 수많은 멘트들이 정말로 그녀의 것이었는지. 그것들이 이렇게 한참이나 어린 후배에게 꿈을 키워줄만한 것들이었는지. 마루는 다시 한 번, 스스로를 되돌아보곤 한다. '“그럼 아직 피디가 정해지지 않는 건가?”'출근하자마자 노트북을 정리하곤 간이 회의용 테이블로 둥그렇게 모여 앉는다. 얼마만의 일하는 기분인가. 살짝 어색하기도 하고, 내내 그립기도 했었던 이러한 풍경들. 마루는 피식 웃으며 진한을 바라본다. '“네, 선배. 내일쯤 결정 날 것 같아요. 일단 이번 주까지 나갈 방송은 이미 다 녹음돼 있어요. 전 스태프들이 꼼꼼하게 체크하고 일을 마무리한 모양이에요. 다행이죠.”'자정 12시부터 새벽 2시까지의 ‘달콤한 상상’은 유명한 연예인들이 나온다거나, 아이돌을 내세우는 프로그램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가장 예민하고 감수성이 풍부해져 있을 시간에 달콤한 여자 아나운서의 목소리로 세상사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인기를 유지해오곤 했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 부쩍 낮은 청취율로, 개편시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대적인 스태프 물갈이에 들어간 셈이었다.'“지금과 똑같이는 갈 수 없어. 왜냐하면 이러한 구성에 사람들이 싫증을 냈기 때문에 청취율이 급격하게 낮아진 이유도 한 몫 할 테니까.”'청취율이든, 시청률이든 잘 나오지 않을 경우 그 모든 책임이 작가에게로 향하는 건 오래전부터 지켜온 관습과 같은 것이라 그로 인한 책임감이 무겁게 어깨를 짓눌렀다.'“그렇죠. 오랫동안 그런 형태를 유지해 왔으니까요. 새로운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민영은 회의 내용을 노트북에 정리하는지 타자를 치는 손놀림이 바쁘다. '아직 피디도 만나보지 않은 상태에서 프로그램의 구성을 어떻게 할 것인지 아이템을 내는 것도 미련하지만, 무작정 정해질 피디를 기다리는 것 또한 무의미하다. 일단, 어느 정도 구성하고 아이템을 정한 다음에 내일 새로 호흡을 맞출 피디와 함께 협의하는 것으로 마음이 기운다.'“일단, 아이템을 정하자. 어떻게 변화를 줘야 할지. 민영 씨, 회의 내용은 나도 적고 있어요. 굳이 정리해서 브리핑할 거 아니니까. 그것보다 민영 씨의 젊고 통통 튀는 아이디어가 필요해요.”'“작가님, 말 놓으셔도 돼요. 제가 한참 어린 후배인걸요.”'민영은 쑥스럽다는 듯이 얼굴을 붉히고는 노트북의 덮개를 닫는다. 그리곤 노트와 펜을 가져와 끼적이며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다. '어느 누군가를 만나고, 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서 점점 쌓여가는 외로움 때문일까. 어린 사람을 만나도, 동갑인 사람을 만나도, 점점 말을 놓는 것이 어려워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루가 늘 ‘어려운 사람’이라고 말하곤 했다. 효선은 이것이 모두 마루의 마음속에 그어 놓은 어떠한 ‘선’ 때문이라고 누누이 말하곤 하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는 습관과 비슷한 것일까. 오래된 그 습관은 고쳐지지 않은 채, 서른하나의 나이를 휘감고 있다.'“토요일이랑 일요일은 녹음 방송으로 가야 할 것 같고. 음, 토요일은 기억에 남았던 영화 들려주는 이야기 중심으로 1부 어때?”'“괜찮을 것 같은데요, 선배. 그럼 2부는 테마를 정해서 별별 랭킹 이런 식으로 노래를 만드는 것 괜찮을 것 같아요. 게스트를 초대해서요.”'진한의 표정에 오랜만의 여유로운 웃음이 떠오른다. 마루는 칫, 거리며 눈을 한번 흘겨준다. 어찌나 징징거리든지 마루의 귓가에는 진한의 징징거림이 맴맴 도는 듯한 착각이 든다.'“저, 조금 식상할 수도 있을 테지만요. 연애 상담 코너 금요일에 들어가도 좋을 것 같아요. 그저 다른 프로그램과 같은 연애상담이 아니라, 제목도 ‘쿨한 연애 상담’인 거예요. 쿨하게 말씀해주실 수 있는 게스트 한 분 모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마루는 민영의 말을 곱씹어 본다. 라디오에서 연애 상담이란 코너는 민영의 말대로 식상할 수도 있는 아이템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르게 가 본다면 신선하다는 느낌이 들 것 같았다. 무조건 위로하고 보살펴주는 연애 상담이 아닌 것이다. 요즘 애들이 그렇게 연연해한다던 ‘쿨한 연애의 쿨한 연애 상담’이라. 사람을 만나고 마음을 나누고 난 뒤에 헤어질 때는 쿨할 수 있다니, 탄산음료에 목구멍이 한껏 따끔거리는 기분이었다.'“좋아요. 신선한 느낌 줄 수 있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