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갈애

옷장을 가득 채웠던 유명 디자이너의 옷들이 침대 위에 죽 놓여 있었다. 세상의 모든 색깔이 다 있는 듯 종류도 다양했다. 게다가 머리카락을 위로 올리고 내리는 미용사의 분주한 손놀림까지. 하지만 그 모든 것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 여자의 눈빛은 죽은 자의 그것처럼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이거 어때?”'카키색 코트와 파스텔 톤의 원피스. 따뜻해 보이는 옷가지를 그녀는 아무 느낌도 없는 듯 그대로 받아 입었다.'“언니 예쁘다!”'감탄사를 터뜨리는 이복동생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거울 앞에 섰다. 메이크업을 담당한 여자의 손에 의해 어느새 완벽하게 다른 모습으로 탄생해 있었다. 하지만 앙상하게 뼈만 남은 몸은 그대로였다.'준비를 마치고 거실로 나가자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50대 중반의 남자가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입을 열었다. '“예쁘구나.”'하지만 수향은 아무 말 없이 그런 그를 노려보고는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사업이 어려워서 급히 자금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인당수에 빠지는 심청이 되어 달라고 하는데 고집을 부리는 것도 한두 번이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나가기로 한 것이다.'차가 목적지에 도착하는 순간까지도 그녀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호텔 직원의 안내를 받아 룸으로 들어가자마자 목을 감싸고 있는 목도리를 풀었다. 화려한 곳이었지만 시선을 내리고 테이블보만 보고 있다가 그마저도 흥미가 없어지자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는 건물을 보고 있는 눈동자에선 좀처럼 생기를 찾아보기 힘들었다.'“수향아…….”'“말 시키지 마세요.”'냉기가 묻어 나온 목소리에 남자의 얼굴이 움푹 파였다. 화가 난 것인지, 아니면 분노를 참는 것인지 도무지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눈에 봐도 그가 얼마나 긴장했는지 알 수 있었다.'“쫓아낼 때는 언제고 이제 와 팔아넘기려고 부르다니, 이러고도 부모예요? 아직도 제 가슴에 안겨 줄 상처가 남아 있느냐고요!”'참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분명 사랑하고 좋아하는 남자가 있는데, 왜! 지금 자신이 여기에 와 있는 건지 그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여기만 아니면 어디든 좋았다.'심호흡을 하고 있는데 맞선 상대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상대가 누군지 관심도 없었기에 창가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멍한 상태로 얼마나 있었을까, 천천히 고개를 돌려 상대방의 얼굴을 바라본 그녀의 눈동자가 커지더니 이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눈을 깜박거렸다. 미처 막을 틈도 없이 주르륵 흘러내린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수향은 미소를 지으며 수천 번도 더 불렀던 호칭을 입 밖으로 내었다.'“오, 오빠…….”'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그리워했는지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따뜻하기만 했던 눈동자에는 얼음 조각이 들어 있었다. 상대를 조각조각 난도질할 정도의 날카로움이 배어 나왔지만 그녀는 전혀 그 사실을 몰랐다. 문득 수향은 그가 왜 이 자리에 나타났는지 궁금해졌다. 이 자리에 나올 사람은 분명 화진 그룹의 후계자라고 했는데……. 그때까지 반가움에 어찌 할 바를 모르던 눈동자에 의문이 서렸다.'“오늘 이 자리에는…….”'“나야.”'잠깐 잘못 들었나 싶었다. 워낙 무뚝뚝한 편이기는 했지만 저렇게 냉정한 적은 없었다. 어찌 된 일인지 설명해 주기를 바라며 천 회장에게 시선을 돌렸지만 아버지는 못 본 척 그녀를 외면하더니 그대로 나가 버렸다.'“잘도 도망쳤더군. 사람 그렇게 만들어 놓고 잘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네 몰골을 보아하니 그렇게 편하게 살지는 않았나 보다.”'“무, 무슨…….”'“천우가 너한테 돈을 달라고 할 줄 알았니? 너희 식구들이 도와주지 않아도 그 녀석을 살릴 수 있는 돈은 내게도 있었어.”

미리보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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