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 “엄마? 방금 뭐라고 했어요?” '' 마침 고등학교 수학 책을 꺼내 들고 흐뭇해하던 나연은 등뒤로 들리는 중얼거림에 고개를 돌렸다. '' “엄마는! 내가 무슨 초등학생인 줄 알아? 나도 낼 모래면 고등학생이라고! 그런데 아빠가 있다니, 그런 당연한 말이 어딨어? 내가 무슨 유치원생인 줄 아나봐. 요즘 얘들 성교육이 얼마나 빠른데 그래.”'' 투덜거리는 말과는 달리 마주치기를 피하는 엄마의 시선을 붙잡았다. '' “게다가 살아 계시다니! 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말을 해야 하잖아!”'' 하지만 꽉 다문 엄마의 입술은 열리지 않았고, 나연은 엉금엉금 무릎으로 기어 옷장 맨 밑 서랍을 뒤지기는 엄마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러기를 한참 후 엄마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거리는 그녀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나연은 엄마 손에서 떨어진 - 모서리가 닳아 누렇게 변한 - 종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 “네 아빠 주소.”'' “엄마,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갑자기 왜 이래?”'' “나연아.”'' “아빠 따위 …, 난 없어도 괜찮아. 죽은 사람으로 치자고, 그렇게 잘 해왔잖아. 그런데 갑자기 왜 또 이래?”'' “사실은 나연아, 널 몰라서 그래. 그래서 ….”''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엄마 버렸다며! 그리고는 두 번 다시 안찾아왔다면서! 그러더니 나를 모른다니! 왜 이러는 거야!”'' 나연은 벌떡 일어나 발을 구르며 고함쳤다. 변명하듯 털어놓는 엄마의 과거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당연히 없는 것이라 생각했던 아빠의 자리, 더욱이 자신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 “확인해 볼 거야! '' 나연은 자신의 옷자락을 당기는 손을 뿌리쳤다. '' “나연아, 나연아? 내가 하려던 얘기는 그게 아니라 ….”'' 엄마는 밖으로 나가려는 그녀를 안으려고 했지만 금세 나가떨어졌다. '' “사실인지 아닌지 내가 확인해 볼 거야. 엄마 말이 사실인 지, 날 모르는고 있는 게 틀림없는 지 직접 확인할 거야! 그래서 …. 그래서 엄마 말대로 날 버린 게 아니었다면, 엄마가 거짓말로 내 아빠를 속인 거였다면 그 때는 용서 안 해! 안 할 거야!”'' 이미 반쯤 정신이 나간 그녀에게 흐트러진 엄마의 모습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 “나연아, 제발!“'' “엄마를 용서 할 수 없어. 아니 못 해!”'' 나연은 쫓기듯 밖으로 뛰쳐나갔다. 방이 울릴 정도로 커다란 소음과 함께 닫히는 문의 반동으로, 천장에 매달려 있던 형광등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 진섭은 병원 응급실로 급히 와달라는 현우의 전화에 막 집을 나서던 차였다. 밤새 내린 눈 때문에, 운전이 힘든 날이었다. 더구나 크리스마스 이브라서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 분명했다. 복잡한 도로를 생각하며 서둘러 집을 나섰다. '' 대문 앞 계단을 막 내려서려 할 때 고개를 숙이고 주저앉아 있는 아이를 발견했다. 무릎 옆으로 흘러내린 머리가 단발인 것을 보니 언뜻 중학생쯤으로 보였다. 무심코 지나치는데 순간 고개를 들던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 심장의 고동이 빨라졌다. 계단을 다 내려선 진섭은 천천히 아이의 모습을 살피기 시작했다. 코트위로 드러난 피부는 창백했고, 무릎 위에 놓인 손은 추위 때문인지 퉁퉁 부어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다가서 손을 뻗었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움직임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제법 오래 머리를 쓰다듬었다. '' 누군지도 모르는 타인에게 손을 내밀다니. 진섭은 당황한 마음을 감추려는 것처럼 재빨리 뒤돌아섰다. 하지만 멀어질수록 등에 붙은 시선이 집요해지는 것을 느꼈다. 간신히 골목을 돌아서 짧은 숨을 내쉰 그는 어느새 몸을 돌려 아이의 곁으로 돌아갔다. '' “걸어봐. 어울릴 거야.”'' 어정쩡한 모양으로 들고 있던 목도리를 내밀었다. 타인에게 베푸는 친절은 이것이 처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단순히 동정심이라고 하기에는 석연찮은 기분이, 게다가 자신마저 이해시키지 못하는 마음에 짜증이 일었다. 꼼짝않는 아이를 향해 짧게 혀를 찬 진섭은 대신 목도리를 매주었다. '' “추울 거 아냐. 추워 보여. 그러니까 자, 하고 다녀.”'' 마치 피하는 것처럼 옆으로 비켜나던 아이가 조심히 입을 열었다. 묘하게 신경을 자극한다. '' “내 이름은 …, 이나연이에요.”'' “난 김진섭.”'' “이 집에서 행복하세요?”'' “응.”''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지만 달리 부정할 이유도 없었다. 다짐이라도 하듯 뒤따르는 고개 짓에, 짧게 숨을 삼키는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1'''''' 몇 시간 전 OS 항로 컨테이너 수입 현황 보고서를 직접 가져오라는 정현우 사장의 지시가 있었다. 사장실로 올라온 나연은 텅 비어있는 비서실 한 가운데 우뚝 섰다. 평소라면 미정이라도 있었을 텐데, 새삼 어리둥절한 얼굴로 머뭇거렸다. ''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현우와의 친분 관계를 떠올리며 갸웃거리던 그녀는 하마터면 들고 있던 서류를 놓칠 뻔했다. '' “지금 와서 말이 됩니까? 이렇게 되면 얘기가 틀리지 않습니까?“'' 문 건너 외치는 격양된 목소리는 현우의 것이었다. 그런데 저렇게 큰 소리를 내다니. 알고 지낸 지 3년이 넘었지만, 단 한 번도 화를 내거나 고함 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대호 해운에서 그녀의 업무는 선박 용선 담당이었다. 언뜻 들리는 대화 중에서 FMC(Federal Maritime Commission)․TSA(태평양항로안정화협정)가 언급된 것을 보면 뭔가 급한 일이 틀어진 것 같았다. 나연은 들고 있던 보고서를 옆구리에 끼웠다.'' 슬그머니 작아지던 현우의 목소리가 부지직거리는 소음과 함께 다시 커졌다. ' “이럴 거면 처음부터 나서지 말았어야지. 이렇게 꽁무니를 빼면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소리야? 사정이고 뭐고 처음 약속대로 밀고 가지 않으면 …. 야! 야! 한재이!”'' 연달은 현우의 고함 소리에 그녀는 조심히 몸을 돌렸다. 하지만 미처 걸음을 떼기도 전에 사장실 문이 열리며 현우가 나타났다. 저렇게 화가 났을 줄이야, 그녀의 시선이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와 손에 들린 넥타이에 닿았다. '' 잠시 멈칫하던 현우는 화를 참는 듯 입술을 꽉 다물었다.'' “언제부터 있었어?”'' “조금 전에 왔어요. 정말이에요.”'' 눈치를 보며 대꾸하던 그녀는 이내 작은 소리로 웃고 말았다. '' “뭐가 그렇게 재미있지?”'' “그렇게 화내는 거 처음 봤어요. 사장님은 평생 화 안 내는 그런 분인 줄 알았거든요.”'' 나연은 잠시 말을 멈추고 현우의 눈치를 살폈다. '' “물론 다정하거나 따스한 성격은 아닐거라고 짐작했지만.” '' “드디어 그 실체를 확인했다는 건가?”'' 바로 맞췄다는 듯 어깨를 들썩인 그녀가 현우를 살폈다. 호기를 드러내며 반짝이는 눈을 보니 생각처럼 그리 큰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니라는 판단이 섰다. 하지만 현우를 따라 들어간 사무실은 바닥에서 뒹구는 화병이며, 옆으로 쓰러진 소파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 “아, 일단 아무 곳에나 앉지. 그냥 좀 어지럽혀진 것 뿐이야. 이 시각에 웬 일이야?”'' 어울리지 않게 변명하는 듯한 목소리에 또다시 웃음이 터지려고 했다. '' “이번 OS항로 컨테이너 현황 보고서입니다. 직접 가져오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조금 늦었습니다.”'' 대호 해운 회장인 김준호 회장에게는 아들이 한 명 있었다. 하지만 현우 역시 김회장의 하나뿐인 사위이자 회사의 든든한 기둥이었다. 나연은 현우가 어릴 때부터 김회장의 집에서 자란 것으로 알고 있었다. 현우는 무슨 일이든 한 번 결정을 내리면 상황과 상관없는 빠른 일 처리로 유명했다. 게다가 기가 막힌 추진력 덕분에 종종 김준호 회장의 일처리 방식과 닮았다는 소리를 듣곤 했다. '' 한참 학비로 고생하던 그녀에게 대호 유통의 취업을 조건으로 한 장학금을 소개한 사람이 바로 정현우 사장이었다. 물론 그때는 학장실에서 우연히 만난 그가 이처럼 대단한 사람인 줄 몰랐지만, 사실을 안 지금이라고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 현우는 그녀가 내민 보고서를 뒤적거리기만 할뿐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망설이는 중이라고 여길 것이다.'' “우리가 만난 게 3년 전이던가?”'' “네, 정확히 2년하고 8개월이에요.”'' 무슨 생각을 하는가 했더니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나연은 생각에 잠긴 현우를 지켜보았다. 만약 현우를 만난 것이 소설 속의 이야기라면 그와 사랑에 빠져야했다. 하지만 현우는 배려 깊게 보살펴주는 후견인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그녀 역시 이미 결혼한 현우에게 그 이상의 감정을 느낀 적이 없었다. '' “넌 아무 일도 없는 거냐? 얼굴은 왜 또 그렇게 상한 거야? 설마 그 자식이 또 속 썩이는 건 아니겠지?”'' 나연은 때아닌 현우의 타박에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현우에게 태민의 바람기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왼손에 끼어진 약혼반지는 벌써 3년 전 것이었다.'' “속을 썩이지는 않지만 썩 마음에 들지도 않아요.”'' “그렇다면 헤어져.”''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녀는 가차없는 현우의 말에 반박하려 들었다. '' “목숨까지 내놓을 사랑은 아니지만 절 사랑하니까요. 그런데 사장님은 무슨 일이세요? OS항로에 문제라도 생겼나요?”'' “신경 쓸 것 없어.”'' “아닌 게 아니겠지요. 밖에서 들릴 정도로 고함을 치다니, 보통 일은 아니겠다 싶던걸요? 할 수만 있다면 돕고 싶어요.”'' “필요 없어.”'' 물론 현우가 기다렸다는 듯 도움을 받을 거라고 생각지 않았다. ''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사장님 덕분에 공부도 마쳤고 이렇게 번듯한 회사도 다니고 있잖아요.”'' “쓸데없는 소리!” '' “그래도 매번 말로만 감사 인사를 할 수는 없어요.”'' “내 일에는 신경 끄고, 태민인지 태만인지 하는 그 자식 일에나 신경 써.”'' “서태민이라고 제대로 부를 수는 없어요? 허구한 날 그 자식이라는 둥 태만이라는 둥. 사장님이 아무리 못마땅하게 여겨도 우리는 약혼했고, 곧 결혼도 할거예요.”'' “그 놈의 결혼. 맘 먹은 걸로 따지면 열 댓 번도 더했겠다. 매일 하는 얘기 이젠 지겹지도 않아? 말하면 입만 아픈 얘기 계속해서 뭐해? 보고서는 나중에 읽어볼 테니 그만 나가 보도록 해.”'' 하지만 짜증스런 목소리와 달리, 버티고 앉은 그녀를 바라보는 현우의 시선은 조심스럽기만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