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파잇 올 나이트 fight all night 1권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를 보기 위해 로열호텔의 커피숍에 들른 만석은 우연히 한 커플의 맞은편에 앉았다. 훤칠한 키에 말끔한 얼굴의 남자는 요즘 아이들이 껌뻑 죽는 완소남이었다. 하지만 맞은편에 앉은 여자는 한마디로 정의내리기 힘든 분위기의 여자였다. '남자라면 보는 것만으로 눈이 돌아가게 예쁜 외모를 가졌지만, 만석이 자리에 앉고 지금까지 한 번도 진짜 웃음을 보여주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예쁘게 웃고는 있지만 만석의 눈엔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것이 억지로 웃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주 웃는 것도 아니고 꼭 필요할 때만 살짝살짝 웃는 모양이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페르시안 고양이 같았다. '‘다 늙어서 남의 집 귀한 처녀를 보고 고양이 같다는 생각을 하다니, 민혁이 놈이 보면 노망 시작이냐고 한 소리 하겠군.’'만석은 괜한 헛기침으로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했다. 하지만 듣지 않으려 해도 귀로 들려오는 말을 무시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수인아.”'“응?”'수인은 귀찮다는 듯 건성으로 대답했다.'“이런 말 꺼내기 쉽지 않은데…….”'“이미 입 밖으로 나온 말 중에 쉽지 않은 말이란 없어. 이미 마음속에선 결심이 선 것 같은데 뜸들이지 말고 그냥 말해.”'드디어 시작이군. '수인은 무슨 말을 할지 다 보이지만 그래도 남자의 말을 들어 보기로 했다.'“역시 연수인. 시원시원하다.”'“비행기 띄워 주는 걸 보니 대충 무슨 말 할 건지 알 만하다.”'“예쁜 만큼 눈치도 빠르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연수인 너 나한테 투자 좀 해라. 아주 좋은 투자처가 있는데……”'만석은 남자의 말을 듣다 저도 모르게 콧방귀를 뀔 뻔했다. '뻔한 수작. '여자에게 돈 좀 얻어가려는 몹쓸 수작이었다. 자기 여자를 위해서라면 공사장의 질통이라도 멜 각오가 돼 있어야 하는 게 남자다. 그런데 여자에게 빌붙어 편히 살려는 꼴이라니. 딱 봐도 자신의 손자 만한 나이의 놈이 겨우 한다는 짓이 여자에게 돈이나 뜯으려는 것이 불쾌해 만석은 자리를 옮기려 웨이터를 불렀다. 만석의 손짓에 웨이터가 금세 달려왔지만, 만석은 아니라는 거절의 표시를 했다. 곧이어 들리는 여자의 목소리가 만석의 호기심을 잡아채고 말았다.'“이거 아니? 여자에게 자기가 키우는 개는 말이야 어떤 남자라도 부러워할 만한 위치를 차지하고 사랑을 받지.”'“알아.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일미 씨의 피피를 보면 알 수 있지.”'“알아? 안단 말이지.”'“응.”'남자의 대답에 수인의 얼굴에서 그린 것 같은 미소는 더 화려하게 변했다.'“그런데 그런 걸 알고 있었으면서 이런 말을 한단 말이야? 그냥 여태처럼 잘 놀고, 잘 먹고, 하루 종일 햇볕아래에서 일광욕이나 즐기다 가끔 재롱이나 떨면 좋잖아?”'수인의 목소리는 떨리거나 격앙되지 않고 마치 마린보이들을 유혹하던 세이렌의 노래처럼 감미로웠다.'“그럼 이렇게 버림받는 일은 없었을 텐데.”'“뭐, 뭐야? 지금 네 말은 내가. 그러니까 지금 내가 개, 개라는 얘기야!”'“다를 게 있나? 꽤 귀여웠는데, 하지만 아무리 귀여워도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놈은 귀찮아. 잘 가. 그동안 재밌게 해줘서 고맙다. 아, 그리고 돈 필요하다고 했지?” '수인이 웃으며 돈 이야기를 꺼내자 잔뜩 굳어 있던 남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하지만 곧 남자의 얼굴은 수인이 뿌린 물에 흠뻑 젖어 버렸다.'“이, 이게 무슨 짓이야! 미쳤어?”'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수인의 멱살을 잡으려는 남자의 얼굴로 돈다발이 쏟아졌다.'“물 한 번 맞고 받는 돈 치고 좀 많지? 또 돈 벌고 싶으면 전화해. 단, 그때도 네 얼굴로 날아가는 게 물이라는 보장은 못하지만.”'빈 지갑을 가방에 넣고 우아한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수인. '만석은 아무도 생각 못했을 현명하게 남자를 처리한 수인이 단박에 마음에 들었다.'그 즉시 만석은 밖에 대기 중이던 기사에게 수인이 입고 있던 옷을 설명하며 은밀히 그 아가씨의 뒤를 미행해 보라고 지시했고, 곧 기사에게서 방금 나간 여자가 대성그룹 이종녀회장의 손녀라는 사실을 듣고는 다시 한 번 놀랐다. 소심한 책략가의 밑에 저런 호탕한 장수가 있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수인은 종녀의 손녀가 아니라 자신의 손녀여야 했다. 든든한 배포와 호탕한 일처리가 자신의 젊은 시절과 똑같았다.'“은혁이 짝으로 딱인데.”'만석은 아쉬움에 고개를 저었다. 대성그룹 손녀 연수인이라면 그도 여러 가지로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뭔가가 이상하단 말이지.”'만석은 좀 전 수인의 재치 있는 말과 남자를 골라내는 눈을 떠올렸다. 방금 자신이 본 수인은 그간 심심찮게 들었던 소문을 의심하게 만들기 충분했다.'“어느 놈의 입에서 나온 말인지도 모르는 말을 믿느니 내 눈을 믿는 게 낫지. 이보게, 김 비서?”'“네.”'“대성건설 이 회장에게 전화 좀 넣지. 한 번 만나자고.”'“알겠습니다.”'그나저나 이백 년 묵은 여우보다 더 교활한 노친네를 어떻게 꼬여내지?'어찌됐든 만만한 상대는 아니야.''종녀는 여름을 부르는 따스한 바람을 느끼고 싶어 기사에게 자신을 공원의 벤치에 내려놓게 한 다음 잠시 심부름을 보냈다. 그런데 차가 출발하고 5분쯤 지났을까, 하늘이 심상치 않게 변하더니 이내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종녀는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에 당황하고 말았다. 몸이 불편해 휠체어 신세를 지는 몸이라 우산을 사러 갈 수도, 비를 피할 수도 없었다.'종녀는 할 수 없이 쏟아지는 비를 다 맞으며 기사가 빨리 오기만을 기다렸다. 잠시 후 당황하고 있는 종녀의 머리 위로 어디선가 나타난 우산이 쏟아지는 비를 막아 주었다.'“괜찮으십니까?”'올려다보니 준수하게 생긴 청년이 제 옷이 젖는 건 상관하지 않고 자신에게 우산을 씌워주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난 괜찮네만 자네 옷이 젖고 있어.”'“괜찮습니다.”'은혁은 입고 있던 양복 상의를 벗어 땅바닥에 맞아 튀어 오르는 빗방울에 젖어가는 종녀의 무릎에 조심스럽게 덮어 주었다. 흰 와이셔츠가 비에 꼼짝없이 젖어가고 있었지만 은혁은 자신보단 앞에 앉은 종녀의 걱정에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일행이 있으십니까? 없으시다면 제가 원하시는 곳까지 태워다 드리고 싶습니다.”'은혁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종녀의 일행을 찾았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종녀의 무릎을 덮은 양복에서 명함을 한 장 빼 정중하게 종녀의 앞으로 내밀었다.'“죄송합니다. 이름을 먼저 알려드려야 했는데. 놀라셨죠? 이상한 사람 아닙니다. 이 앞에 있는 왕인건설에 다니고 있는 왕은혁이라고 합니다. 그저 할머님이 비를 맞고 계셔서. 쉽게 그칠 비로 보이지도 않고, 만약 저희 할아버지가 이런 상황에 처해 계시다면 누군가가 도움을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한 일입니다. 놀라지 마십시오.”'은혁은 예의를 갖춰 자신의 행동을 설명했다.'“고맙네.”'종녀는 은혁의 말을 듣지 않아도 그가 얼마나 따스하고 자상한 사람인지 알 것 같았다. '은혁의 눈이 그렇게 말해 주고 있었다. 종녀는 가만히 은혁을 올려다보았다. 은혁은 다시 분주한 시선으로 종녀의 일행을 찾고 있었다. 그런 은혁을 보고 있자니 종녀는 자신의 손녀인 수인이 떠올랐다. 이런 청년이 수인의 남편이 된다면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은혁을 바라보고 있자니 꼭 안 될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곧 종녀는 은혁의 눈을 피해 은혁이 건넨 명함을 자세히 살펴보았다.'왕인건설 대표이사 왕은혁. 왕인건설?'‘그렇다면 이 아이가 그 왕가의 손자란 말인가?’'종녀는 놀라 은혁을 올려다보았다. '세상이 알아주는 다혈질 무대포 왕만석에게서 이런 반듯한 청년이 나왔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왕만석과는 이런저런 인연으로 친분이 있었다. 비록 가까이 지내는 사람은 아니지만 은혁을 보고 있자니 친하게 지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가족이 될지도 모르는 사이였다. 종녀는 은혁을 자신의 손녀사위로 콕 점을 찍은 것이다.'‘늙은 호랑이한테 전화를 넣어야겠군.’'종녀가 만석에게 전화를 넣을 생각을 한 그때 종녀의 기사가 허겁지겁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아마 심부름을 가다가 비가 와서 급히 다시 온 모양이었다. 기사는 종녀의 옆에 낯선 이가 있는 것을 보고는 잔뜩 경계하는 눈빛이었다.'“괜찮네.”'“네.”'기사가 대답했다.'“고마웠네. 젊은이.”'종녀는 자신의 무릎을 덮은 양복을 건네주자 은혁이 고개를 저었다.'“비를 맞으셔서 추우실텐데 가져가십시오. 전 사무실에 여벌의 옷이 있어 괜찮습니다. 그리고 댁에 돌아가시면 잊지 말고 꼭 감기약 드세요.”'은혁은 기사의 손에 우산을 들려주고 등을 돌렸다. 기사는 서둘러 종녀를 차 안으로 모셔왔다.'“좋은 청년이지?”'“그렇게 보입니다.”'“수인이 짝으로 딱이지?”'“네?”'“아닐세. 어서 가세. 우리 은혁이 말대로 감기약이라도 먹어야겠어.”'“설마 아까 그 청년이 우리 은혁이, 입니까?”'“그렇다네. 어때? 이름도 좋지 않나?”'뜨악한 표정의 기사 얼굴이 보이지 않는지 수인은 은혁의 등만 바라보았다. '“왕인건설의 왕만석, 그 사람에게 전화 좀 넣어 주겠나? 진지하게 할 얘기가 생겼네.”'그나저나 저 곰 같은 노친네를 뭘로 꼬인다?'뭐든 만만치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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