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서울의 한 대학 캠퍼스에는 ‘연인의 오솔길’이라는 고즈넉한 길이 인문대와 공대 사이에 있다. 봄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여름에는 눈이 부시도록 선명한 초록으로 뒤덮이며, 가을에는 은행나무가 별처럼 쏟아낸 노오란 은행잎이 그 길을 찾는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아 두곤 했다. 그리고 함박눈이 소리 없이 내리는 겨울에 그 길을 걷노라면 마치 이 세상과는 단절된 듯한 기묘한 아름다움에 젖기도 했다.'벚꽃이 예쁜 그림엽서처럼 휘날리는 어느 봄날 저녁. '한 남자가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넣은 채 그 길을 걷고 있었다. 남자는 은은한 달빛 속에서 흩날리듯 떨어지는 벚꽃들을 잔잔한 미소와 함께 바라보았다. '오늘은 평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거닐고 있었다. 그건 벚꽃들을 더욱 더 신비롭게 하는 달 때문이었다. '다정하게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고 거닐던 연인들은 가끔 그 달을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한껏 젖히곤 했다. '남자는 약간 자리를 벗어나서 벚꽃 나무 아래 여유로이 섰다. '자신도 고개를 들어 세상의 모든 기운을 머금고 있는 듯한 둥근 보름달을 바라보았다. '벚꽃이 휘날리는 봄날, 남녀가 보름달을 같이 바라보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다. '남자는 그 전설을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고개를 다시 접으려다 우연히 벚꽃나무를 사이에 두고 서 있는 한 여자가 자신의 시야에 들어왔다.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는 여자의 옆모습. '그녀다.'여자는 달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고개를 젖히고 서 있었다. '남자는 여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깊은 눈동자로 오랫동안 바라만 보았다. '약간 키가 큰 여자는 목덜미를 덮는 긴 커트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단추가 서너 개 달린 브이넥의 하얀 면 티가 달빛을 받아서 푸른 기운을 발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남자는 여자가 조금이라도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어 주길 바랐다. 하지만 여자는 은은한 달빛과 따스한 저녁바람과는 달리 평소처럼 무심하고 차가운 표정이었다. '남자는 깊은 한숨을 숨기며 고개를 돌려 여자가 바라보는 달을 같이 바라보았다. '벚꽃. 보름달. 그리고 여자. '남자는 전설을 가슴속 깊이 새기며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