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엔 아침잠도 없고 부지런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침잠이 좀 많아도 성실한 사람이 있는 거 아니겠어? 어째서 지각 좀 했다고, 어! 지각 좀 했다고 사람을 댕강 자를 수가 있냐고!”'“글쎄, ‘지각 좀’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지.”'레미는 담담한 목소리로 직탄을 날리길 서슴지 않는 민경을 게슴츠레 흘겨보았다. 레미의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민경은 식혜를 한 모금 마시며 찜질방을 휘휘 둘러보았다.'“출근 시작한 이래로 너, 지각 안 한 적이 없을 정도라며? 반년을 주구장창 지각해 놓고, ‘그깟 지각 좀 했다고’라는 건 어불성설 아니니?”'“와, 기집애! 독한 년. 친구가 실의에 빠져 있는데 장단 좀 맞춰 주면 어디가 덧나니? 나는 뭐, 내가 문제 있는 거 몰라서 이러냐고. 그냥 오늘 같은 날엔 하소연 좀 받아주면 어떻다고. 그렇게 꼭 있는 얘기로 비수를 꽂아야 직성이 풀리니, 독한 년아?”'“나 이런 줄 모르고 친구 삼았냐?”'“살벌한 년.”'레미는 답답한 속을 차가운 식혜 몇 모금으로 달래고, 바닥에 컵을 비장하게 내려놓았다. '“두고 봐. 보란 듯이 더 좋은 곳에 취직할 테니까!”'“퍽도.”'아무렇지 않게 코웃음을 치는 민경의 작태에, 레미는 관자놀이에 핏대가 파닥 서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건 의욕과 오기일 뿐, 민경에 대한 분노나 미움은 아니었다. '“자각 좀 해라. 이벤트 회사에서 만날 지각해서 회의에 늦고, 행사에 늦고 그러던 너야. 그 정신머리로 뭘 해?”'“지각은 좀 했지만 일을 엉망으로 하진 않았잖아. 지각 외엔 정말 열심히 일했어. 계획이나 준비, 클라이언트 관리 등등, 다른 건 정말 완벽했다고. 지각 때문에 일이 틀어진 적도 없고.”'“넌 기본적인 신뢰에서 그 믿음을 상실했던 거야. 늘 사람들을 조마조마하게 만들었잖아. 얘, 왜 또 안 와? 이러다가 펑크 나는 거 아냐? 연락해 봐. 왜 연락은 안 돼! 또 자는 거 아냐? 버스에서 잠들었나?”'민경이 늘어놓는 대사에 레미는 입을 삐죽이면서도 반박하지 못했다. 매번 아슬아슬하게 나타나 일을 멋지게 잘 마무리하긴 했지만, 자신이 나타나기 전까진 관계자들이 손에 땀을 쥐며 대기 상태였다는 걸 모를 리 없는 레미였다. '“그래도 나도 하면 잘 했다고……. 똑 소리 났단 말야.”'“그러게. 똑 소리 나게 아침잠도 좀 끊어보지 그랬어.”'“끝까지 위로의 말은 한 마디도 안 하네, 무서운 년.”'“나 같은 친구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 취향에 맞지 않으면 언제든 버려도 돼.”'“독한 년!”'레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민경의 당당하고 강한 모습에 감탄을 마지않았다. 자신과는 다른 면이 많은 민경이었지만, 레미는 그런 민경이 좋았다. 독한 말을 들어도 싫지가 않았다. 오히려 자극이 되고, 눈앞이 밝아진다는 느낌이었다. '누군가의 위로를 받으며 그 절망 속에서 약자로 웅크리고 싶은 자신을 독려하는 것도 언제나 민경의 독설과도 같은 냉염한 말 한 마디였다. 그녀가 짚어주는 레미의 문제 상황에 대한 진단은 틀린 적이 없었고, 개인적인 감정이나 판단이 배제되어 있어서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는데 도움이 되었다.'“집에는 언제 들어가려고?”'레미는 툴툴거리며 맥반석 계란껍질을 까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이번에도 잘리면 호적에서 파버린다고 했는데…….”'“‘늦잠 자다가 잘리면’이었겠지.”'“그렇게 콕 안 집어줘도 잘 알거든요? 휴우.”'레미는 퇴사와 동시에 회사에서 마련해 준 아파트에서도 나오게 되었지만, 당장 집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한심한 노릇이었다. 아침잠 좀 줄이면 될 것을 그게 그렇게 어려우니, 스스로도 이해불가였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아킬레스건이 있듯이 레미에게는 아침잠만은 어쩔 도리가 없는 인생 최대의 약점이자, 단점이었다.'“그래도 찜질방에서 살 순 없잖아. 생각 정리 잘 해서 내일 집으로 들어가라. 손바닥만 한 내 기숙사에서 네 짐도 좀 찾아가고.” '“아직 삼 일밖에 안 됐거든.”'“삼 일이면 네 바보 잠 바이러스가 내 생활에 침투하기엔 충분한 시간이란 말도 되거든.”'“헉.”'“난 슬슬 기숙사로 돌아가 봐야겠어. 논문 때문에 봐야 할 책도 있고, 점호 시간에 걸리지 않으려면.”'“그래.”'레미는 민경과 함께 샤워를 하고, 그녀가 돌아갈 채비를 하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얼마 전까지 전국에 체인점을 갖고 있는 온천호텔 기업의 홍보팀에서 사보를 맡고 있던 민경은 과감하게 자리를 버리고 나와 대학원에서 국문학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중이었다. 매사에 결단력도 빠르고, 자신이 선택한 일에 한 치의 게으름도 없이 실행해 나가는 민경을 볼 때마다 레미는 자신의 성격과 비교가 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주눅이 들진 않았다. '이런 사람이 있으면 저런 사람도 있는 법 아닌가. 자신에게도 장점이 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레미였다. 지나치게 낙천적인 게 그녀의 장점이라면 장점일 것이다.'샤워를 하고 돌아갈 준비를 마친 민경이 계산을 하는 동안, 레미는 계산대에 널브러져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열쇠 간수 잘 하고. 넌 잠들면 업어 가도 모르니까 몸땡이 간수도 잘 하고.”'“내 몸땡이야 무게가 좀 나가니까 쉽게 업어가진 못할 거야. 그래도 열쇠는 잘 간수해야지.”'“삼 일이면 됐지 않니? 정말 언제 집에 들어갈 생각이야?”'“내일쯤 들어갈 생각이었어. 취업하고 나서 집에 들어가겠다고 큰소리는 쳤지만, 사실 여기선 취업 준비를 제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며칠 바깥 잠 자고, 눈칫밥 좀 먹고 들어가면 울 엄마도 매몰차게 구박하진 못할 거란 계산인 거지.”'“근데 어쩌냐? 며칠 찜질방에서 지내더니 때깔은 더 좋아진 것 같은데?”'“정말? 에이, 그럼 안 되는데!”'레미는 계산대 위에 오른쪽 팔을 쭉 뻗어 그 위에 널브러진 민폐 자세로 곤란하다는 듯이 몸을 배배 꼬다가 뒤통수에서 들려오는 감미로운 저음에 귀가 번쩍 뜨였다. '“얼마죠?”'얼마죠, 얼마죠, 얼마죠, 얼마죠…….'레미의 귀에 그 말이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지더니 마침내 여운으로 감돌았다. '‘목소리 끝내준다!’'레미는 심장의 두근거림이 목구멍까지 느껴질 지경이었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도 한 목소리였지만, 주위에서 쉽게 들어볼 수 있는 레벨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레미는 조심스레 자세를 바로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남자가 눈치채지 못하게 힐끔 그를 돌아보았다. 남자는 계산대 뒤에 붙어 있는 가격표를 읽고 있었다. 남자의 옆모습은 가히 예술조각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만큼 완벽했다. '‘오오!’ '옆으로 자연스럽게 넘긴 긴 앞머리 사이로 예민해 보이는 짙은 눈썹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아래 그윽한 속눈썹이 세심하지만 서정적인 남자의 눈빛을 감싸고 있었다. 그려놓은 듯한 콧매와 아찔하도록 관능적인 입술은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전체적으로 조각처럼 반듯하고 세밀한 조각상 같은 외모와는 달리 눈빛은 물기를 머금은 듯하고, 입술은 잔인한 섹시함을 갖춘, 완벽한 남자였다.'“그만 봐. 침 흐르겠다.”'“아앗, 따가!”'넋 놓고 남자를 바라보던 레미는 자신의 어깨를 후려치는 민경의 손길에 펄쩍 뛰며 맞은 자리를 벅벅 긁어댔다. 민경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가까이 있는 남자가 듣지 못할 만큼 작지도 않았다. 레미는 민망함으로 민경에게 바짝 다가가 나지막하게 소리쳤다.'“내가 뭐뭐뭘! 뭘 봤다고 그래!”'“너 조금만 늦었어도 침 흘렸어. 고마운 줄 알아야지. 마지막 자존심은 지킬 수 있도록 도운 줄이나 알아.”'“무슨 소리야?”'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레미에게 의미 있는 웃음을 지어 보인 민경은 그녀를 밀어내고 남자에게로 다가서며 아는 척을 했다.'“널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웬일이야, 백건담?”'“어? 이렇게도 만나게 되네.”'‘백건담?’'레미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건담과 민경의 대화에 귀를 기우리며 머리에 잔뜩 힘을 주었다. ‘백건담’이란 이름 석 자에 퍼뜩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그 이름도 특이하야 절대 잊을 수 없는 백건담. 세상에 그 이름을 가진 남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자고 가려고?”'“어. 그렇게 됐다.”'“별일일세. 네가 이런 데서 잠을 다 자고. 어쨌든 잘됐다. 너, 레미 알지?”'“레미? 혹, 그 도레미?”'순간, 레미는 짓궂은 건담의 싸늘한 목소리에 뒤통수가 따가웠다. 좀 전의 감미롭던 목소리는 어디가고, 악마의 속삭임과도 같은 싸늘한 목소리만이 남아 자신의 이름을 되뇌고 있는 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서, 설마. 그 백건담? 진짜 그 백건담?’'“레미도 오늘 여기서 자야 하거든. 여자 혼자 자는 거 걱정됐는데 잘됐다. 서로 그다지 친분이 있는 사이는 아니란 거 알지만, 이렇게 다시 만난 김에 회포도 풀 겸 좋은 시간 보내라. 난 이만 간다.”'레미는 아무렇지 않게 자신과 건담을 이어주고 유유히 사라지는 민경을 붙잡으려 돌아섰다. 그러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건담의 시선과 딱 부딪쳤다. 뭔가 재미난 것을 발견한 듯한 건담의 입가엔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래, 벌써 십 년이 훨씬 넘은 일인데! 설마 지금까지 속 좁게 담고 있겠어? 그냥 동창생 만난 듯 인사하면 되겠지?’'레미는 건담의 환한 미소를 믿어 보기로 했다. '“안녕? 오랜만이다, 그치? 십 년 만인가? 십 년도 넘은 것 같지? 이런 데서,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는데…….”'“반가운 척 하지 마. 우리, 그런 사이 아니지 않나?”'“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