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달의 왈츠

“이관우 씨, 잠깐 여기 좀 봐주세요.”'“한 말씀만 부탁드립니다.”'“신미영 양과 결혼은 언제쯤 하실 건가요?”'검정색 롤스로이스 팬텀에서 내리자마자 카메라와 마이크를 든 기자들이 플래시를 터트리며 관우에게 달려들었다.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심야에도 불구하고 클럽 벨리알(belial) 앞은 기자와 파파라치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180센티미터를 훌쩍 넘는 커다란 체구의 관우에게 몰려드는 기자들을 가드들이 재빠르게 진압하자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사이를 재빠르게 헤치며 지나갔다. '새빨간 카펫이 깔려진 계단을 따라 벽화를 보고 내려가다 보면 스올이라고 부르는 화려한 금장식의 큰문이 바로 홀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홀을 둘러싼 스물한 개의 vip룸은 무대를 한눈에 내려다보게 통유리로 설계되어 있었는데 그 독특한 분위기와 까다로운 입장절차 덕분에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출입했다는 것만으로 자랑이 되는 곳이기도 하였다. 이곳의 주인이 리어슨 해밀톤이라는 재미교포라고 하지만 실질적인 주주는 이관우라는 소문이 있었다. 냉혈거부(tycoon frost)라는 별명을 가진 그가 왜 이런 난잡한 클럽에 투자를 했는지 알 수 없지만 비가 오는 날에는 꼭 클럽에 나타난다하여 날씨가 궂은 날은, 유독 클럽입구에 많은 미녀들이 줄을 서 있는 진풍경을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였다.'“배팅중인 거 알아? 이번엔 끝까지 갈 거라는 쪽이 압도적이야.”'“할 일들도 없군.”'“가능성이 있는 건 아니고?”'“사람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못해.”'“과연. 그것도 한결같으니까 정말 그럴싸한 이유처럼 보이는 걸?”'짙은 루비빛깔의 액체가 담긴 크리스털 잔을 들고 있는 리어슨은 무심히 홀을 내려다보고 서 있는 관우를 쳐다보았다. 남성미가 넘치는 외모와 최고급 수제품만을 상대한다는 그의 화려한 취미는 수많은 미혼여성들에게 환상을 심어주는 왕자님일지 모르나 관우를 직접 만나본 여자들은 예상도 못한 차가움에 괴로워했다.'“당신 말이야, 아직도 메데이아에 관심 있나?”'들라크루아의 메데이아라고 부르는 그 그림은 생전에 관우의 어머니가 무척 좋아하던 그림이었다.'관우는 그런 어머니를 위해 이 작품을 구입하려고 백방으로 수소문했었지만 늘 헛수고를 하고 말았었는데 우습게도 현재 그림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리어슨이었다. 몇 번이나 부르는 가격에 응하겠다며 팔라고해도 꿈쩍도 안 했던 그가 드디어 넘길 마음이 생긴 모양이다.'“원하는 가격을 말해.”'“그냥 줄 수도 있어. 돌아가신 할머니의 취미였지, 나는 그림에 대해선 문외한이니까. 대신 게임을 하나 하자.”'“게임?”'리어슨은 대답을 기다리는 관우의 시선을 일부러 피하면서 소파에 앉아 술잔을 들고 딴청을 부렸다.'''인터콘티넨탈 호텔 52층에 위치한 이태리 레스토랑 베네치아 룸에 우두커니 홀로 앉아있는 여자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아까부터 계속 테이블의 린넨 천 모서리 부분을 잡아 뜯고 있었다. 약속시간이 한 시간을 넘어가고 있는데 상대방은 나타나지 않았다. 핸드폰 액정을 쳐다보던 그녀는 한숨을 내쉬다 집게손가락 끝부분이 빨갛게 부어오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짜증이 날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날카로운 천 끝부분을 만지는 버릇이 있는데, 불안정해 보인다고 꽤 주의를 받아 고치려 노력을 했지만, 오래된 습관은 고치기가 참 힘들었다.''중앙재단 둘째 아드님입니다. 성함은 신하일. 올해 서른 살, UC버클리에서 공부를 마치고 이사로 대기발령중입니다. 사진, 보시죠.''오늘 만나는 사람은 JBC 방송국 차기대표로 불리는 남자다. 그동안의 만남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엔 집안 어른들의 사업적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는 비즈니스 관계가 더 맞다고 봐야 할 자리었다. 남자의 명함을 건네주던 홍보실 차 부장은 경원의 반응이 시원치 않자 사진까지 들이대며 호들갑을 떨었었다.'선 자리에서 만나는 남자들은 사람이 아니라 상품들이다. 그들은 그녀의 화장법이나 옷, 혹은 머리스타일을 흠 잡고, 심지어는 얼굴의 어느 부위를 어떻게 손대면 더 좋을 것 같다고 직접적인 충고를 해주는 괴팍한 고자질쟁이들이었다. '어차피 오지도 않을 것 같은 상대를 기다리는 것에 지친 그녀는 벨을 눌러 종업원을 불렀다. 바람은 맞은 거 같으니 시원한 맥주한잔 마시고 일어설까? 한껏 기지개를 켜고 창밖을 내다보던 그녀는 종업원이 따라놓고 간 맥주를 시원스럽게 들이켰다. 알싸한 맛이 갈증으로 졸리던 목을 시원하게 풀어주었다. 어쩌면 이런 결말을 원했는지도 모른다. 바람을 맞았다는 불쾌감보다는 불편한 만남을 안 해도 되는 것이 내심 기뻤다. 한낮에 마시는 맥주가 짧은 일탈 같아서 기분이 묘하게 상쾌했다.'그때, 갑자기 노크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리더니 감청색 슈트를 입고 사각 프레임의 안경을 쓴 남자가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아직 계셨군요. 늦어서 죄송합니다.”'갑작스런 맞선남의 등장으로 경원은 둥실 떠오르던 기분이 풀썩 바닥으로 떨어졌다.

미리보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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