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한 어느 날. 접이식 의자에 앉아 명렬표와 볼펜을 손에 쥐고 빙그레 웃는 남바쓰리를 보며 2학년 13반은 생각했다. '‘시간은 왜 이렇게 빨리 가는 것일까?’ '그 많던 준비기간은 다 어디로 날아가 버렸기에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다소 늦은 후회와 미련이 뒤섞인 오묘한 감정을 잘근잘근 씹고 있는 그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바쓰리는 흐으으음,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시작해볼까요? 1조부터 나오세요. 나머지 조는 자기 순서 아니라고 떠들지 말고. 정 안되겠다 싶으면 태도점수에서 감점합니다. 알겠지요?”'번호 순서대로 정한 조가 아니기 때문에 남바쓰리는 앉은 순서대로 1조, 2조 하고 이름을 붙였다. 1조 다섯 명을 제외한 스물아홉 명의 학생들은 뒤로 바짝 물러나 앉아 공간을 넓게 만들었다.'“조장이 나와서 조원 소개하고, 주제 설명한 다음에 시작하세요.”'“예. 저희 1조는 마성태, 민지선, 박미나, 박재균, 그리고 저 노시영, 이렇게 다섯 명입니다.”'흠흠, 목을 가다듬은 시영은 시선을 내리깔고 짐짓 슬픈 어조로 말을 이었다.'“저희 조의 주제는 ‘항일 투쟁’입니다.”'어딘지 스케일이 크면서도 색다른 주제에 남바쓰리는 “오오.”하고 두 눈을 반짝인 반면, 관중석에선 “뭐야, 쟤들 주제 뭐라고?”, “항일?”, “있는 척 하고 난리여.”, “존나 한 시간 전에 급조한 거 다 아는데 개 뻔뻔하네.”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항일 운동가의 집안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나라의 비극이 한 가정에 미치는 영향을 표현했습니다.”라고 주제소개를 마저 한 시영은 크에에엑, 과장된 얼굴표정을 하는 친구에게 슬며시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시영이 설명을 마치자 남바쓰리가 일곱 조가 제출한 음악 시디 가운데 1조의 시디를 오디오기계에 넣고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우우우우, 장중한 분위기의 무거운 음악이 흘러나왔다.''“뭐 하냐.”'“그러게. 뭐 할까.”'“주제부터 정해야 되는 거 아니야?”'“이래서 자유주제는 짜증난다니까. 그냥 뭐 하라고 정해주면 좋은데.”'“그러지 말고 차라리 음악 먼저 정하고 거기에 주제를 끼워 맞추는 게 더 쉽지 않을까.”'창작 무용 실기평가 이틀 전에 모인 1조는 운동장 구석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있었다. 점심시간과 방과 후를 활용한 모임만 해도 벌써 여섯 번이 넘건만 항상 시시한 수다로 시작해 시시한 수다로 끝나는 바람에 이렇다 할 성과가 없던 차였다. 실기시험 날짜가 코앞으로 다가와서야 급해진 1조 학생들은 이제 생각은 그만하고 행동해야 할 때라는 것을 느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학교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재균의 집으로 몰려갔다.''“검색해 봐, 검색.”'“뭐라고 검색해?”'“베토벤, 모차르트 그런 거.”'“근데 그런 음악은 막 한 시간 넘고 그러지 않냐?”'“대충 5분 되게 잘라서 쓰면 되지 않아?”'컴퓨터 앞에 둘러 선 조원들이 제각기 한 마디씩 해댔다.'“알았어, 알았어. 일단 들어봐 바.”'베토벤인지 모차르트인지를 검색해 본 재균이 제일 처음 검색된 페이지에서 음악을 틀었다. '“어, 어. 좋다, 좋아.”'“이걸로 해. 느낌 있고 괜찮네.”'“굳, 굳, 굳.”'“나도 좋아.”'벌써 흥미를 잃은 조원들은 방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재균의 방을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어? 나도 이 앨범 있는데.”'“걔네 이번 꺼 다 괜찮더라. 타이틀곡보다 10번인가 11번 트랙에 있는 노래가 좋던데.”'“근데 너무 기계음이 많아서 막상 부르면 그저 그렇더라.”'“오, 한 번 불러봐.”'불러봐, 불러봐! '어느새 분위기는 전국 노래자랑이 되어 갔다. 조원마다 한 명씩 돌아가며 노래솜씨를 뽐내자 이번에는 재균이 가지고 있는 최신 가요 시디를 틀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오예!”, “신난다!”, “잘 춘다, 잘 춘다!”, “소리 더 키워!”하고 난리 브루스를 추던 그들은 해가 까무룩 넘어가고 나자 아뿔싸, 또 놀아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러나 시험공부와 숙제는 당일 아침에 해야 그 참맛을 알 수 있는 법. 음악을 정했으니 이젠 문제없다며 긍정적으로 생각한 그들은 파이팅을 외치며 헤어졌다.''“쟤네 지금 뭐하냐?”'“뭐 이렇게 흐느적거려?”'“자꾸 똑같은 동작만 하고, 저거 반칙 아니야?”'항일투쟁을 하러 고향을 떠난 자식 역할의 성태와 미나는 매트 위를 하염없이 걸어 다니다 불현듯 돌아보며 총을 쏘거나 수류탄을 투척하는 시늉을 한 뒤 갑자기 데구르르, 앞구르기를 하고 있었다. 고향집의 어머니 역할인 지선은 삯바느질을 하거나 걸레로 방을 훔치는 동작을 하고 있었고, 아버지 역의 재균은 황소 역할의 시영과 함께 밭을 일구는 중이었다. '소품이나 대사 없이 몸짓으로만 주제를 표현해야 하는 건 알겠는데, 각자 따로 자리를 잡고 단체로 흐느적거리고 있으니 보는 입장으로서는 어떤 반응을 해야 좋을 지 알 수 없었다. '집 떠난 항일투사들이 갑자기 빙글빙글 돌다가 무대 중앙에서 쓰러지자 음악의 박자가 빨라졌다. 바느질감을 내팽개치고 자식들의 주위를 돌며 입을 가리고 머리에 손을 얹으며 슬픔과 분노를 표출했다. 시영 역시 머리를 쥐어뜯을 듯 부여잡으며 무릎을 꿇었다가 일어섰다가 하며 큰 동작들을 취했다. 압권은 시영이었다. 풍비박산 난 가족을 지켜보던 황소가 미쳐버린 것이다. 미친 소가 된 시영은 뒷발질을 몇 번 하더니 몸을 잔뜩 낮추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간혹 아버지나 어머니 역을 맡은 재균과 지선을 훌쩍 뛰어넘는 점프연기를 선보였다. 미친 소가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와중에 재균과 지선은 쓰러진 자식들의 가슴에 손을 대어 숨을 불어넣어 주는 동작을 했고, 쓰러진 두 자식들은 그럴 때마다 가슴 펌핑을 하더니 어느 순간 되살아나 눈을 떴다. 온 가족이 둥글게 둥글게 모여서서 만세를 하는 것으로 끝이 나는 이 창작무용 작품은, 한 마디로 굉장히 난해했다. ''웃음기가 싹 사라진 남바쓰리는 도저히 어떻게 점수를 매겨야 좋을지 몰라 골머리를 앓다가 “수고했어요.”라는 말만 남기고 2조를 호명했다.'“저희 조의 주제는 ‘쇼핑중독’이구요, 조원은 고석환, 김새봄, 나주형, 남주리, 서미소입니다.”'어째 다들 주제가 그럴싸한 것이 더 불안해진 남바쓰리는 묵묵히 리모컨으로 2조의 음악을 플레이했다. 또각, 또각, 또각. 경쾌한 구두소리가 들렸다. 쇼핑에 중독된 주리가 백화점에 들어서는 소리였다. 마네킹 자세를 취하고 두 줄로 늘어선 다른 조원들을 빠르게 지나친 주리가 이것도 사고 싶고, 저것도 사고 싶어서 미칠 것 같다는 표정으로 무대를 뱅글뱅글 돌다가 통통 뛰더니 다시 뱅그르르 돌았다. 마네킹처럼 움직임 없이 서 있던 다른 조원들은 “나 좀 봐.”, “나를 갖고 싶지 않니?”, “자, 어서 쇼핑해.”하는 듯 주리의 곁을 맴돌며 워킹을 하거나 슈퍼모델들의 포즈를 따라했다. '백화점을 둘러보는 시늉을 하는 처음 30초를 제외한 3분 동안은 거의 마네킹들의 움직임이 주가 되었는데, 할 만한 포즈가 다 떨어지자 최신 유행 댄스를 선보이는 등의 애드립을 구사했다. 관중석에선 인기 가수의 안무를 따라하다니 표절이 아니냐며 때 아닌 표절시비가 불거졌다. 경쾌한 음악이 총소리와 함께 멈추더니 추격전에 나올 것 같은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카드빚을 떠않게 된 주리가 마네킹들로부터 도망가고, 마네킹들이 주리를 끈질기게 추격하는 장면이었다. 여기서 2조는 또 한 번의 표절시비가 될 장면을 보여주었다. 마네킹들이 단체로 총을 쏘는 동작을 하자 주리가 매트릭스의 한 장면처럼 상체를 뒤로 숙이고 팔을 휘저어 총알을 피하는 모션을 보여준 것이다. 게다가 마네킹들에게 붙잡혀 쓰러진 뒤, 다시 마네킹에 의해 가슴 펌핑을 하며 되살아나는 장면은 이미 1조에서 선보인 바 있는 춤이었다. 같은 동작일 경우, 먼저 하는 사람이 장땡이었으므로 1조는 2조를 위로하는 차원에서 열심히 박수를 쳐 주었다. ''시간을 허비하기로는 1조와 막상 막하였던 2조는 하필이면 같은 조원 모두가 인기 온라인 게임 “오호우”의 유저인데다가 알고 보니 모두 같은 길드 원이었다. “쇼핑 중독”은 모일 때마다 조원이 합심하여 PC방으로 고고 씽하여 괴수들을 때려잡은 결과, 급하게 만들어낸 결과물인 것이다. 어젯밤에도 대동단결하여 승률을 올린 2조는 다들 눈 밑이 퀭한 것이 긴 휴식이 필요해 보였다.''“3조, 나오세요.”'2조를 위해 “수고 많았어요.”라는 말만을 남긴 남바쓰리는 평가지 위를 배회하던 볼펜을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하는 사람보다 보는 사람이 더 수고가 큰 것 같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르고 있었으나 인내심을 발휘하여 침과 함께 꾹 삼켜버렸다.'“양지성, 윤 산, 전광혁, 정병철, 조재중입니다.”'3조는 남초 현상으로 인해 조원이 모두 남학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저희 3조의 주제는 ‘생명의 탄생’입니다.”'1, 2조가 보여준 심오하고 난해한 예술의 세계를 충분히 뛰어넘을 수 있을 것 같은 충격적인 주제였다. 이런 기대심리를 예상했는지 3조의 음악은 실로 파격적이었다. 아아아아악! 하는 여자의 신음소리는 분명 아이를 낳는 산모의 음성을 넣은 것이라 생각이 되었지만.'“좀 야하다.”'“많이 야한데.”'“무슨 숨소리가 절반 이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