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하늘은 구름 한 점이 없이 맑았다.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는 깔끔한 남색의 정장을 입고 있었다. 어린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오뚝한 코는 어린 아이답지 않게 선이 분명해 보였다. 그 아이와 많이 닮은 남자가 회색빛의 재킷을 걸쳐 입으며 허리를 숙여 안아 들었다.'“내려가는 동안 엄마 말씀 잘 들어야 한다.”'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팔로 남자에게 안겨 목을 꼭 껴안았다. 남자는 직접 뒷좌석 문을 열어 아이를 내려놓고 안전벨트까지 매주었다.'“운전은 김 기사에게 부탁하는 게 좋지 않겠소?”'“아뇨. 그냥 어차피 쉬러 가는 거니까 편하게 가는 게 좋겠어요.”'“그럼 조심히 다녀오시오. 도착하면 전화주고.”'삼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두 부부는 한 번씩 서로를 안아주었다. 차가 출발하자 커다랗던 3층 집이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동현은 뒤돌아 앉아 손을 흔들고 있는 남자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두 손을 흔들어 주었다.'“앞으로 올래?”'그 목소리에 아이는 안전벨트를 풀지도 않고 몸만 빼와 앞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시골을 가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아이는 무척이나 들뜬 것 같았다. 하지만 여자의 얼굴은 밝지 못했다.'“엄마, 소. 송아지.”'아이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들판에 풀어져 있는 소를 가리키고 있었다. 여자는 안쓰러운, 그리고 불안한 얼굴로 겨우 입매만 올리며 웃었다. 한참 떠들어대던 것도 지쳤는지 아이는 편안한 얼굴로 잠이 들었다. 여자는 손을 뻗어 보드라운 아이의 뺨을 몇 번이나 쓸어내렸다. 손길 때문에 잘 자고 있던 아이가 두 손으로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엄마. 울어? 울지 마.”'자리에 발을 딛고 완전히 일어난 아이는 손을 뻗어 여자의 볼에 흐르고 있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 손길에 위로를 받은 것인지 여자의 눈에서는 더 많은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이는 작은 손으로 몇 번이나 눈물을 닦아주었다.'그때였다. 시야가 흐려져 흔들리던 차가 맞은편에서 오는 트럭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브레이크를 밟으며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었지만 브레이크가 작동이 되지 않았다. 바로 옆은 낭떠러지였다. 가드레일을 박은 차의 유리는 산산조각 부서져 있었다. 여자의 얼굴은 피범벅이었고 그 품에 안겨 있던 아이는 놀라서 제대로 울음을 터트리지도 못했다. '겨우 눈을 뜬 여자가 있는 힘을 다해 운전석 문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고장이 난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문제가 생겼는지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때 차가 기우뚱하며 점점 옆으로 미끄러지고 있었다.'“아, 아가!”'“엄마.”'여자는 있는 힘껏 아이를 창밖으로 밀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차가 완전히 미끄러지며 여자의 마지막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들리지가 않았다. 듣고 싶은데 아무 것도 들을 수가 없었다.''* * *''“동현아!”'멍하니 벤치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는 것도 허용이 되지 않는 것일까?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는 쉬고 싶었다. 잠을 자지 못한 지 서른여섯 시간이 넘은 것 같고 밀려드는 환자들로 인해 밥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화장실을 언제 갔는지 기억도 나질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겐 이런 쉬는 시간도 사치였다.'아니, 아주 잠시 잠깐 잠이 들었던 것도 같았다. 몇 번이나 꾸었던 꿈이었다. 정확히 무슨 사고인지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굉장히 다급한 상황이었다. 피범벅이 된 여자가 그를 부르기 위해 입을 크게 벌리고 있지만 늘 마지막 그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장신의 그는 포대기 같은 흰 가운을 걸치고 있어도 모델 같았다. 조금은 까무잡잡한 피부에 선이 고운 얼굴선. 그는 잘생겼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 남자였다. '천사원에서 그는 늘 공부만 했었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부모도, 형제도. 이 사회에서 무시당하지 않고 살기 위해서 그는 오로지 공부만 했다. 타고난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노력 끝에 돈을 잘 벌기 위한 수단으로 의대에 입학한 것이었다. '깨어있는 시간에 그는 늘 공부를 했었다. 학교는 장학금으로 다니고 있었지만 생활비도 필요했다. 그래서 비교적 시간적 여유가 있는 방학 때는 과외를 꼭 두 개씩 맡아서 하는 것도 일상다반사였다. 다행히 명문 의대생이라는 이유로 과외는 무척이나 쉽게 구할 수 있었고 여름방학만 투자한다면 1년간의 생활비는 해결이 될 정도였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는 학기 중에도 과외를 하나씩은 꼭 맡고 있었다.'흰 가운이 잘 어울리는 앞에서 걸어오는 남자는 동현에게 그다지 반가운 친구는 아니었다. 늘 1등을 도맡아 해오던 동현에게 처음으로 패배의 맛을 보게 해준 남자였다. 국회의원인 아버지에 병원 원장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말 그대로 ‘도련님’에 가까운 존재였다. 그는 어려움 한 번 없이 자랐고 늘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이었다. 그래서 동현은 그에게 열등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웃는 것이 늘 당당하고 당연한 사람이었다. ‘이지성’이라는 남자는.'“얼굴 보기 힘들다? 왜 그렇게 힘든 외과를 지원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