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 ……네.”'단 두 마디로 전화를 끊는 가원을 보고 유성은 황당한 얼굴을 했다. 가원이 머리를 손질해준 덕분에 그는 한결 깔끔해져 있었다. 샤워를 하고 머리를 깔끔하게 묶어서인지 그의 이목구비가 더욱 뚜렷하고 선명했다.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그가 자신의 휴대전화를 바지 주머니에 넣으며 물었다. '“누군데 그렇게 전화를 받아?”'“수호 씨. 자꾸 언제 오냐고 묻기에.”'“걱정되니까 그러겠지.”'“응. 계속 전화도 안 받아서 좀 화난 것 같아.”'“그러게 왜 전화를 안 받아? 전화라도 좀 받지.”'“방해받기 싫어서.”'가원은 시무룩하게 말하고는 슬쩍 벽시계를 쳐다보았다. 수호가 지금 이곳으로 올라오고 있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한다. 열이 올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갑자기 마음이 급해져 그녀는 얼른 유성에게 말했다. '“자, 이제 내 선물 봐도 돼.”'가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성이 테라스로 몸을 돌렸다. 그가 테라스에 들어서자 가원이 유리문을 닫고 안에서 문을 잠갔다. 유성이 무심코 돌아보다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유리문 안쪽의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원이 그에게 손짓하여 불렀다. 다가온 유성은 문을 열려 하다가 잠근 걸 알고 장난으로 여겼는지 손으로 빨리 열라는 시늉을 했다. '문득 눈에 눈물이 고인 가원이 유리창에 입술을 가져가 꼭 눌렀다. 잠시 그대로 정지했던 유성도 이내 그녀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갔다. 두 사람은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짙고 깊은 입맞춤을 나눴다. 차디찬 유리창으로도 어김없이 전해져 오는 그의 절절한 사랑이 가원의 가슴을 슬프게 울렸다. '그에게서 입술을 떼자마자 가원이 돌아섰다. 그에게서 몸을 돌리는 순간 그녀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그녀는 급히 코트와 가방을 챙겨 문으로 걸어갔다. 뒤에서 다급히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그의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고 나면 미쳐버릴 것 같아서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가 방문을 열었을 때, 문 앞에는 이제 막 도착한 수호가 서 있었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금고 열쇠를 꺼내어 그에게 건넨 뒤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그럼 부탁하고 갈게요.”'수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려가시면 경호원들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방 안으로 수호가 걸어 들어오는 걸 보고 유성은 자기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돌아서버렸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수호가 거짓이길 바라는 것처럼. 그리고 그는 그때서야 탁자 위에 놓인 자신의 담뱃갑을 발견하고 심장이 쿵 떨어졌다. 방 안에 놓아둔 담배가 왜 여기 있는 걸까. '다가가 떨리는 손으로 담뱃갑을 들어 올렸다. 굵은 펜으로 또박또박 쓴 글씨. ''[사. 랑. 합. 니. 다.]''황급히 돌아선 유성이 유리창을 미친 듯이 두드렸다. '“가원아! 가원아! 심가원! 문 열어! 문 열어!”'하지만 수호는 석상처럼 서서 묵묵히 그를 쳐다만 볼 뿐이었다. '“안 돼! 가원아! 안 돼, 가원아. 혼자 가면 안 돼. 이러면 안 돼. 이러지 마. 이러지 마, 바보야.”'그녀의 선택은 결국 이것이었던가. 그를 이 호텔방에 버려두고 가는 것. '‘겨우 이렇게 떼어내려고 했어?’'어이없어 실실 웃다가 어느 순간 유성이 미끄러지듯 유리창을 타고 무릎을 꿇었다. 그의 두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모든 게 끝이라는 예감에 그는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왜! 왜 이런 식이야, 왜! 흐흐흑! 가원아! 가원아!”'이런 이별은 그로서도 상상치 못했던 것이었다. 그녀가 어떤 생각으로, 어떤 마음으로 이곳에 오자고 했을지 이제야 안 유성은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이렇게 돌아설 거면서 그동안 아무 일도 없는 척 웃고 떠들 수가 있었을까. '겁 많고 여리기만 한 줄 알았는데 뜻밖에 매몰찬 구석이 있다, 이 여자. '유성은 유리창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울다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어 가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생각 외로 빨리 연결됐다. 가원이 머뭇거리거나 일부러 받지 않아서 얼마나 감사한지 유성은 그녀에게 섭섭했던 마음이 금세 눈 녹듯 녹아버렸다. '“심가원, 장난 그만 해.”'- 장난 아니야.'“이러지 마. 너 혼자 어떡하려고 그래?”'- 처음부터 성이 씨 도움 필요 없었어.'“뭐?”'- 성이 씨 도움으로 될 일 아니야.'냉담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에 유성은 가슴이 참담하게 무너져 내렸다. '“가원아.”'- 그러니까 성이 씨도 이제 갈 길 가. 내가 전에 말했지. 내가 원할 때까지만 날 사랑해줄 수 있느냐고. 그때 성이 씨, 그러겠다고 했어. '“그래도 이건 아니야. 내가 말한 건 모든 일이 완벽하게, 안전하게 다 끝났을 때를 말한 거였어. 이건 아니라고!”'- 내가 원하는 건 지금이야. 바로 지금. 지금 이 순간! 성이 씨가 곁에 있으면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아. 그러니까 떠나줘. 부탁이야.'“심가원!”'- 다시는 나 찾지 마. 그 돈 갖고 떠나. 어머니 모시고 어디로든 가.'“야!”'- 그렇게 해! 내 말대로 해, 제발! 날 미치게 하고 싶지 않거든 그렇게 해.'“내가 미치는 건? 널 이렇게 보내고 난? 내 평생에 너만 가슴에 담고 살아야 할 난? 돌아와 준다는 약속 한마디 안 했어, 너!”'- 안 돌아갈 거니까. 성이 씨한테 갈 수 없으니까, 난.'“다 필요 없어! 다 필요 없으니까, 너만 보고 살아도 되니까…… 곁에서 보게만 해줘. 그거 외엔 너한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아무것도 원치 않을 테니까, 절대 옆에서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까…… 떠나라고만 하지 마.”'- 떠나겠다고 했잖아. 내가 원하면 언제든지…… 떠나겠다고 해놓고 왜 이제 와서 딴소리야?'“거짓말했어! 우는 널 달래려고 없는 소리로 내 맘대로 지껄인 거야. 떠날 마음, 조금도 없었어. 처음부터 그럴 생각 없었어!”'- …….'“그러니까 당장 이 문 열어!”'- 소용없어. 난 내 길 가는 거야. 그리고 성이 씬 성이 씨 길 가는 거야. 그럼 되는 거야. 우리, 만난 적도 없었던 거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아? 우리, 아무 일 없었다고. 만난 적도 없었고, 사랑한 적도 없었고, 이별한 적도 없었던 거야. 성이 씨와 나 사이엔 아무 일도 없었어. '“아니, 난 널 만났고, 난 널 사랑하고, 난 원치 않는 이별을 당했어. 넌 날 만났고, 넌 날 사랑하고, 너 역시…… 원치 않는 이별을 할 뿐이야.”'전화 속에서 이를 악물고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참 울고 난 그녀는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 원해서 될 일이 있고 원해선 안 되는 일이 있어, 성이 씨. 난 그걸 좀 늦게 깨달은 것뿐이야. 잘 있어, 성이 씨. ……미안해.'“가원아. ……가, 가원아. ……가원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