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잔을 기울이다 말고 가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참 이상해요.”'“뭐가?”'“유성 씨 다시 만난 거요.”'“나 알은체한 거 후회해?”'“유성 씬요? 여기서 나 만나서 싫지 않았어요?”'“왜?”'“날 자꾸 만나서 유성 씨한테 좋을 게 없잖아요.”'“나보다야 네가 더 그렇겠지.”'“모르겠어요. 난 다른 무엇보다 내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화가 나요.”'그녀의 눈빛은 슬픔과 분노로 가득했다. 그렇기도 하리라. 범인이 누구인지 알면서도 되레 쫓겨 다니는 신세라니 어찌 자신이 가련하지 않겠는가. '“오늘, 여기서 나 만난 거 나중에 후회할지도 몰라.” '하지만 가원은 유성의 말뜻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한 말을 꺼냈다. '“어차피 사는 게 다 후회투성인걸요. 하지만 유성 씨를 난처하게 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약속했잖아요. 유성 씬 이 일과는 무관한 사람이에요.”'가원은 호텔 앞에서 그와 재회했을 때 일부러 피한 게 그의 안전을 위해서였노라고 마음을 내보이고 싶었다. 그런데 그는 이미 그때 일은 까마득히 잊은 듯했다. '“한 가지만 묻자. 네 숙부와 사촌 오빠가 왜 네 가족을 죽인 건지. 그 정도로 사이가 나빴던 거야?”'“아뇨. 누구보다 사이가 좋았죠. 나야 미국에만 있어서 속사정이 어떤지 정확히 모르지만요. 하지만 누구나 형제의 우애가 좋다고 부러워한걸요. 나도 그런 줄로만 알았고요. 사고가 나기 전까진 아무런 눈치도 못 챘으니까요.”'결국 남들 앞에서 우애가 좋은 척 쇼를 했다는 건가? '유성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새로운 눈이 떠지고 있었다. 비뚤어지고 썩어빠진 세상을 바로잡아 보겠다는 알량한 영웅심 따위가 아니었다. 그의 모든 생각은 오로지 가원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복수할 방법은 있어?”'“가장 확실한 방법은 미국에서 사고 조사팀이 돌아와 사고가 아닌 피살의 흔적이 있다고 밝히는 거예요.”'“치밀하게 세운 계획이었다면 밝혀내기가 쉽지 않을 텐데?”'“두 번째는…… 현일 오빠가 날 납치해 죽이려 했다는 걸 증명하는 거예요.”'유성이 눈을 들어 가원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법정에서 증명해주길 바라는 걸까? '유성은 그녀의 마음이 한층 궁금해졌다. '“내가 증인이 되어줄 거라고 생각해?”'가원은 그의 억측을 단숨에 막았다. '“바라고 한 얘기는 아니니 오해 말아요. 내 일에 더 이상 끌어들일 생각은 없어요. 그러니까 부담 갖지 않아도 돼요.”'“그럼 세 번째 방법은?”'“유언장을 찾는 거요.”'“유언장이라니?”'“아빠가 돌아가시기 전에 뭔가 눈치를 채신 게 분명해요. 오빠 앞으로 남긴 유언장 말고도 내 앞으로 몰래 유언장을 남겼다고 했어요. 나와 아빠만이 아는 장소에 그 유언장을 숨겨뒀다고 차 실장님이 말해주었죠.”'“그럼 뭐가 문제지?”'유성이 의아한 얼굴로 묻자 가원이 낙담하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그 장소를 모른다는 거예요.”'“망했군.”'“진짜 바보 같지 않아요? 어떻게 장소를 모를 수 있는지.”'어처구니없게 울상을 짓는 가원을 바라보며 유성은 빙긋 웃음을 머금었다. 그녀를 돕는다는 건 감방행을 자처하는 일이다. 법정에 서면 어쩔 수 없이 상수도 끌어들여야 하고, 상수가 몰래 살인 청부를 받았다는 걸 알면 상수의 보스이자 한때 유성의 양부였던 강태수 사장님이 상수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죽어도 아들이 감방 들락거리는 꼴은 못 본다는 어머니 때문에 정말 죽자고 깡패 되는 짓만은 않겠다고 하늘에 맹세했던 유성이었다. 그래 봐야 도찐개찐이었지만. '이번엔 진짜 마음잡고 잘 살아보고자 했었다. 어머니 고생시켜 드리지 않고 편안히 모시며 사람답게 살아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는 제 손으로 그 꿈을 가뿐하게 내던져버렸다. '“만약 내가 널 위해 증인이 되어주겠다면, 넌 내게 뭘 해줄 거지?”'“유성 씨…….”'“김칫국 마시지 마.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니까.”'“날 돕겠다고 나서면 유성 씨가 위험해질 수도 있어요. 알잖아요.” '가원은 진심으로 그를 걱정하여 정색했지만, 유성은 심각하게 조언했다. '“내 걱정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하기만 하다. '“아직은요. 아직은 유성 씨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지 않아요.”'“왜? 서울에서도 내게 도와달라고 했던 건 너였어.”'“알아요. 그렇지만…… 이 일에 연관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요. 아무리 하찮은 약속이라도 지켜야 한다고 아빠가 그러셨어요.”'어이구, 이 고지식한 아가씨. '도와주겠다는데도 마다하는 가원의 순진함에 유성은 난감한 표정을 감추듯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래서 나와 한 약속 지키겠다고 질러갈 수도 있는 길을 돌아가겠다는 거야?”'“서울에서 무슨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려봐야죠. 그때 도움을 청해도 늦지 않아요.”'“그때 돼서 내 마음이 변하면 어쩌려고?”'가원이 빙그레 웃었다.'“그러면 어쩔 수 없고요.”'“바보.”'이렇게 더러운 인연도 인연이라고 약속을 지키겠다니, 유성은 바보 같은 그녀 때문에 마음이 애잔해졌다. '무료하고 짜증이 나는 세상. 다시는 태어나고 싶지 않은 저주의 땅. '무심하고 냉혹하게 살아온 삶이다. 살면서 그나마 한 가지 좌우명이 있었다면 엄마의 마음에 대못은 박지 말자였고, 철이 든 다음에야 가졌던 희망이라곤 엄마 모시고 필리핀에 이민 가서 거미 형과 열심히 살아 보자는 거였다. '그런데 그녀로 인해 삶의 목적과 목표가 바뀌었다. 평상시 궤도를 이탈해도 한참이나 이탈해버렸다.